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때 제 이야기 좀 하지 마세요, 특히 부정적인 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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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2 21:30   
목회자 사모들의 11가지 고충
▲톰 S. 레이너 박사.

톰 레이너(Thom S. Rainer) 박사는 11일(현지시각) “목회자가 알아야 할, 사모의 고충 11가지”(11 Things Pastors Need to Know Their Spouses Are Thinking)라는 제목의 크리스천포스트 기고를 게재했다. 그는 미국 최대 교단인 남침례회의 전문조사기관 라이프웨이 크리스천 리소스(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회장 겸 CEO이자 빌리그래함선교대학원 학장이다.

그는 “사역하는 동안  목회자(담임목사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 사역자들)의 사모들과 교제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면서 “그 과정에서 희망과 함께 아픔도 느꼈는데, 사모들이 털어놓은 고충들 가운데 가장 많았던 11가지는 아래와 같다”면서 이야기를 풀었다.

1. “너무 외로워요”: 레이너 박사는 “이 말은 사모들에게서 압도적일 정도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라면서 11가지 고충 속에 계속 포함된다고 밝혔다.

2. “당신이 비판받아서 나도 상처받았어요”: 그는 “목회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아주 자주 비판을 받는다. 이때 목회자 뿐 아니라 사모 역시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3. “저와도 시간을 좀 가져 주세요”: 레이너 박사는 “대부분의 목회자 사모들은 남편이 교회 성도들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위기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4. “설교 때 제 이야기 좀 하지 마세요, 특히 부정적인 예로”: 레이너 박사는 “사모에 대해 설교에서 농담으로 언급하더라도 사모가 상처를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5. “나를 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그는 “많은 사모들이 남편이 자신을 향해 품는 ‘언행에 대한 기대’ 때문에 불편해한다”면서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6. “아이들과 시간 좀 보내 주세요”: 레이너 박사는 “목회자 사모는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이들까지 남편에게 있어서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7. “재정 때문에 힘들어요”: 그는 “목회자 사모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 중에 하나”라면서 “많은 목회자들이 저임금으로 사역하는데, 그로 인해 목회자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이 상처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8. “사람들이 저를 비판할 때, 제 편이 좀 되어 주세요”: 레이너 박사는 “목회자 사모들이 비판을 받을 때도 힘들어하지만, 특히 남편이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때 더 깊은 상처를 받는다”면서 “그것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나에게도 상처가 되던데,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겠느냐?”고 했다.

9. “집에 있을 때는 가정에만 좀 신경을 써 주세요”: 레이너 박사는 “사모들은 정말 급한 일이 생겨 남편이 교회에 가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일부 목회자들은 집에서조차 가정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있어서 사모들이 괴로워한다”고 했다.

10. “너무 이사를 자주 해요”: 레이너 박사는 “목회자들은 이동이 잦다”면서 “가족들의 희생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11. “교회에 친구가 없어요”: 레이너 박사는 “이것은 목회자 사모가 외로움을 느끼는 여러 이유 중의 하나”라고 지적했다.

레이너 박사는 “독자들에게서 자신의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는다”면서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목회자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목회자 가족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많은 희생을 하지만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어떤 상처도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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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화산 폭발로 죽은, 벨릭스의 아내

 

 
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폼페이를 방문하면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20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놀라운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세탁소와 극장, 약국이나 경기장도 있었다. 집집마다 수도관을 연결했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전문가에 의하면 선거 벽보도 발굴되었는데, “나를 찍어 주면 시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하겠다”는 구호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게 된다.

이곳은 BC 8-7세기경에 그리스 사람들이 지배했던 도시다. 그 후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게 정복되어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나폴리를 지배했고, 거기서 가까운 이곳 역시 그리스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실 나폴리라는 말은 헬라어 네오폴리시(신도시)라는 의미다. 그들의 후예라서 그런지, 나폴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과 키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다.

폼페이에서 멀지 않은 살레르노의 파에스툼(Paestum)도 그리스 사람들이 BC 5세기에 세운 도시다. 거기에 있는 두 신전은 얼마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는지, 아테네에 있는 신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다. 이런 여러 면을 볼 때, 항해술이 뛰어났던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고, 도착하는 항구들마다 신도시를 건설한 것 같다. 그리스에는 섬이 약 5천 개나 존재하기에,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을 내야 했고, 그것은 항해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었다.

▲폼페이 유적지. ⓒ한평우 목사

그런데 폼페이를 공중에서 보면 생선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경기장은 그 머리 부분에 있기에 마치 생선의 눈처럼 구성되었다. 그런데 꼬리 부분에는 치미테로(Cimitero, 공동묘지)가 있다. 이런 건설은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웬일인지 폼페이 멸망 전에 살다가 죽은 이들의 무덤들에 대한 관심이 간다. 역사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무리들 중에는 대단했던 인물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도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동질감도 작용할 것이고……

폼페이는 화산재로 묻혀 잊힌 도시였다가, 1549년에 운하 공사를 하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나폴리를 지배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갔고, 그 후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56년경에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 유물들을 통해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가 화산재로 멸망한 것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투스 장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유대인 여자를 불같이 사랑했지만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원로원의 허락을 얻을 수 없자, 홀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는 야망이 세조 만큼이나 많았던 인물이었기에, 아버지가 형에게만 세자 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 평소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했는데, 형이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황제가 되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두면 반란도 불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폼페이에 존재하기에 그 부분을 써 보려고 서론을 길게 나열했다.

사도행전 24장 24절 이하에 보면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나오는데, 그의 아내는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였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들었으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고 미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행 24:25).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굉장한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드루실라는 AD 39-44년 유대를 통치했던 아그립바 1세의 셋째 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막내 누이로, 버니게(행 25:13)와 자매였다. 그녀는 콤바게네(Commagene)의 왕자 에피파네스(Epiphanes)와 약혼하였으나, 그가 할례를 거절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파혼했다.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그가 할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 후 그녀의 미모에 미혹된 총독 벨릭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벨릭스에게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옥스퍼드성경원어대전에서 인용함).

당시 폼페이는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로마인들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환락이 함께한다. 남편이 유대 총독 출신이었고 평소 탐욕이 대단했던 자였기에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고, 그 결과 이런 별장 지대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이곳 폼페이에 거주했다. 요즘으로 본다면 폼페이는 우리의 제주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수려한 환경과 시원하고 맑은 공기는 휴양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폼페이에 살던 중, 아들과 함께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재앙을 만났다. 당시 폼페이에는 약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날은 폼페이 사람들이 불의 신 ‘불칸’(Vulcan)을 섬기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폼페이는 불을 섬기는 축제 중에 불로 망하고 말았다.

보통 이탈리아의 8월은 더위가 최고로 치닫는 때니, 이때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은 뜨거운 화산재, 또는 유독가스가 무더운 기온을 더욱 상승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폼페이 뒤에는 두 개의 산, 즉 베수비오(Vesuvio, 1,277m)와 솜마(Somma, 1,132m) 산이 쌍둥이처럼 있는데, 불을 뿜은 것은 솜마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많은 화산재가 그곳에서 12km나 떨어진 폼페이까지 날아와 이 도시를 수 미터나 덮어 버렸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화산으로 인해 2천여 명이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 폼페이가 화산재와 가스로 멸망하는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 마즈노 곶(사도 바울이 하선했던 보디올 근처)에 있었던 대 플리니우스(Plinius)였다. 그는 검은 연기와 함께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유독가스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함께 있었던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18세의 나이로 그 처절한 광경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국인 리튼 발워가 ‘폼페이 최후의 날’을 썼다.

폼페이는 아주 방탕했던 도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당시 이곳에 술집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는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매춘소였다. 매춘소를 방문하면 손님들이 다양하게 선택하도록 매춘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 봐도 얼굴이 붉어진다. 죄의 양태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추구하는 길은 방탕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검은 구름과 가스 속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과 함께 삶을 마무리해야 했던,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이런 처참한 소리들을 듣고 삶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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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석 칼럼] 유럽의 이슬람화, 남의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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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6.12 19:49   
▲유해석 선교사.

최근 몇 년 동안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유라비아’(Eurabia)라는 단어는 유럽에 사는 아랍 사람들의 연합과 결속을 위하여 1970년대에 만들어진 잡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유럽이 이슬람화되어간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은 서쪽에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오늘에 이르러 그 예언이 실현되는 것처럼, 이슬람은 유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그 근거로 유럽의 무슬림은 1970년 720만 명에서 1990년대에는 1,300만 명으로, 2000년에는 3,700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다. 2007년을 기준으로 전체 유럽(동유럽 포함)에 이슬람 인구는 약 5,300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이슬람 인구가 증가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아랍 및 이슬람 국가에서의 이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수천만 명의 유럽인이 죽음으로써,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노동력 부족을 낳게 되었다. 따라서 무슬림의 증가는 전쟁 후 재건을 위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프랑스에는 자국 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던 알제리·모로코·튀니지에서, 독일에는 동맹국이었던 터키에서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영국에는 제국주의 아래에 있던 자메이카·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에서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대규모 이민은 유럽의 도시들을 제3세계 시장과 같이 변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이민 초기에는 사회 최하층 근로자들이었으나, 시간이 흘러 유럽 사회에 적응함에 따라 이들의 문화와 종교가 자연스럽게 유럽 문화 속에 스며들게 된 것이다. 오늘날 유럽 이슬람의 역사와 성장도 이민으로 시작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50여만 명의 무슬림이 유럽으로 건너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터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할 경우 약 7천만 명에 달하는 터키 인구가 유럽 내에 더 급속히 퍼져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무슬림 청소년들. ⓒFIM국제선교회 제공

둘째, 유럽인의 저출산과 무슬림 여성들의 다산

저출산으로 인한 유럽의 인구 감소 문제는 심각하다. 인구통계학은 사회학처럼 정확한 학문이다. 한 사회가 현재와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게 위해서는 유아사망률을 감안하여 한 여성이 평균 2.1명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그리고 한 여성이 평균 1.6명을 낳으면 인구 감소가 느려지거나 또 그 사이에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이를 안전지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만일 그 이하로 아이를 낳으면 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 사회가 “한 명의 여성이 평균 1.8명을 출산”하는 추세를 유지한다면 한 세기가 끝날 무렵에 인구는 80%만 남게 될 것이다. 평균 1.3명의 총 출산율을 유지하는 유럽의 국가들(이탈리아·스페인·독일, 그리고 발트해 국가들)은 한 세기 후에는 현재의 4분의 1의 인구만 유지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무슬림은 산아제한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습이 이슬람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슬람권에 있는 무슬림 여성들이 평균 6명의 아이를 낳는 데 비해, 유럽의 무슬림 여성들은 평균 3.5명을 낳는다. 유럽 중 출산율이 제일 높은 프랑스가 1.9명이고, 낮게는 영국이 1.4명에 이르고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에서의 이슬람 인구 비율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슬람 사원이 된 영국 교회. ⓒFIM 국제선교회

셋째, 고령화사회

20세기 노인 인구는 유럽 경제의 공통적인 문제이다. 2010년 기준 유럽 전체 인구 중 60세 이상은 22%이며, 평균 연령은 40세로 이미 초고령화되어 있다. 이처럼 유럽은 저출산 문제로 인하여 젊은이들은 줄어드는데 노인들은 늘어난다. 그러나 유럽 내 무슬림의 경우, 60세 이상은 유럽 전체 인구의 11%이며, 평균 연령은 32세에 불과하다. 전체 유럽 내 무슬림 중 30세 미만이 차지하는 비율은 63%이다. 특히 2001년 16세 이하의 영국 내 무슬림 청소년의 비율이 무슬림 전체 인구의 34%에 달하고 있지만, 기독교인 청소년은 19%에 불과하다. 현재 프랑스와 독일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25%가 무슬림의 자녀들이다. 이처럼 유럽 내 무슬림은 안정적인 피라미드형 연령 구조를 보이며, 멀지 않은 미래에 유럽 내 이슬람의 종교 비율의 판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넷째, 결혼에 의한 무슬림 인구의 증가

이슬람에서는 결혼을 예식이 아닌, 남녀 간의 성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계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슬람에서는 결혼이라는 울타리에서 이루지는 남녀 간의 성관계를 신성시한다. 이는 인류의 출현도 성관계를 통해서이며 인류의 번성도 성관계를 통해서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꾸란은 무슬림 여인에게 독신을 허락하지 않는다. “너희들 가운데 독신자는 결혼할지어다” (꾸란 24:32) 따라서 무슬림은 결혼을 통해 자연적인 성장을 일으킨다.

꾸란에 따르면 무슬림 남성은 무슬림 여성 또는 ‘성서의 백성’인 기독교·유대교 여성과도 결혼할 수 있지만, 무슬림 여성은 무조건 무슬림 남성과만 결혼해야 한다. 따라서 유럽에 있는 무슬림 남자들은 유럽의 기독교인과 자유로운 결혼을 통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고, 그 자녀는 무슬림이 된다. 반대로 무슬림 여성은 무슬림 남성과만 결혼해야 하기에 유럽 내 이슬람 인구는 증가하는 것이다.

다섯째, 무슬림들의 이슬람에 대한 열성과 그들의 실천적인 신앙

무슬림들은 이슬람의 종교적 규율이 현대 상황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따지지 않고, 그 계율들을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신앙 자세가 유럽인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가고 있다.

무슬림들은 비무슬림 국가에 사는 이유를 다와(Dawa) 즉, 비무슬림들을 이슬람으로 인도하는 ‘선교’라고 생각하였다. 1990년 영국 무슬림의회(Muslim Parliament) 설립자인 칼림(Kalim Siddiqi)은 “유럽은 도덕적으로 파산했으며, 모든 적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와 이슬람 국가의 창조를 위하여 소수 무슬림을 끌고 이슬람의 정치적인 힘을 보여준 예언자 무함마드의 열정을 가지라”고 그의 지지자들을 선동하였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무슬림뉴스”에 의하면 한 유럽인 무슬림이 그의 단체의 목적을 간결하게 정리하였다.

“우리가 반드시 추구하는 것은 영국을 ‘믿지 않는 자의 땅’(Dar Al-Kufr)에서 ‘이슬람의 땅’(Dar Al-Islam)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우리의 목적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이곳에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알라께서 승리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들이 유럽에 가면 선진화된 유럽을 경험하면서 그들과 같이 되기 위하여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럽에 온 무슬림들은 유럽 문화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의 종교가 무엇인지를 찾게 되고, 더욱더 이슬람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유럽인들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여섯째, 유럽인들의 탈교회화와 새로운 신앙의 추구

독일의 경우는 세금제도 가운데 ‘종교세’가 있어서, 기독교인들은 월급에서 자동적으로 일정 금액을 공제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제도에 대한 젊은이들의 불만이,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도록 만들었다. 현재 유럽의 교회에선 점차 젊은이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져 가고 있다.

영국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5,000여 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다. 지금도 매주 평균 4개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 영국 전역에 개신교회에 출석하는 인구를 200만 명으로 보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가톨릭과 성공회를 모두 포함한 통계도 전체 인구의 7.5%인 430만 명에 불과하다. 1980년에서 2005년 사이에는 140만 명이 교회 출석을 중단하였다. 이렇게 교인 30%가 감소했다는 것은, 매주 1,100명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25년간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영국성공회에서는 이슬람의 모스크에 출석하는 인원이 영국성공회에 출석하는 인원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영국성공회의 케리 주교는 2001년 9월 7일 “영국은 이제 선교지가 되었다”고 했다. 영국정부와 학술단체의 통계에 의하면 최소한 1주일에 한 번 이상 모스크에 출석하는 무슬림의 수가 93만 명이나, 영국성공회 예배에 출석하는 수는 91만 6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기독교 연구의 실무자인 피터 브리얼리(Peter Brierley) 박사에 의하면,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수가 2030년에는 419,000명, 2040년에는 217,200명, 그리고 2050년에는 87,800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전망된다.

영국인들이 교회를 떠나면서 이슬람이 가장 많이 성장하고 있다. 영국 퓨센터(The Pew Centre)의 조사에 의하면, 2010년 말 영국의 무슬림은 2,869,000명이었다. 이 가운데 많은 남아시아(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인들이 영국에 살고 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은 전체 무슬림의 43%인 파키스탄인들이며, 두 번째로 17%인 방글라데시인들이다. 참고로 이 두 나라는 한국이 인력을 수입하는 국가에도 포함되어 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의 70%는 아시아에 살고 있다. 현재 한국의 인력수입국 가운데 남아시아 국가들이 대부분이다.

살펴본 것과 같이 유럽 내 이슬람의 성장은 노동인력 부족과 저출산·고령화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또한 1990년 이후부터 노동인력 부족과 저출산, 그리고 고령화로 인하여 이슬람 인구가 성장하는 과정이 발생했다. 한국도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지난 2015년 4월 30일 법무부 출입국 외국인 통계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현재 체류 중인 외국인이 181만 3,037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2.6% 증가했을 만큼, 외국인 인구 유입이 빨라지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교회도 유럽교회처럼 내리막길을 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오늘의 유럽은 내일의 한국의 모습이 될 것이다.

유해석 선교사
FIM국제선교회 대표
‘우리 곁에 다가온 이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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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선교 보고] 숨길 수 없는 믿음

 

 
입력 : 2015.06.11 16:50   
이제 북한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선교가 이뤄지는 시대로
▲김창범 목사(시인, 북한구원운동 사무처장).

북한에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김일성에 의해 기독교가 말살된 후, 공개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대표적 종교가 기독교다. 북한은 1945년 이래 의도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제한하고 탄압하다, 1954년부터 본격적인 말살정책을 펼쳤다. 1969년까지 ‘중앙당 집중지도’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의 성분을 분석하여, 기독교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람과 그 가족은 여지없이 숙청했다. 그래서 기독교의 흔적은 아예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와서 북한은 남한의 성장 동력이 되어온 한국교회 현상을 주목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계략을 부렸다. 겉으로 기독교를 인정하는 모양을 취함으로써, 이를 역이용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과 같은 사이비 기독교 단체와, 봉수교회나 칠골교회 같은 가짜 교회를 만들었다. 한국교회의 헌금과 후원금을 갈취하기 위해 가짜 예배를 집행하면서, 남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해외 기독교인들을 끌어들였다.

정치적 위선이 가득한 북한 기독교는 신앙적으로 가짜이지만, 북한에는 진짜 기독교도 숨 쉬고 있다. 씨를 말린 종교탄압의 밑바닥에서도 숨이 끊기지 않고 살아있는 기독교에 대해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른바 지하교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북한 기독교는, 형태나 이름이야 어떠하든지 분명히 살아있다. 김일성 우상의 허위성이 드러나면서, 북한은 악의 세계를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반대로 진실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 심령 가운데서 체험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이 북한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중국 한 지역에서 북한 사람을 만났던 손과마음선교회 선교사의 증언이다. 그 북한 사람은 평양에서 온 건설근로자라고 했다. 외화벌이 일꾼으로 파송된 것이다. 선교사가 시장에서 북한 근로자를 만난 것 자체가 위법이고 위험한 일이지만, 그 근로자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밝혔을 때 이 선교사는 기절할 만큼 놀랐다고 한다.

기독교인?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식사 대접을 하며 찬찬히 물었다. 그는 이미 8년 전 외화벌이 일꾼으로 해외에 나온 적이 있었고, 그 무렵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영접했다고 한다.

복무 기간이 끝나 북한에 돌아간 그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얼마 후 아내도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영접했다고 한다. 그 후 부부는 은밀히 기도생활을 했고, 다시 해외로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끝에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가장 큰 소원은 북한이 무너져 복음의 나라로 바뀌는 것과, 자신이 북한에서 설교의 1인자로 헌신하는 것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는 우리 선교회 간사가 북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이곳에 전화를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 아주머니의 사연인즉 10년 전 중국에 나갔다가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전해 들었는데, 그 후 성령을 체험하고 탈북할 생각을 고쳐먹은 뒤 북한에서 복음을 전해왔다고 했다. 그 결과 18명의 믿음의 가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사역자로서 중요한 일인데, 사정이 너무나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구호금 얼마를 황급히 준비해 보낸 적이 있다.

이러한 일들이야말로 북한 내부에서 시작된 믿음의 증거들이 낭중지추(囊中之錐)처럼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제 북한 체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동안 숨어서 믿었던 지하의 성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더 숨길 것이 없다는 믿음의 담대함을 보여준 것이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시 19:3-4)” 라는 말씀 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식이 북한 땅에 차고 넘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 때는 알 수 없다. 비록 작지만 평양에서, 신의주에서, 청진에서, 혜산에서, 함흥에서 복음의 증거들이 마구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탈북의 시대는 지났다. 오히려 복음을 든 북한 형제들이 북으로, 북으로 들어가는 시대가 되었다. 북한 지하에 숨어 있던 형제들의 무르익은 믿음이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철이 다가오고 있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6)”라는 말씀이, 바로 지금 북한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제 북한 선교는 북한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통일의 때가 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김창범 목사(손과마음선교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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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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