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람을 따르는 신자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로마서 3:4)


   우리는 앞에서 주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신앙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왜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알려면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사단의 끔찍한 전략에 의한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창세 이래로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진행되어오고 있으므로 성경을 조금만 세밀하게 연구하면 즉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대로 사단에게 속고 있다.

그렇다면 사단의 탁월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높이는 일이다. 간단한 이 전략이 놀랍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지옥에 데려가는데 성공하였고 기독교를 3류 종교로 타락시켜 비참한 모습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사람이 창시자가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시작하셨고 그의 아들, 즉 사람이 아닌 신께서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종교들은 사단이 인간 중에 명철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 능력을 입혀주어 종교 창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위력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계(靈界)의 이와 같은 실상을 인간들이 한번만이라도 상상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은 사단이 기독교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실상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좋고 실력이 있고 외모가 나아보이면 곧잘 사단의 목표가 된다. 일단 사단은 자기의 목표를 정하고 나면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그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자로 세운다. 성공하게 하고 남보다 다른 장점이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한다. 그는 명성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특별한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로 나타나도 사람들은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나타나며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받은 종이라고 자기를 선전하기에 이른다.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도 나은 것이 아니며 특별하여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단은 사람을 높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에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람 우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선량한 양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마태복음 23장에서 경고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마태복음 23:8~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에는 선생이 없는 것인가? 지도자도 없는 것인가? 아비도 필요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하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비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아보는 바울과 같은 지도자가 교회 안에 많아야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생으로 호칭 받으며 군림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지도자라 칭함 받으며 양들을 늑탈할 것을 막고자 한 뜻이다. 아비라 하여 양들과 격차를 두고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디모데전서 2:5).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날 기독교의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다. 인간이 교회를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운영한다는 미명아래 인간의 생각대로 만들어낸 제도일 뿐 우리의 왕 되시는 주님은 이 일을 인정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정코 외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교회는 유기체요 생명체이다. 교회는 가족이다.

   첫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이 일에 사울왕은 합당한 본이다. 그는 전쟁에 승리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사무엘상 15:12). 이 일로 말미암아 주님은 슬퍼하시고 사울의 왕조를 철회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자신의 명예와 기쁨을 위하여 당연히 죽이라고 하였던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슬퍼하시고 사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념비를 세울만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여 그들 중심으로 교파를 만들어 오늘날 수많은 교단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사단은 이일을 주도하여 성공했고 그러므로 사울을 떠난 하나님이 오늘의 기독교를 떠난 것이다. 슬픈 일이다. 생각하여 보자. 루터, 칼빈,웨슬러, 무디 등 얼마나 많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는가. 그러나 그들을 오늘날 교파의 우두머리로 추앙하는 일은 결단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다.

   둘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시니 복음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구원받는 역사가 점점 사라지다가 결국 오늘날은 구원을 말하는 것조차 이단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어떤 교파에서 만든 이단 분별에 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이단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사도들이 구원을 외쳤고 구원을 받으라 하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 성경말씀이 아닌가(사도행전 2:40, 4:12, 16:31, 에베소서 2:8, 유다서 3절 등).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강조하면 이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구원을 강조하지 말라는 오늘의 가르침이 사단의 가르침이 아닌가? 구원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 예수 이름을 우리 언어에서 지우라는 뜻이 아닌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기독교인들이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성경과 다른 당신의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고자 하는 순전한 신자, 성자 같은 신자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잘못된 교회는 속히 떠나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떠난 교회는 사람이 만든 조직으로 운영되고 거듭난 적 없는 교인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말씀도 성령도 없다.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인데 결국 사단의 전략에 의해서 종교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이 교회 안에서 힘을 얻으며 교회를 운영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 그러나 분명히 알것은 성경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에 오늘의 기독교가 바른길로 가려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제도를 성경 안에서 찾고, 헌법은 성경으로, 지도자는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교회를 향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 살아날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할 것이며 거듭난 성도들로 교회당이 채워져서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큰 예배당을 짓는데 교회의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큰 건물보다 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해야 할 것이며 많은 숫자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끝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모든 기독교인을 다 지옥 자식으로 정죄하려 함이 아니다. 다만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성경을 기준하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여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인가 살피며 자신의 영혼의 문제도 겸손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옥에 가는 사람 모두 불쌍하지만 그 중에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종교생활하다 지옥에 가는 사람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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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십자가만 자랑하라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필자는 많은 독서를 한 사람이라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어떤 책도 성경만큼 한가지 주제를 분명히 증거하는 완벽한 책은 없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분명한 주제를 통해서 인생을 깨우치고 있다.

   어떤 이는 "성경은 어려워서 읽지 못하겠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어찌 아비가 자식에게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하는자가 있겠는가? 하물며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자녀 된 인간에게 주신 말씀인 성경이 당연히 쉬워야 하지 않겠는가!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특히 중세 및 근대 기독교가 일반인들의 성경 접촉을 막거나 혹은 성경을 어려운 책으로 가르쳐왔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또는 깨달을 수 있는 쉬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면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요 구원의 성취는 십자가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디모데후서 3:15).

   성경에서 십자가를 빼어버리면 성경은 당장에 쓸모 없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해 버린다.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은 쓰여졌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달은 후 뜨겁고 간절한 마음으로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 누구도 십자가 앞에 나오지 않고 결코 하나님을 만날 자가 없다.우리 신앙의 시작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진행도 십자가요 우리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의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만 있다. 인간이 사단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모든 능력도 십자가에서만 나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린도전서 1:18).

   진실이 이러할진대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믿고 증거하고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러므로 사단은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십자가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훼손하려고 대적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교회적 문제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서신을 보내면서  마지막 결론의 내용이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갈라디아서의 주제들을 마감하려 함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주제가 되며 결론이 되는 십자가의 역할에 대해서 몇 가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다.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죄를 무조건 용납하시거나 죄에 관여하시거나 죄인과 상종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인간이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단의 꾀임을 좇아서 죄인의 길로 들어간 까닭이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선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타락의 길로 간 것이다(전도서 7:20). 창세기 1장 27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함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악한 모습으로 만든 것은 절대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아버지)을 버리고 사단을 아버지로 섬김으로(요한복음 8:44) 사단을 따라서 포악해진 것이다. 사실 현재도 인간의 속성 깊은 곳에 선한(거룩한) 성품이 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로마서 7:21)라고 고백하였다.

   이제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은 약간의 선한 성품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결코 나아질 수 없는 신분과 상태로 전락하여 버렸다. 만약 성경이 구약만 기록되고 그리스도의 실체를 나타내는 신약이 진술되지 않았다면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고 전 인류는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구원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자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데살로니가후서 1:8).

   그러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끊어진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는 무슨 역할을 하였는가?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는 그 위대한 최후의 순간에 외치신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한복음 19:30).

   여기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죄인을 구속하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즉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 란 단어로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갚아야 할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갚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 인류의 죄, 즉 창세 초기의 아담으로부터 마지막 인간까지의 모든 인간의 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 '갑'이라는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현재 주님을 심히 모독하는 사람이다. 그는 십자가의 속죄를 안 믿을 뿐 아니라,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의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이미 2000년 전에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에서 고통 중에 돌아가신 주님은 '갑'이라는 사람의 죄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왜 지옥에 가는가? 그것은 그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이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든다. 더러운 죄인이 거룩해지는 것은 십자가의 길뿐이다. 이제 거듭난 자는 죄인이라 하지 않고 거룩한 의인이라 칭한다. 이제는 하나님과 상종할 자격이 주어진 의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속죄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로마서 3:23~24).


   둘째로 십자가는 능력이다. 구원받은 신자는 어떻게 이 악한 세대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함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신자가 구원받았을지라도 신자의 육체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있어서 신자를 괴롭힌다. 사단은 이 육체의 속성을 이용하여 신자로 하여금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능력은 이러한 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능력이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십자가에 달리신)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

   사단은 우리 육체의 속성 중 정과 욕심을 사용하여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의 죄의 근원은 정과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정욕이 역사하여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때 십자가 앞으로 나가면 불같이 일어나던 정욕이 사그라지고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회복 받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성도를 용서하지 못하다가도 십자가의 사랑이 중심에 살아나면 저절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변화된다.

   모든 평강의 근원도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다. 죄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즐겨하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묵상하기 바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셋째로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른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갈라디아서 5:11).

   바울이 만약 할례와 율법의 행위를 전하였다면 핍박이 없었을 것이요 그러하였다면 바울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십자가가 전해지는 곳에는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 구원받는 자들이 십자가로 인하여 성장하며  용감하게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사단이 가장 싫어하는 성령님의 역사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전하고자 하는 곳에는 반드시 사단이 핍박하며 자기의 종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일삼는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종파, 큰 교회에 속하여 자신은 정통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부로 판단하고 핍박하며 스스로 정통적인 믿음의 소유자로 위로 받고 있는데 이것은 엄청난 자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사단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여 왔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항상 핍빅하는 자 편에 선 자들이 이단이요 거짓이었다.

   물론 오늘날 실제로 잘못된 이단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경우도 많지만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들도 핌박받는 자 중에 있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핍박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가인이 아벨을 핍박하였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에서가 야곱을, 사울이 다윗을, 여러 잘못된 왕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다. 예수님도 핍박 받고 이단으로 정죄받아 죽임을 당하셨으며 제자들도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순교하였다.

   오, 독자여! 그대가 참된 진리 중에 있는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그대가 지금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받는 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교회사에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핍박을 받았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다. "이(십자가 예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복음 5:10~12).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경의 역사나 교회의 역사는 정상적인 하나님의 종들이 심한 핍박에 시달렸음을 잘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거대한 조직들이 참된 하나님의 교회들을 자기 교인들을 지킬 목적으로 얼마나 정죄하고 있는가? 이 핍박은 주님 오실 때까지도 계속될 것이다.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좁은 문"의 비밀을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끝으로 바울이 탄식으로 경고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떻게 변질 되는가 하는 문제다. 그것은 "핍박을 면하려는 생각"으로부터 변질 되는 것이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함 뿐이라"(갈라디아서 6:12).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모양을 내고 타협을 하고 안일한 생활을 추구할 때 참 진리는 점점 변질되어 가고, 성령의 능력은 점점 떠나간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복음의 초창기에 온갖 핍박을 정면으로 대적하며 담대하게 나아갔을 때 능력과 성령 충만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경험을 회상하는 성도들을 필자는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핍박을 면하려고 부드러움과 평안을 추구하며, 여러 가지 지혜와 학문적 방법이 동원되고, 종교적 형식을 흉내내며, 이러한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용납하는 동안 숫자는 늘어날지라도 이미 교회는 변질되어가고 성령의 능력은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우리가 순종하던 성경의 진리가 놀랍게 변질될 때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는가?

   필자는 생각하건대 전도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다고 본다. 정상적 전도라면 십자가의 본질을 분명하고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다. 바울도 전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고린도전서 1:21). 비록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앞세우고 담대히 전진하여야 한다. 핍박이 더 일어난다 할지라도... .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베드로전서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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