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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6.16 [지상강단] 요한복음의 일곱 기적(7)
  2. 2020.06.16 주님과 함께 - 6월 16일
  3. 2020.06.15 [교훈의 샘] 화 음 Harmony
  4. 2020.06.15 주님과 함께 - 6월 15일

[지상강단]

                                             요한복음의

                               일곱 기적(7)

 

                                                                                                                        -피터 위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8:59).

 

주님은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친히 "내니 두려워 말라." 라고 하실 때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니" (I am)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임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실 때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우 분노하였고 돌을 던져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주님은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숨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은 어떻게 갑자기 숨었을까요? 요한이 기록한 이 단어는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숨어서 찾을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기둥 뒤에 숨으셨다면 사람들은 뒤로 돌아가서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피해서 도 다른 기둥 뒤에 숨어도 결국은 찾아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숨었을까요? 주님께서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전혀 해를 입지 않고 성전에서 나가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숨으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숨어 성전에서 나가실 때, 많은 무리들을 통과하여 가셨습니다. 주는 하나님이시기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잡거나 체포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 번 유대인들은 주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계획과 목적대로 행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정확한 때에 십자가로 가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주님은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도 또한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 모두를 주님의 집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매우 복된 때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1-7).

 

여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의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아픈 사람들을 보면 아마 그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그 부모가 무엇을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다. 그 부모나 이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람에게도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이 사람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 세상에 빛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었고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물질적인 빛을 공급하시며 또한 영적인 빛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물질적인 빛을 이 사람에게 주시고자 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그와 같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땅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겨 그 소경으로 난 자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기적을 행하실 때 이와 같은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많은 소경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소경들에게 단지 말씀만 하셨고 그들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도 다른 경우에 눈을 만져주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7-29).

 

그런데 이 경우에는 침을 뱉어 진흙을 만지시고 그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 남자는 고쳐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분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선 그는 소경으로 났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소경으로 나서 소경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확한 때에 소경은 그자리에 있었고 주님은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그 소경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소경이 가서 씻고 보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주님은 왜 이러한 일을 하셨을까요?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특별하게 이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소경이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소경처럼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라면서 소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을 선천적 소경이라고 하며 뒤를 후천적 소경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의사라면, "그의 눈은 있었지만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시신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한 설명일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에게 눈동자 자체가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기적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드시고 이 진흙을 그의 눈에 넣어 눈동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저는 이것이 맞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직전에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두 눈동자를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 남자에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아주 중요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눈동자가 없는 소경에게 새로운 눈동자를 창조하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던 이웃 사람들은 그의 눈이 떠진 것을 보고 매우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는데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는 이웃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요 9:11).

 

그는 간단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쳐 준 사람의 이름이 예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있던 자리에서 떠나 다른 데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행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38년 동안 중풍에 걸린 병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예수라는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다시 화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일 수 없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소경을 심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소경의 부모를 심문하였습니다. 출회를 두려워한 그 부모는 아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요 9:17).

그러자 그 소경 되었던 자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가? 당신들도 그를 믿고자 하는가?" "창세 이후로 소경 되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라고 그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를 출교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잡을 수도, 돌을 들어 칠 수도, 어떠한 일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적하여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들 사이를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5-38).

 

주님은 그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영어 성경에는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말해주셨습니다.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주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며 요한은 조심스럽게 이 기적을 선택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단지 일곱 개의 기적만을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물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모든 자연을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포도주는 포도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주 특별한, 하늘의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식물, 채소, 과일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기적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은 이미 죽기 직전의 상태였으며 세균들이 그 몸에 들어가 아주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요한은 병중에서 아주 심각한 병을 선택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병들은 세균과 여러 가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의해서 생기는데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십니다.

주님은 아주 약한 상태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문둥병자를 고친 것, 혈루병을 고치신 것 등 여러 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척수가 다친 병, 심장, 폐, 모든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뼈, 관절, 신경들이 약해져 있는 중병에 걸린 자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세포들, 신경들, 여러 조직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여러 가지 식물들과 물고기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이 기적을 행하시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통해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원소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폭풍우와 천둥,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물과 파도를 다스리는 권세를 보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이 기록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주님이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창조주의 능력으로 고쳐주심을 보았습니다. 이 외의 어떤 다른 기적들이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더 강력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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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 - 6월 16일

 

                                       요한복음 6장 60-71절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가버나움 회당에 모인 군중 속에는 주님을 시인하는 상당수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생각했기에 그분을 계속 따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헌신의 문제가 아니라 변절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 역시 동일한 도전에 직면합니다. 오늘의 구절들은 주님께서 완전한 지식을 갖고 계심을 말해줍니다(61,64,65,70). 심지어 그분은 부활을 포함하는 자신의 승천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습니다(62절). 그 승천은 주님의 모든 가르침을 온전히 입증하고 확증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불신은 주님이 전달하시는 진리를 조금도 무효화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사명을 완수하신 후 하늘로 돌아가실 터였습니다.

   이제 주님은 열두 제자를 향하시고는 다음의 날카로운 질문으로 도전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너희도! 그러자 베드로는 자신이 다음과 같은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음을 급히 보여주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이 영이요 생명이라."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그가 영적으로 높은 곳에 올랐음을 보여줍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68절). 베드로는 주님의 본질적인 신성 뿐 아니라 오직 그분의 말씀이 생명을 줄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주님" 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뉘게로 가오리이까?" 주님 외에 도대체 누구에게로 갈 수 있을까요? 베드로의 이 놀라운 고백은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마 16:16 참고). "우리는 주께서 그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확신하나이다"(흠정역). 그들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그분이 이렇게 고백하기에 합당한 분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 주님과 필적할 수 있는 자는 전혀 없습니다!

   이 뛰어난 고백에서 베드로는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모든 제자들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을 바로잡으셨습니다. 이는 열두 제자 모두가 참된 신자들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70절. 요13:2,27: 17:12 참고). 열두 제자에 포함되었지만 유다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64,68,70,71절). 유다는 "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베드로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때때로 넘어지긴 했어도 참된 신자였습니다(요 18:17-27). 그는 영생을 가지신 주님을 떠나 완전히 "갈"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나머지 제자들과 달리 떠나간 무리와 동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가지 않고 머물렀습니다. 신앙고백과 영생을 소유함은 매우 다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 3:36). 유다는 발이 씻겨졌습니다(요 13장). 그러나 이보다 먼저 그의 마음이 깨끗해지고 주님께 확정되어야 했습니다(시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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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의 샘]


                                                   화 음

                                Harmony


                                                                                                                 - 정 선


화음은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노래를 부를 때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합창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 많은 사람들이 화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화음이 잘 이루어지는 합창은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은 합창은 듣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화음에는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화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모든 것이 똑같아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화음을 이룰 때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00명이 똑같은 목소리로 합창을 하는 것과, 다양한 파트로

화음을 이루어 노래를 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화음'의 아름다움은 음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 특히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도 해당됩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많든 적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어울려서 하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협화음'보다는 '불협화음'이 더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파트를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자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작게 내거나 하면 화음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화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체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튀어도 안 되고 가라앉아도 안 됩니다.

즉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되 다른 사람도 의식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똑같지 않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제각기 달랐듯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서로 달랐듯이 기질, 배경, 성격 등이 모두 다릅니다.

그들이 만약 자기 기질대로만 행동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심한 불협화음이 나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모습들이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화음을 맞추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주님께 초점을 맞출 때 그것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풍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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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 - 6월 15일

 

                                                 요한복음 6장 52-59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느니라.

 

 

   주님은 또 다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말씀을 하십니다. 앞에서 그분은 출생, 떡, 생명, 죽음, 불, 물 등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살과 피를 언급하십니다. 그러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이에 주님은 다시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진술인지요! 또한 뒤이어지는 부연설명은 분명 그들에게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 17:10-12).는 말씀을 떠올리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술이 셀제적인 몸과 피를, 실제적인 먹기와 마시기를 가리킨다고 받아들인 자들은 큰 장애물을 가졌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그들과 우리에게 깊이 새겨주시려 한 뜻은 무엇인가요? 그분의 죽으심의 가치를 믿음으로 온전히 취하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분을 믿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계셨습니다. 즉 그분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받아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3절).

 이 엄숙한 경고 다음에는 확신을 갖게 하는 일련의 은혜로운 설명이 나옵니다.

   (1) 상징적으로 주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심은 그분의 죽으심이 갖는 구원의 능력을 다 취하는 것이며 영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54절). 여기서 "먹고"라는 강한 단어는 의심 많은 청중을 향한 그분의 촉구의 강도를 높여줍니다.

   (2) 주님은 신자들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54절). 여기서 주님은 그분의 능력 있는 행위 곧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다시 강조하십니다.

   (3) 주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고 그분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55절). 이 세상의 양식과 음료와 달리 주님의 죽으심이 갖는 가치는 실로 무한합니다.

   (4) 주님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자는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56절). 이것은 상호 간의 거함입니다. 또 이것은 가장 깊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영원한 하나됨입니다. 신자는 주님 안에 자신의 생명이 있음을 발견하며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신자에게 주십니다.

   (5) "살아계신 아버지" 라는 칭호는 주님이 스스로 존재하심을 말해줍니다. 그분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분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이 아들은 아버지를 인하여 삽니다(요 5:26). 그리고 이 아들이 신자들에게 생명을 전해주는 까닭에 신자들은 그분을 인하여 삽니다(57절).

   이제 주님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요약하십니다.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5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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