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

 

                                              천국은 공짜다!

 

                                 공짜 모르고

                          지옥간 사람이야기(12)

 

                                                                                                                         - 허 윤욱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3:24).

 

지옥에서

나는 유명한 안티기독교인으로 지옥에 왔습니다. 입만 열면 기독교를 비난하고 성경을 공격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평생 비판만 하다가 지옥에 왔습니다.

나는 지금 지옥에서 이 말을 합니다. 나의 고통은 언어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온몸이 아프고 뜨겁고 고통스럽습니다. 내 몸은 까맣게 타 화상을 입은 상태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사람인 것을 여기 와서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 물론 나를 지옥에 올 수밖에 없도록 잘못된 것을 심어준 사람들을 비난하고 원망해 보지만 모두가 허사입니다. 사실은 남을 탓하기 전에 내 탓입니다. 모두가 내 탓입니다. 내가 무서운 것은 이 미치도록 아니 미쳐버린 상태로 고통을 당하는데 여기서 빠져나갈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은 끝난다는 약속이 전혀 없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끔찍한 고통입니다. 세상에 있는 여러분들이여! 혹시 내 말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이곳 지옥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한 유언

나는 15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늘 기침을 많이 하셨고, 집에 누워 계시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건강이 괜찮으면 나가서 일하러 다니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건축 일을 하시는데 열심히 하셔도 집안 살림이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15살 되던 해에는 다른 때보다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그냥 길을 걸어도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아버지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천식을 앓고 있었습니다. 한 번 기침을 하면 연달아 한참씩 하곤 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큰 아들인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절대 예수 믿지 마라." 나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왜 그러냐고 묻지는 못 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일하고 돌아오시다가 버스 속에서 천식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찌 하여야 할까? 어떻게 하여야 할까?'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의 유언은 나의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나를 지옥까지 데려온 결과가 되었습니다.

 

청년시절

이상한 유언이 나의 삶을 이상한 방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동생들에게 교회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기독교인을 만나면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저들을 살피는 습관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는 이상한 기독교인들만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기독교인보다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또한, 27살에 입사한 첫 직장에서의 상사도 기독교인이었는데 직원들에게 별로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하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뇌물 상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엔 안수집사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이곳에 와보니 장로 다음으로 대단한 직분이었습니다.

나는 여자 친구도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얼마동안 사귀면서 보니 겉으로는 착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로 실망했습니다. 나는 얼마 후 이별을 하면서 그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예수 욕은 먹이지 말라고 충고하며 돌아섰습니다.

그 즈음에는 인터넷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나는 인터넷에 들어가니 많은 안티 기독교인이 있는 것을 알았고, 곧 그들의 안티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스포츠에도 기독교인이 나오면 그냥 욕을 해댔습니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싫었습니다. 알고 보면 싫어할 만한 큰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싫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송충이를 본 듯 마냥 피했습니다.

술좌석에서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기독교를 비난했습니다. 술좌석에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주 편리하기도 하지. 일주일간 온갖 나쁜 짓 다하고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잘못했다고 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준다지. 참 편리해' 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장년시절

나는 장년시절에 더 높은 차원의 안티 기독교인이 되어갔습니다. 직장의 높은 사람이나 아랫사람 중에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나보다 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예수 믿으면서도 술 먹고 못된 짓 다했습니다. 심지어 2차 노래방에 가고, 또 더 나쁜 짓도 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교회에서는 집사님이라고 하니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 너희들이 천국가면 나는 더 먼저 천국에 간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나는 비록 술은 먹었지만 아내나 자식들 앞에 부끄러운 짓 안하고 가정과 직장에 충실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안 믿어도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그 자들보다 나를 먼저 천국에 부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많았습니다.

내가 기독교를 반대한 이유는 신문 지상에 목사가 음란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수시로 올라왔고, 돈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당파를 지어 서로 싸우며 교회가 갈라지는 전쟁을 수없이 들었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교도 각목으로 서로 패고 싸우면서 전쟁을 하곤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는 별로 관심이 없고 목사들 잘못하는 이야기만 귀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세상이 있을 때 엄청나게 큰 교회 목사가 돈 문제 이권 문제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두둔하고 그 반대파는 목사를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둘 다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저들은 헛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전능자라는데 저들을 당장에 심판해 버리지 왜 그냥 두겠는가? 절대로 신은 없다.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바보다. 저들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기꾼이다. 나는 지금 바른 말을 하는 정의의 사자다'는 생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인터넷에는 안티를 도와주는 많은 영상물마저 풍성했습니다. 성경을 폄하하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폄하하는

동영상물도 많았습니다. 기독교의 잘못된 부분을 드러내는 영상물도 범람했습니다. 지금 알고 보니 사탄이 사람들의 생명을 노략질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작품들인데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안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내 동생의 아들이 기독교 이상한 종파에 빠져서 갑자기 학교도 그만 두고 교회생활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찾아가 보았지만 면회도 할 수가 없는 이상한 집단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만났는데 예수님이 오셨다느니, 세상이 곧 끝난다느니, 기독교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동생네는 평안이 깨졌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동생의 사업도 괜찮았는데 그 일로 사업에 소홀하다 보니 어렵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동생집에 일어났습니다. 동생은 조카를 불러다가 집에 가두기도 하고, 매를 때리기도 하였지만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나는 더욱 기독교라 하면 이를 갈았습니다. 결국 조카가 말하기를 3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이 끝난다고 하기에 만약 그때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거기서 나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양해하고 집에서 거기 다니든 말든 상관 않기로 약속 하였습니다.

약속한 3년 후 그날이 되어도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조카는 약속대로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 교회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카가 약 5년 이상을 확신에 차서 따라가다가 거짓으로 밝혀지니까 허탈한 마음을 종잡지 못하고 공황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또 대학을 다니다가 중단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회적 무능력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시작하는 사업을 도우며 살아가지만 인생 낙오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기독교라 하면 이를 갈고 바난하였습니다.

 

행동으로 안티기독인이 되다.

내가 살던 동네는 도시지만 변두리였고 비교적 동네 사람들끼리 우애 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면서 보니 동네 사람 몇이 모여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물으니 동네에 교회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벌써 땅을 사서 건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안 될 일이요. 왜 이 동네에 교회가 들어옵니까? 막읍시다."

그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 반대 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네 택시 기사 두 명을 앞세워, 기도 소리에 새벽잠을 잘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게 했습니다. 시청에 민원을 내고 반대운동을 맹렬히 전개했습니다. 교회 측도 자기들이 합법적으로 건축하는데 왜 방해하느냐고 항의를 하고 진행하려 했지만 우리의 반대가 너무거세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심정

나는 지옥에 와서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봅니다. 아버지는 역시 기독교인에게 피해를 보고 실족하여 예수 믿지 말라고 유언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은 것은 사탄의 간교한 역사였음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탄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사탄이 종교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여 이곳에 데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가슴을 치고 통곡하지만 사탄에게 속아 이곳에 온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이것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내가 평생 안티기독교인으로 생활하고 이곳에 온 것은 완전한 사탄의 작품입니다. 사탄이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살다가 지옥에 온 것입니다. 지금 가슴을 쳐도 이제는 끝난 싸움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 이곳에 와서 보니 성경에 사탄의 정체가 모두 나와 있습니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 12:9).

이 말씀에 땅으로 내어 쫓긴 사탄이 땅에 와서 사람들을 꾀어 지옥으로 데려간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명백하게 기록하여 주었는데 나는 안티기독교 노릇만 하며 살다가 사탄에게 속아 이곳에 왔습니다. 다시 부탁드리니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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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 - 6월 20일

 

                            마가복음 7장 31-37절; 마태복음 15장 29-31절

 

                                         그가 다 잘하였도다.

 

 

   이방인 지방인 두로와 시돈을 떠난 후 주님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은 많은 이방인들에게 둘러싸여 계십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은 벙어리가 말을 하고, 불구자가 온전케 되고, 절뚝발이가 걷고, 소경이 보는 모습을 목도하면서 주님이 베푸시는 엄청난 치유의 능력에 놀랐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어떤 질병이 만성인가, 위중한가, 깊은가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베풀어지면 모든 질병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에 자연적인 계단식 극장 같았던 그 산허리에서는 이방인들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할렐루야 합창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15:31).

   마가는 또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중적인 치유가 이루어진 주목할 만한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그는 귀도 안 들리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는 자신을 주 예수님께 데려올 만큼 확신과 관심을 지닌 가족 혹은 친구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 사람을 데려오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정을 잘 아뢰었습니다. 즉 그를 대신하여 주님께 간절히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외롭고 점점 더 내성적으로 변해갔을 영혼은 이와 같이 자신을 보살피고 염려하는 친구들 덕택에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힘써야 하는 합당한 사역이 아닌가요?

   이 사람은 지극히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귀가 멀었습니다. 그리고 혀에 맺힌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듣지 못했고 남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그분께 능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귀는 둘이지만 혀는 단 하나입니다!

   일곱 부분으로 이루어진 주님의 손, 손가락, 침, 만짐, 하늘을 우러러보심, 탄식, 명령의 말 등을 기록했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러자 그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서 행해진 주님의 사역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모든 일을 다 잘 행하는도다!' 하나님의 온전한 종으로서 주님은 그들에게 또 우리에게 명장(名匠)이 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경우에 주님은 이 이야기를 퍼뜨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때로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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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 제자도

횃불 2020. 6. 19. 09:11

[되새김]

 

                                                    제 자 도

 

                                                                                                                         - 마일즈 스텐포드

 

그리스도의 제자는 먼저 주님과의 교제를 가오는,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경험하는 일과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은 둘 다 참된 제자도의 조건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해답이 되신다. 하지만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하다."

 

영적인 진보에 있어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억지로 압박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는 인도자로서 우리를 한걸음씩 인도하여 가십니다. 우리가 자기노력을 의지하여 싸우다보면 패배하게 되고, 그 때 우리는 이러한 절망적인 실패에 대한 해답을 갈구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해방에 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동일시), 이로 인해 그러한 자유로 들어가고 싶은 굶주림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의 사귐을 위한 자유입니다. 해결책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께 성별되게 만들 수 없고 어떤 것도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거룩에 대한 장애물을 죽음의 자리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G. Watt).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모든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내면에 영적인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영적 충동의 배후에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재생산하시는 성령이 계신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특징적인 표시는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섬김에 적합한 사람이 되려면 십자가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J. E. Conant).

 

주님께서는 제자도에 대해 언급하실 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아(self)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따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자기에 대한 죽음을 불러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새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옛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고, 새 것을 향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는 "죄에 대하여는 죽어버린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 (롬 6:11)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위해 주 예수님께서는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지 그 방법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십자가가 우리가 흔히 십자가라고 부르는 떠맡기 싫은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는 생명을 포기하고 자기에 대해 죽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을 사셨듯이, 이러한 삶은 또한 우리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은 어려운 순간보다 오히려 번영의 순간에 더 필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십자가의 충만한 축복이 우리에게 열릴 수 없다."(Andrew Murray).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십자가와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혼동하지 않으면 좋겠다. 때로 자기 연민에 빠진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를 한탄하면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십자가의 관점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취할 때,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가 되고,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며, 그분의 장사됨이 우리의 장사됨이 되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며, 그분의 부활생명이 우리의 생명의 새로움이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무거운 짐이나 어려움, 질병, 있기 싫은 상황이나 관계를 금욕적으로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을 견디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이런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십자가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져야 하는 십자가는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갈 2:20 참조).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영원한 해방선언이 어린 양의 보혈로 서명되었고 성령으로 인쳐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이 해방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기 슬프지만, 자신들이 받는 죄의 억압을 수용하지 않고 그것을 미워하는 자리에 온 사람들만이 자유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적대감은 죄인이든 성도들이든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는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만이 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굶주림이 강력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노만 다우티(Norman Douty) 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적인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길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길이 불신자들을 불쾌하게 하듯이 이 길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싫어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즉 죽음의 자리로 이해하게 되면, 그는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역을 완수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피할 수 없는 길에 마침내 복종하기까지 우리에게 굶주림을 허락하셔서 지속적인 압박을 느끼게 하십니다.

자아가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존재가 될 때, 그리고 우리가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 생명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될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깊은 부담과 주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이 십자가의 효력-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비참한 속박의 참담한 시절을 오래 겪다보면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자유가 참으로 귀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과 바울의 태도를 동일하게 갖게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히 12:2). 사도 바울의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너희 안에 이 마음(태도)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주는 십자가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성령께서 우리 개인을 위해 오랫동안 위탁 받아 보관해 오신 완결된 사역으로 여기고, 우리의 해방이 되는 십자가를 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위탁재산이 되는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속박이 그리스도 안에서 갈보리에서 깨뜨려졌음을 알게 되고, 자유에 대한 굶주림으로 인해 마음이 준비되면, 우리는 십자가의 완결된 사역을 의지하게 되고 우리 것으로 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기쁘게 그리고 기꺼이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완결된 해방의 사실을 내것으로 취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진실로 죄에 대해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경험에도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죽음의 완결된 사역을 깨닫게 하시고 이 사실을 모든 옛 본성에 적용시키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 곧 갈보리의 죽음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서 돌아서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우리 자신을 포함해서-을 의지하게 되면, 자아는 십자가에서 다시 풀려나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과 같이 우리를 노예 삼으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십자가의 완결된 사역을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아돌프 사피어(Adolph Saphir)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시작되고-'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도다'-주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끝나는 좁은 길은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자신 가까이로 이끄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주님께서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우리안에 사신다. 옛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옛 나에게 사망을 선고 하셨다. 우리의 삶에 주인은 둘이 될 수 없다.

만약 옛 '나'가 우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 되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구속의 위대한 사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을 기쁘게 붙잡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생명을 역사하게 하시고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삼으시며, 그분의 승리의 열차에 태워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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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 - 6월 19일

 

                              마태복음 15장 21-28절; 마가복음 7장 24-30절

 

                                            네 믿음이 크도다.

 

 

   그 장소는 가장  가능성이 적은 두로와 시돈 지방이었고, 그 사람은 가장 가능성이 적은 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언어로는 헬라어를 사용했고, 종교로는 가나안인의 종교를 가졌고, 민족으로는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그녀가 참된 믿음을 나타냈을 때 그것은 커다란 격려를 끼쳤습니다. 이 어머니는 "어린 딸" 이 귀신의 지배력 하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때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지를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즉 어머니의 마음의 극심한  고통입니다.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급히 그분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소원을 아뢰면서 긍휼을 구했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은 처음에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념하지 않고 더 열정적으로 외쳤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처럼 자신의 약함 및 도우심이 필요한 상태를 아뢸 때 그녀가 지닌 믿음의 힘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첫번째 반응에 대해서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오히려 그녀는 겸손히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즉 그녀는 개들인 이방인들 중 하나로서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축복이라도 기꺼이 먹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녀가 그분을 "주여" 라고 세 번 부른 사실에서 우리는 그녀가 주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끈질기게 간청하기로 결심한 후 딸을 위해 헌신적으로 매달린 까닭에 모든 장애물을 극복해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모본과 도전이 됩니다. 우리 역시 이러해야 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이는 주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틀림없이 그녀가 만난 주님은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은혜롭게도 그분은 격려의 말로 반응해 주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그녀의 믿음은 점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풍부한 믿음이었고, 지속적인 믿음이었고, 장애물을 극복해내는 믿음이었고, 담대한 믿음이었고, 승리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보상을 얻는 믿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주님이 주시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또한 이로 인해 그녀는 주님이 베푸시는 능력을 목도했습니다.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극히 적은 이들만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을 소유하여 주님이 친히 하신 다음의 말씀을 입증합니다.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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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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