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편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구원, 거듭남

                                                                                                                 - 차 광선

그 파란 하늘 아래 노랗게 익은 벼가 추수됩니다. 겨울이 오기 전 모든 알곡들은 거두어질 것이며, 추수가 끝난 후 들판에 남겨지고 버려지는 것들은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한 쭉정이 뿐일 것입니다. 거두어지는 것이 있고 버려지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오 선생님, 늦은 가을의 냉기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복음의 축복을 나누고 싶어 시작한 편지쓰기가 벌써 열 번째입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이제 마지막 서신을 준비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이후 한 번의 서신을 더 쓸 기회가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제게 안도감을 가져다줍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기회 때문입니다.

홍수가 난 때에 오히려 마실 물이 많지 않듯이,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쓸만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모든 정보는 저마다의 가치를 품고 인터넷 시장에서 유통되지만, 정보 중의 정보, 진리 중의 진리, 소식 중의 참으로 귀하고 기쁘고 복된 소식은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존재 이유와 삶의 실상과 죄와 심판의 엄중함과 구원의 길과 참된 자유와 환희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진리이고 정보이며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3).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죄인)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교회 예배당에 달려 있는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를 표시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속죄의 현장이고 분명한 증거임을 말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바다에 조난당하여 침몰한 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구조선이나 구조 헬기가 와서 생명줄을 던져 주지 않는 한 바다 위에 생존의 가망성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복음은 그 구조선과 생명줄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오 선생님도 세상이라는 절망의 바다에서 구조되어야 할 표류자 중 하나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마치 사람이 원하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무의 바다이며 사망의 바다입니다. 어둠의 바다이며 사망의 바다입니다. 어둠의 바다를 비치는 등대 같이 복음과 생명의 빛을 비추는 성경 말씀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각 제길로 갔거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우리의 죄를, 오 선생님의 죄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예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심이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이 내용을 읽었을 때 이것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오 선생님의 심령에 하나님의 음성이 메아리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우리가 아직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오 선생님께서 죄인으로 출생하여, 보이지 않으나 그리고 느끼지 못하나, 죄의 세력 아래서 죄악 된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오셨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여전히 죄악 된 삶을 살고 있을 때, 성경에 예언한 대로 오 선생님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는데,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오 선생님을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라 하는 한 지도자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대화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2-8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옛 예언자들의 기록과 모세의 기록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예언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보고가 들려오고, 더구나 그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일련의 이적 혹은 기적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했던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징조를 기억헤냈을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사야 53:2-3, 35:5-6).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문, 말못하던 사람과 듣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도록 고치셨다는 소문,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온전케 하셨다는 소문... 그 소문들을 확인하고자,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여 기록한 그 분이 아닌가 하여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록된 대로 당시 로마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피 흘려 죽음을 당했을 때, 이사람 니고데모는 몇몇 여인들과 함께 그의 장례를 치루는 것으로 보아(요한복음 19:39),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대로 오셨고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예언대로 부자의 묘실에 묻히셨고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려온 대로 이 모든 것이 바로 오 선생님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오 선생님도,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말씀 앞에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오 선생님도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우리가 출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그 몸의 출생 외에, 우리의 영혼이 말씀과 성령으로 출생하게 되는 영적 경험입니다. 그 신비한 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 것인가요?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그 복음이 보여주신 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관계없이 각기 제 마음대로 살아온 삶이 불순종의 죄로 살아온 삶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있는 죄의 실상을 깨닫고 그 죄와 그 죄로 인한 열매로 인해 슬퍼하고 괴로워할때, 그리고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렇게 상한 영혼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가십니다.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 위에 달린 당신의 아들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은하수 같이 넘쳐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외치신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로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강도처럼, 절도처럼 허락 없이 먼저 들어와서 농락해버린 영혼 앞에 예수님은 진실하신 구주요 주님이시요 왕이시며 친구입니다. '내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리시기에 유일하고 지극히 합당한 분입니다. 그 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런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이루시는 용서와 구원과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지금까지 증거된 성경의 말씀을 보고 들으시면서 오 선생님은 지정의를 통하여 인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십자가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 오 선생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고 인정하시든지, 아니면 여전히 오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로, 무시해도 좋을 그저 그렇고 그런 잡다한 정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시든지.

입학과 졸업, 취업문제, 결혼과 출산 문제, 모든 인간관계 문제, 노후 대책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달려 있는 죄와 구원의 문제는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위에 서게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결국 이 문제에서 비껴가게 만드는 영적으로 속이는 자가 여전히 무수한 인생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성경의 경고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0).

성경은 이 영적 기만자에 대하여 '큰 용,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요한 계시록 12:9) 라고 폭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해 속은 사람들이 결국 복음을 거절하게 되고 영원히 구원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심오한 철학이나 유사 종교를 통하여 그것에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속입니다. 혹은 하나님도 영원한 나라도 지옥도 없다는 사상으로 속이기도 합니다. 또는 이렇듯 저렇듯 결국 모두 구원을 받아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

복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어둠의 신, 마귀가 속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넘쳐나는 속임수와 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보이스 피싱으로 금전적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정말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속출하는지 자고나면 새로운 유형들이 우리 앞에 덫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에 의한 피해가 작은 일이 아니지만, 영혼의 문제는 말할 수 없이 더 큽니다.

만일 오 선생님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창세전부터 계획하여 오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으로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오 선생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신다면,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 또한 오 선생님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 선생님의 주님으로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그 마음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실만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실,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모든 죄인의 마음에 그 누군가가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살아감으로 마치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지만 사실은 사탄의 기만으로 속아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 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니..." (요한복음 10:8).

오 선생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 그와 같은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왕으로 계셔야할 자리에 어떤 상식이, 철학이, 명예가, 부귀가, 혹은 어떤 우상이나 욕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상은 그 배후에 미혹하는 자 마귀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사실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복음만이 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는 중에 오 선생님의 심령에 울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인식한 적이 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춰 조아릴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한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저녁. 섬의 무선국에서 한 청년이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젯밤처럼 복음전도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직장 상사에게 일찍 퇴근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마을로 돌아가려면 몇 구비의 산기슭을 돌아가야 하는데 가는 도중에는 공동묘지를 지나야 하는길도 있었습니다. 밤이 찾아온 산길에 청년은 더 늦지 않게 복음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어제 집회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천국과 지옥의 실재도 믿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구원을 받고 싶었고, 그래서 이틀째 열리는 복음 집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제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며 이제는 뛰다시피 하는 걸음이 되었습니다. 공동묘지 부근을 지나는 길에 청년은 죽음의 두려움과 지옥의 두려움이 깊어 옴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한 말씀이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요한이 쓴 복음서 3장 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청년은 그 말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의 마음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구나! 주님, 제가 믿습니다!' 청년의 마음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사와 평안과 기쁨이 은은히 그리고 가득 차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소년이었던 저는 추운 겨울밤 냉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전도자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끔 불꽃이 흔들리는 등잔불을 보고 있을 때 뒷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뒤돌아보니 찬바람을 가득품고 들어오는 이웃집 형의 환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간증인데, 그 형은 그렇게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궁벽한 섬마을에 사는 영혼들도 사랑하셔서 복음이 증거 되게 하시고 거듭나는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그는 선한 행위나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노예선에서 일했던 존 뉴턴이라는 사람. 그는 앞서 말씀드린 청년과 똑같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깨닫고 회심하여 거듭났습니다.

자유라고는 한 틈도 누릴 수도 없는 노예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던 그는 죄에 매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저 노예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헤매는 가련한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멸망이 작정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습니다. 그 후 1779년에 죤 뉴튼은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다음과 같은 찬송시로 표현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앙하리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진리의 말씀을 보고 들을 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아직 죽음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고 종교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그런 것은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은 이렇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그렇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것이 영원한 죽음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겠습니까? 희망차게 시작한 하루이지만 뜻밖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 그날 아침의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 될 줄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중대한 말씀 앞에 무관심하고 태연히 미루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4).

구원의 복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는 하루 이틀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잘 익은 곡식은 때가 지나기 전에 추수되어 곡간에 저장되기 마련입니다. 축복받은 영혼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되지 못한 쭉정이는 버려지고 마침내 불태워질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태만히 하고 거절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면 영원한 어둠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예레미야 8:20).

몇 년 전, 늦가을과 초겨울이 겹쳐가던 어느 날 밤, 혜화동 어떤 창고극장에 가스펠 싱어 S자매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곡은 '왕이 여기 계시네!'

깊고 맑은 성량으로 S자매는 마치 왕의 현현을 실감하듯 열창했습니다. '왕이 여기 계시네! 엎드려 경배하라!'

백여 남짓 모여든 사람들은 적어도 그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아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문을 나섰을 때도 그 멜로디, 그 짧은 가사가 제 심령 속에 메아리 되어 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밖에는 샛노란 은행잎들이 계절을 바꾸려 거세게 부는 바람에 의해 흩날리며 가로등 황색 불 빛 속에서 화려하고도 자유로운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제 시야엔 어둔 밤하늘 너머 파란 창공으로 이어지는, 그분을 향한 장엄한 경외심이 그 금빛 이파리들에 실려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두 엎드려 경배 드려야 할 그 분! 그분은 거듭난 자만이 모시고 섬기며 동행할 수 있는 분, 왕 중의 왕이시며, 모든 주 중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 마음에 친밀한 이웃으로 계신 오 선생님께서도 믿음으로 거듭나셔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영광의 세계를 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라고 기쁨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평안하세요.*

11월에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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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 - 6월14일

 

                                             요한복음 6장 41-51절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유대인들은 주님에 대해 수군거림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가로막았습니다. 실로 그들은 광야에서의 자기 선조들과 똑같이 행했습니다(고전 10:10). 그들은 주님을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여겼습니다. 또 주님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기에는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42절). 주님은 "나는...이니" 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요셉의 아들" 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수군대는 그들을 짦게 꾸짖으셨지만 그들의 이의제기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보다는 하시던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소망 없고 무력한 인간의 상태를 강조하셨습니다(44절). 아버지께서 "무궁한 사랑으로" (렘 31:3) 이끄시지 않는다면 인간은 절대로 자신의 필요를 깨닫고서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뒤이어 주님은 그분을 믿어야 할 인간의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45-51절). 따라서 기꺼이 나아오는 자들만 아버지의 이끄시는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37절). 이 하나님의 이끄심이야말로 구원 사역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구원사역을 완성합니다.

   이제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십니다(사 54:13). 즉 성경에 의지하여 자신의 가르침을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이끄십니다 즉 법적인 요구, 상상력, 감정이 아니라 은혜로운 가르침으로써, 특히 주님 자신에 관한 가르침으로써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아들께 나아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요 6:44,45 참고).

   여기서도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 를 사용하십니다. 이는 전에 하신 말씀을 반복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주님은 화제를 전환하여 자신의 육체에 대해 말씀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신 탓에 청중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고집스런 편견과 불신앙을 지닌다면 깨닫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은 구원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간결한 진술들 중 하나를 제시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47절. 요 3:36 참고). 여기서 주님은 또 다시 만나를 언급하시는데 그 만나는 육체의 생명을 무한히 유지시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이 표현의 반복은 주님의 공급 뿐 아니라 그분의 위격을 강조해줍니다. 그분은 잠시 동안 부양해주다가 썩어져버릴 생명 없는 만나와는 현저히 다른 분이셨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이제 주님의 가르침은 절정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 없는 청중은 주님이 앞에서 말씀하신 모든 내용보다 다음의 진술을 더 어려워했습니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그러나 신자들인 우리는 우리가 생명의 떡이신 그분을 먹을 때 우리의 영적인 필요가 얼마나 완벽하게 채워지는지를 경험했고 목도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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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 양육]


                                                그리스도인 생활

                          이정표들 - 질문편(5)


                                                                                                                        - 데이비드. 뉴웰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요?


   오늘날 하나님의 세 위격 중에서 가장 오해를 받고 잘못 말해지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령님은 또한 가장 많이 말해지는 분인 듯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의문스런 가르침들 및 실행들과 그럴듯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것은 성령님의 특성인 거룩함을 거의 나타내지 않습니다.

   다음 장에 가서 우리는 현대 은사주의 운동의 성격에 대해 성경적인 결론을 내려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경적인 기초를 견고히 쌓아야만 합니다. 즉 성령님의 현재의 전반적인 사역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기초는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친히 제공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네 가지의 주된 원리들을 발견합니다.


   1. 영광스럽게 함의 원리.

   구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6:14).

   이를 유념하십시오. 성령님의 사역이 지닌 위대한 목표는 성령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구주가 주목받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 29-32절에서도 우리는 그분이 동일한 일을 행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의 높아지심에 대한 증인으로 성령님을 이야기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이 진행되어 갈수록 성령님이 점점 더 작아져 가시는 모습을 확실히 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실패하셨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는 일에서 그분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 28:31).

   이뿐 아니라, '영광스럽게 함'의 원리는 우리가 듣는 모든 가르침의 시금석을 제공합니다. 즉 주 예수님을 높이지 않는 어떤 교리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성령님 자신에게 사로잡힌 현대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은사를 주시는 분보다 은사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말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늘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도록 아버지와 함께 기쁨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6-17).


   2. 조화의 원리.

   주 예수님은 성령님을 세 차례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분의 증거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성령님이 진리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분이 영감을 주신 성경도 그 전체가 진리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하나님의 영은 성경의 영감에 직접 관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오늘날 그분의 역사는 성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만 합니다. 이는 성령님은 모순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에게 주신 또 다른 귀중한 시금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적인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옛 성품 및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렘 17:9)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감정 및 경험과 전혀 다른 완전한 기준을 또한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시고, 오류가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예컨대,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로 하여금 불신자와 데이트하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또는 성령님은 절대로 자매들로 하여금 교회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기도하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 14:34).

   이러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건대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지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는 만큼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경건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이들은 성경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만 함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3. 교육의 원리.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여기서 주님은 단지 신약성경을 미리 인증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들을 가르치실 분으로서 성령님이 어떻게 활동하실지 기대하게 해줍니다.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진리들을 알 수 있습니다(고전 2:11-14).

   영감은 성경 저술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감독을 말해줍니다. 한편, 조명은 성경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사역을 말해줍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구주의 말씀에서 발견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제자들의 교사요 인도자요 상담자였던 분이 꼭 그들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과 완전히 같으신 그분은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이렇게 하여 그분은 그들의 영적인 교육을 완료하실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에 이 위로자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마음속에 영원히 거해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거듭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또한 우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또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또한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

   반드시 유념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이 성령님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

   또한 그분은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를 닮은 열매들을 맺히게 해주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2-24).

   성령님의 나타남은 온갖 기적들의 발생보다 더 강력하며 더 귀중합니다.


   4. 적용의 원리.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요 16:15).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은 이삭의 신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성령님의 사역들 중 한 가지를 즐겁게 그려줍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에게 남편 될 사람의 부유함과 영광에 관한 증표를 주었습니다.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엡 1:14).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는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놀라운 인격과 사역에 사로잡힙니다. 왜일까요? 또한 모든 신자들은 구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은 우리를 전율케 하는 하나님의 진리들이 무한히 담긴 보물창고입니다. 왜일까요? 이 모든 것은 성령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행하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러한 여러 가지 사역을 행하시는 위대한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늘 주님으로 인해 만족케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님에 관한 이런 가르침을 마음속에 잘 간직한다면 우리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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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 - 6월 13일

 

                                             요한복음 6장 32-40절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이어지는 질문에 대해 주님은 다시 "진실로 진실로" 라는 강조어를 사용하여 부정대조의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만나를 준 이는 모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만나를 공급하신 "내 아버지" 의 심부름꾼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주님께선 그분이 지니신 본질적인 신성을 알리신 또 하나의 대목입니다(32,40절). 지금 주님은 그들의 질문보다는 그들의 생각들에 대해 답변을 주고 계십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영적인 떡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몸을 유지시키는 실제적인 양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생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니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주님은 참되고 진정한 떡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리신 떡으로서 영혼을 위해 공급됩니다. 주님은 그 분의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또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런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주시나니."

   하루만 만족을 주었던 만나와 달리 하늘에서 내려온 이 참된 떡은 지속적인 만족을 줍니다. 더욱이. 만나는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었던  반면에 이 참된 떡은 온 세상에 생명을 주었습니다. 만나는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죽는 것을 막아주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이 참 떡은 모든 신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아마도 이것은 매우 진실된 요청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능력을 믿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열심은 합당한 이해 혹은 믿음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측면에서 생각했고 이는 사마리아 여인(요 4장)과 흡사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관해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분께 나아오는 이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굶주림을 영원히 채워주기에 충분한 것을 얻습니다. 또한 그분을 믿는 자들은 자신들의 목마름을 영원히 해소할 것을 얻습니다. 41,48,51절에서도 발견되는 "내가 곧" 이라는 강조어는 주님의 절대적인 신성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사람에 불과한 분이 아니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자신의 모든 단언들을 실현시킬 수 있으셨습니다. 진정한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주님의 대답에 강한 부정어들이 들어 있음을 봅니다. 즉 "결코"라는 단어가 크게 강조해주는 것을 봅니다.

   이제 주님은 경고를 전하십니다. "너희는 나(생명의 떡)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그럼에도 주님은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또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오직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만! 지금 그분께 오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실로 어리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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