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12 과

                           결론(6:11-18)


거짓 선생들의 목적(6:11-13)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권위역 성경에는 "내가 친필로 너희에게 얼마나 긴 편지를 썼는지 보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긴 편지를 썼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서신은 아주 짧은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그가 항상 하던 대로 대필자에게 대필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글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을 대적하려는 그의 깊은 감정과 그가 얼마나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든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로부터 추측하는대로 그의 시력이 나빴던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유대주의자들은 많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형성함으로 육체의 모양을 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주장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습관을 바꾸라고 요구받지 않는 한 종종 예식과 의식을 기꺼이 지키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도 낮은 표준으로 많은 교인들을 형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위선을 보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피하려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저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육체의 성품과 그 고결한 노력에 대한 죽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악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메시지를 싫어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6: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실제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많은 추종자들을 자랑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으로 회심자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산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에 할례자인(즉, 유대인) 그들 조차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제임스 보이스).


바울의 목적(6:14-17)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의 자랑의 근거는 사람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은 바울에 대해 죽었고 바울은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으면 세상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도 세상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덧없는 쾌락에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며, 그가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에 대하여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핀들레이는 " 그는 세상을 결코 믿을 수 없으며, 세상을 자랑하지도 않고, 더 이상 세상에 경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영광에 대해 벗어버렸으며, 그를 다스리고 매력을 주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구분선입니다.

6;15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비록 처음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이구절은 이 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

   할례는 외적인 의식, 예식입니다. 유대인 선생들은 모든 것을 이 의식을 준수하는 것에 의존하게 했습니다. 할례는 유대교의 기초입니다. 바울은 "할례나...아무것도 아니로되" 라고 함으로 그것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예식이나 유대교나 율법주의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바울은 "무할례가" 라고 덧붙였습니다. 의식이 없는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교회봉사는 예식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생활을 보기 원하십니다.  핀들레이는 "참된 기독교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로 바뀌는 것이며, 죄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 창조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은 타락한 아담을 머리로 한 옛 창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창조에 속한 사람들은 죄악되고, 도울 자가 없으며,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성품으로 자신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으며, 변화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주님 안에서 죄에서 구속을 받고 새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 새 창조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성품이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어떠한 사상도 배제합니다. 거룩한 삶은 단지 의식을 지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신자들 안에서 주님께서 사실 수 있도록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옛 창조를 개선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규례는 무엇입니까? 새 창조의 규례입니다. 그는 "이것이 새 창조에 속한 것인가?" 라고 질문함으로 가르침들을 판단하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과 긍휼의 두가지 복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강도 긍휼도 없으며, 이 두가지는 새 창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율법의 종 되었던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속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기꺼이 종되기 원하여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종들에게 그 주인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이 바울은 그의 몸에 주 예수님이 주인되신 흔적들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 핍박자들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이제 그는 "누구도 나를 되사려고 하지말라. 나에게 율법에게 매였음을 나타내는 할례의 낙인에 대해 말하지 말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새로운 주인의 낙인을 가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의 축복 기도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그의 펜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덧붙이는 말로 끝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그의 복음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는 이 주제로 시작하였고(1:3) 이 주제로 마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며(출 20:2),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으나(롬 2:14), 그들의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갖고 있습니다(롬 2:14,15). 각자는 이러한 근거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롬 2:12). 하나님께서 인류의 표본으로 사용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류의 실패를 증명하였습니다(롬 3:19).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합니다(롬 7:7, 12, 14, 16; 딤전 1:8). 그러나 율법은 행위라고 하는 나쁜 원재료로 되어있습니다(롬 7:7-9). 율법은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입니다(롬 8:3).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히 7:19).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마 19:16-22; 눅 10:25; 롬 4:15; 5:20; 롬 7:7; 고전 15:56; 갈 3:19; 딤전 1:8,9). 율법을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죄되게(범법자로 만들지) 하지 못합니다(롬 5:13).

   율법을 듣는 것에는 아무 미덕도 없으며, 율법은 그것을 순종 할 것을 요구합니다(롬 2:13).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갈 3:10). 저주 아래 있지 않고는 율법아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갈 3:10; 5:3; 약 2:10; 11). 율법의 한가지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지않습니다. 율법은 사람 안에 잠자고 있는 욕망과 욕구를 깨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롬 7:9, 10).

   율법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아닙니다. 그 자손이 올 때까지 더하여진 것입니다(갈 3:19).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입니다(갈 3:24).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 5:17).

   주님은 주님의 생명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으며 주님의 죽음으로 율법의 두려운 형벌을 치루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기까지 없어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8). 그러므로 신자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율법을 이룬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자가 없습니다(행 13:39; 롬 3:20; 갈 2:16, 21; 3:11). 어떤 사람이 율법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날 이후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갈 3: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습니다(갈 3:13; 4:4,5).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7:4, 6; 갈 2:19).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3:25).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5:18). 율법은 신자들에 대해서는 없어진 것입니다(고후 3:7-11).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율법의 의가 이루어집니다(롬 8:4).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지만(롬 6:14, 15) 무법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 아래있는 자가 되었습니다(고전 9:21).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롬 3:31).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은 주 예수님에 의해 치루어졌습니다. "엄격한 의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지만 긍휼은 자기의 곳간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결코 폐해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 아홉가지가 신약에서 반복되었지만,형벌이 따르는 율법으로 반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의의 교훈으로 된 것입니다.


       계명                                                                          신약성경의 참조구절

1.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                                  마 4:10; 고전 6:9, 10; 10:7, 14; 요일 5:20,21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등                              행 17:29; 롬 1:23; 고전 10:7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마 5:33-37; 약 5:12

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2; 골 3:20

5. 살인하지 말지니라                                                               마 5:21, 22; 요일 3:15

6. 간음하지 말지니라                                                               마 5:27, 28; 살전 4:3-5

7.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고전 6:9, 10; 엡 4:28

8.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마 5:43-48; 엡 4:25

9.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롬 7:7


   한가지 계명이 반복되지 않았는데 그 한가지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가령 우리가 말씀 안에 일주일 중 하루라는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지라도).

   신자들의 생활 규범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요일 2:6). 주님은 우리의 표준이시며, 우리의모범이시며, 우리의 본이십니다(요 13:15; 15:12; 엡 5:1, 2, 8, 15, 16; 요일 3:16).

   은혜와 율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갈 4:30). 믿음과 율법은 반대의 원리입니다(갈 3:12).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지 않습니다(갈 3:21).


안식일에 대한 부록


   1.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 중 하나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하여 "없어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고후 3:7-11).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 구절이 의식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논쟁입니다. 7절에서 그 율법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도덕적인 율법, 바꾸어 말하면 십계명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다음에 11절에서 우리는 이 죽게하는 직분이 비록 영광이 있는 것이지만 "없어진" 것임을 읽게 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른 아홉가지 계명들은 신약성경에서 반복되었지만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은혜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교훈으로써 된 것입니다.


   2. 어떠한 이방인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유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출 31:13). 비록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안식일을 지키도록 어느 누구에게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내산에서 명하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3. 어떤 주장과 같이, 어떤 교황의 신조에 의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을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에 의해 따로 정했습니다.

   a. 주 예수님이 그 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이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

   b.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두 주일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9, 26).

   c. 성령님이 주의 첫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오순절날은 부활후 일곱번째 일요일입니다)

   d. 초기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떡을 떼기 위해 그날 모였기 때문입니다(행 20:7).

   e. 바울은 주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고전 16:1, 2).


   4.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고생스러운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을 안식의 날로 정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의 날과 함께 한 주일을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5. 안식일은 의무적인 날입니다. 주님의 날은 특권의 날입니다. 세속적인 일로부터 놓인 우리는 특별하게 그날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안식일은 처음 창조를 기억하게 합니다. 반면에 주님의 날은 새 창조와 연관되었습니다.


   7. 안식일은 올 것의 그림자로서, 그 취지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입니다(골 2;16).


   8.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 없습니다(골 2:16).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권위역 성경에 있는 골 2:16의 '안식일들" 이 주일의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안식일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다른 역본들은(한글 개역성경도-역자주) 그 구절에서 단수로서 "안식일" 이라고 했습니다.


   9. 율법은 어떤 한 날을 엄히 지킴으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롬 13:8-10; 갈 5:14).


   10.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십계명이 모든 세대에 대한 도덕적 원리들로 간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련된 계명이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것입니다.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옳다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

갈라디아서


                       제 5 과


                       율법과 약속(3:10-18)


   4과에서 우리는 이 서신의 네 주요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하여, 복음의 위대한 진리(3:1-18),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에 대한 고찰(3:1-5),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3:6-14)를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증거에 대해서 10-14절에서 계속해 살펴보겠습니다.

3:10 바울은 성경에서 율법은 결코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할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구절은 "율법을 범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주아래 있는 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명기 27:26절에는 "기록된바...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자"라고 말씀되었습니다. 이는 하루나 한달 혹은 일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율법을 항상 행해야 하며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다만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3:11 거짓 선생들은 다시한번 구약성경으로 반박되었습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사람을 의롭게 하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원어로 그 인용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살 것입니다.

3:12 율법은 사람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그 계명들을 지키도록 노력하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엄격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게 레위기에서 가르치고 있는대로 분명하게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와는 대조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믿음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는 구절은 이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3 속량(deliver)은 다시 사다 또는 구하다,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말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인 율법의 저주는 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형의 형벌을 갚으심으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하셨습니다. (바울이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했을 때 비록 유대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만 우선적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말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킨들란 존스는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반정도만 샀다고 생각했기에 그 나머지 부분을 그들의 할례와 다른 유대 절기와 의식들에 복종하여 사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 선생들과 기독교와 유대교를 혼합한 것에 속히 이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다' 고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참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람들의 대속자이신 주님께 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사람들의 죄가 주님께 놓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것으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무서운 사형의 저주를 참으심으로 사람들을 율법에서 건지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구원도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특히 죄인으로 나무에 달린것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의 표시라고 가르칩니다(신 21:23). 성령님은 그 구절을 구주께서 피조물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실 예언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느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그를 통해 온 세상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죽음의 형벌이 치뤄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가올 수 있기 위해 주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님을 말한 것이 아니며 바울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조건 없는 구원의 언약 안에 포함 되어 있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성령님은 율법이 막고 있는 한 오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죽으시고 영화롭게 되셔야 했습니다(요 16:7).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나타냈습니다. (1) 갈라디아인들의 경험과 (2) 구약성경의 증거, 사도바울은 이제 일상 생활로부터 한 예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인간 약속에 대한 의무(3:15-18)


   이 단락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속한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에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22:18에서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씨" (단수)라고 말씀하시고 "씨들" (복수)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직계후손인(눅 3:34)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순한 약속입니다.

   430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 약속에 어떠한 조건을 더하거나 어떻게든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나님의 일에는 더욱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주시는 복의 약속은 율법 준수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3:15 사람의 일에서도 어떤 언약이나 뜻에 서명을 하고 인을 치면 누구도 그 문서를 바꾸거나 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사람의 언약도 어기지 못할진대 하나님의 언약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3:16 유대주의자들은 비록 그 약속이 원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이스라엘 백성) 믿음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율법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분명합니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래서 갈라디아인들도 원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십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씨" 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 단어가 때때로 군중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 그 단어는 한 사람인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십니다)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어떠한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닙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과 그 씨(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러므로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사백년이 지난 후에 주어진 율법은 이 구원의 약속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약속을 한지 사백 삼십년 후에 율법이 온 것은 그 약속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약속은 뜻과 같은 것이며, 죽음으로 확증된 것입니다(희생의 언약으로 창 15:7-11과 히 9:15-22을 보십시오). 이것은 결코 폐하여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8 이 430년은 언약이 제정된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이 언약이 마지막으로 확증된 때 즉 야곱에게서부터 계산된 것입니다(창 46:1-4).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유업은 믿음에서 나지 않으면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모두에서 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조건없는 약속을 주심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난 유업은 구원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조건없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배제됩니다.

Posted by 행복자
,

             로마서


                              3과 하나님의 의 (1)

                                                         (3장 21절~31절)


   복음에 의하면 어떻게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신 죄에대한 형벌의 선언은 죽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벌하시며, 또 죄인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 라는 중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본 과의 본문에 "칭의"의 교리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 단원은 귀한 진리를 가진 매우 중요한 단원입니다.


   칭의(稱義)


   먼저, 신약 성경에 나타난 칭의의 뜻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칭의는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이 그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완전히 합당한 자로 여기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칭의는 신자 자신이 무죄하게 되거나 외형적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뜻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를 의의 옷으로 가리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부터 그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보시고, 하나님께 그가 용납됨은 그 자신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행하신 일 때문입니다.


   3.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는 것을,  마치 죄를 범한 일이 없거나, 죽은 것과 같이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들은 대체로 옳은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들은 다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이루어졌음을 뜻합니다. 칭의는, 그 이상으로 죄인이었던 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완전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심으로 의롭지 않은 그들을 실제로 의롭다고 부르시며, 죄가 있어도 죄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의가 없어도 의로 여기십니다.


   5. 그렇다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를 무마하시거나 묵인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그 후 그들을 실제로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성결이라는 이 과정은 신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이와 같은 감격적인 진리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주목해서 생각해 봅시다.


   (1) 우리는 21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의를 주시되 공정한 길을 나타내셨다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난 의입니다(21절),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거나 어떤 노력으로도 도저히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합니다.

   3)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21절) 이 말은, 곧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4)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22절). 이것으로 죄인들이 의롭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입니다(23절). 여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이 주어집니다(22,23절).

   6)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24절). 이 말씀은 사람들이 구원의 댓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음을 뜻할 뿐 아니라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우리에게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염려하시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7) 칭의는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습니다(24절).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묵인하시거나 용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율법은 죄인의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는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자기를 영접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그들의 범법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화목 제물" 이 되셨습니다(25절).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몸 소 피를 흘려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든 요구를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하신 이 일에 만족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제 그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9)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음은 하나님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의 죄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25절). "전에 지은 죄" 는 갈보리 십자가 사건 이전에 지은 죄를 가리킵니다. 이 죄는 당시의 시점으로 보아 아직도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하여 용서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갈보리 십자가를 믿음으로 뒤돌아보고 있으나, 구약의 선지자들은 십자가를 앞으로 내다보았습니다.

   10)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이 의롭다 하실 수 있는 것과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공정하심이 밝히 보여 졌습니다(26절).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죽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버림 받은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게 하심으로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셨습니다.

   11) 이 구원의 계획은 인간의 모든 자랑을 배제합니다(27절). 만일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자랑할 수 있을 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데에는 어떤 노고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만이 합당한 것입니다.

   12) 이제까지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람은 다만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28절)

   둘째, 칭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29,30절).

   셋째, 복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한 순종이 아니면, 그것을 범하는 자에게 죽음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상고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죄인을 위한 율법의 완전한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최대한도의 요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통하여 오히려 우리는 율법을 높이게 됩니다.

Posted by 행복자
,

성 경 개 요

                                                               윌리암 맥도날드


                                     머리말


      이 책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려고 하다가도 워낙 분량이 많고 개략적이나마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낙심하게 됩니다. 이 강좌는 바로 이렇듯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는 분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강좌입니다.

   성경을 전연 모르는 분이나, 시간의 여유가 별로 없는 분, 또는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르는 분에게도 충실한 성경의 안내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아울러 각 권의 개요를 공부하실 때마다 해당되는 성경을 직접 읽으셔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1과 역사의 기원


                                       창세기


   성경은 세계사가 아니며, 더군다나 어느 민족의 역사도 아닙니다. 성경은 다만 우리 인생들에 대한 당신의 뜻이 어떻게 펼쳐지게 되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필요한 사건들만을 하나님이 골라 뽑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중대 사건이 빠져있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는 사소하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가 있는 사건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맨처음에 있는 창세기에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먼저 인간의 기원과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사실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죄가 인간에게 들어 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창 3:15). 구약 성경을 계속 상고 해 가노라면 이와같은 세상의 구주께서 오실 것에 관한 계시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3장 15절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렇게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은 계속 타락해 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홍수를 보내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전멸시키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담이 창조된지 최소한 1600년 이후에 일어났었을 것입니다.

   노아 홍수 사건 후에도 인간은 거듭 거듭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인류를 땅 끝까지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노아 홍수가 있은 지 400년 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아는 성경에서 후에 바벨론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오늘날의 이라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다는것은, 지상 선민(選民)인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을 통하여 구주를 보낼 것과 가나안 일경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구약 성경의 대부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13장을 기점으로 하여 주목할만한 두 차례의 방랑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건은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과 모리아 산에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던 사건, 그리고 리브가와의 결혼 등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동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이삭에 이은 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사실들 모두 귀중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은 후에 그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될 12아들을 낳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블론, 요셉,베냐민입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것은 아닙니다. 메시야는 오히려 그의 형인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와 활동은 구약 성경의 어느 누구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요셉은 아버지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던 대상(隊商)들에게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바로 통치 하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되자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 식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다가 마침내 전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때로부터 270년 정도 지나 요셉이 애굽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요셉이 죽은 후에 다른 바로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히브리인에게 불친절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돌아 가는 것을 허락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바로가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끝내 돌이키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돌려 보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양의 피로 살아남지 않는 한, 모든 애굽 가정의 장자가 죽게 되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아니한 애굽 사람들은 집집마다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문에 피를 발랐던 이스라엘 가정은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기적적으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널 수 있게 하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수장(水葬) 하셨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삭과 애굽과 이후 증손, 고손을 거치는 동안에 200만을 헤아리는 민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약속의 땅을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 조직적으로 단결되었습니다. 가족과 가축들을 이끌고 광막한 사막을 행진하며, 도중 여러 지점에서 진을치고 유숙하는 수백만의 무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만나를 비오듯 내려 보내사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흰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지면에서 이 만나를 구하여 만나로 빵이나 과자를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을 떠난 지 3개월만에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잠시 동안 유진(留陣)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근처에 진을 치고, 근 일 년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시내 산은 호렙 산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민수기 10장 11절까지의 기록은 모두가 이 시내 산에 있을 때에 일어 난 사건들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제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의 행동규범이 될 율법의 체계화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해서나 그들의 죄악에 관해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이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십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은 지금까지 인간 정치 제도의 초석(礎石)이 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상 책임이나, 인간 관계상 상호 간의 책임에 관해서 많은 법률을 따로 제정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건축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이란 천막과 비슷한 구조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는 처소였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더구나 성막을 만드는 데에 쓰인 모든 자재와 모든 기구는 장차 오실 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잘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제도는 바로 이 성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교훈에 이어, 레위 지파를 택하시고 그 가운데서도 모세의 형인 아론의 가계(家系)를 택하여 제사장의 반차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말씀하시면서 이에 관련하여 제사장의 의복과 활동과 예식에 관해서도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시내 산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그 율법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돌아와 이를 보고 노하여 율법을 기록했던 두 돌판을 깨뜨린 후, 이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은혜와 긍휼을 약속하는 율법을 다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이제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고, 성막 건축 공사를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이 완성되자, 제사장들이 따로 세워지고 그들에게 제복이 입혀짐으로써 모든 일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자 밝게 빛나는 구름이 성막을 덮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출애굽기에는 우리의 실생활에 교훈이 되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1.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구원을 상징해 줍니다.

   2. 홍해를 건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작별하고 실제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교훈해 줍니다.

   3. 성막이나 성막에서의 봉사는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를 교훈해 줍니다.

   4.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 주시는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해 줍니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