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칭찬해야 하는 이유,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의 힘 5가지

등록 2015.05.21 03:06 | 수정 2015.05.21 03:06 | 추천 2

누구나 한 번쯤은 남에게 칭찬받고 기뻐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진심 어린 칭찬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기가 되며, 칭찬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는 사람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습관이 배어 있어 칭찬에 인색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하고 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허점이나 잘못된 점이 발견됐을 때는 지적하고 질책하는 경향이 크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비난과 불만의 에너지를 더욱 생산적으로 전환하는 힘 ‘칭찬’, 그 말 한마디의 효과와 기술을 알아본다.

◆ 말 한마디의 기적, 칭찬의 힘 5가지

말 한마디의 기적 칭찬의 힘

칭찬의 힘 1. 자신감을 갖게 한다.

칭찬은 상대방에게 자신감을 갖게 한다. 스스로 불확실하거나 미숙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칭찬을 받으면 마음의 여유가 생겨 대인관계나 일에서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또한, 도전의식과 문제 해결 능력이 높아지고, 상처받은 마음들이 치유된다.

칭찬의 힘 2. 관계 형성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칭찬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된다. 적절한 방법의 칭찬은 상대방을 이해하며 알아주는 의미가 되어서 서로의 관계를 좋게 만드는 놀라운 효과를 나타낸다. 칭찬은 관계를 형성할 때 돈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가장 간단하고, 고갈되지 않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칭찬의 힘 3. 피그말리온 효과, 태도 변화를 일으킨다.

칭찬하는 엄마와 기분 좋은 딸

피그말리온 효과는 한 개인의 기대가 현실로 들어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과 교육학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아이들의 학습 성과가 실제로 훨씬 크게 나타났다. 선생님의 기대와 칭찬의 결과 아이들의 공부하는 태도가 변하고 공부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 결국 능력까지 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칭찬의 힘 4. 사기를 진작시킨다.

기업, 학교, 가정 등 어떤 유형의 조직이든 일하고 생활하는 곳에는 사기가 존재해 분위기나 능률을 좌우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경영자들은 사기진작 첫 번째 요인으로 높은 임금을 뽑았지만, 직원들은 칭찬과 격려를 꼽아 직원들이 칭찬에 얼마나 목말라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칭찬의 힘 5. 성장 동기가 된다.

칭찬은 개인의 성장 동기가 된다. 성장 동기는 인간들이 과거에 달성한 업적을 초월하여 좀 더 큰 성취를 향해 나가려는 동기를 말하는데 보살핌, 주목, 애정, 인정, 사랑, 칭찬이야말로 성장 동기를 끌어내는 유인체이며, 우리가 가족, 친구, 동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선물이다.

◆ 좋은 칭찬 VS 나쁜 칭찬, 칭찬의 기술 10가지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될 수 있어 좋은 칭찬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칭찬의 방법이 정확할 때 더욱 놀라운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저자 켄 블랜차드의 칭찬 10계명을 참고하자.

① 칭찬할 일이 생겼을 때 즉시 칭찬하라
② 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③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칭찬하라
④ 결과보다는 과정을 칭찬하라
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칭찬하라
⑥ 거짓 없이 진실한 마음으로 칭찬하라
⑦ 긍정적으로 관점을 전환하면 칭찬할 일이 보인다
⑧ 잘못된 일이 생기면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라
⑨ 일의 진척이 여의치 않을 때 더욱 격려하라
⑩ 가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칭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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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더'의 삶을 살라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사람이 점점 늙어 약해지고 무기력해져서 질병을 앓다가 죽도록 즉, 먼저는 신체적인 사망이요 그 다음에는 둘째 사망 혹은 영원한 사망을 하도록 의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 이 모든 것들을 겪고 사망이 왕노릇 하도록 작정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ㅡ그 사람은 아담이다ㅡ사망이 왕노릇 한다.


궁극적인 사망은 불 못에서의 둘째 사망 혹은 영원한 사망이다. 이 사망 전에, 신체적인 사망이 있다. 신체적인 사망 전에, 우리는 질병을 앓는다. 모든 질병이 다 사망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 질병들은 사망의 징후이다. 질병들의 한 발자욱 전에는 피곤함과 연약함과 무기력이 있고 이것들은 사망의 조짐이요 증상이다. 자, 이 모든 것들이 사망의 형태들이다. 보다시피 사망이 왕노릇 한다!


사망이 원하면, 그것이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타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이는가? 당신은 사망이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왕노릇 하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에게 사망에 대한 진리를 말하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통해 사망이 왕노릇 하였다면, 더욱 더..." 그 "더욱 더"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하신 일이 첫째 아담이 한 일보다 더욱 더 많고 훨씬 더 위대하다. 우리는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의 풍성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더욱 더"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 속에서 왕노릇 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망을 적으로 여기신다. 그분은 사망을 멸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의 안에서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삶 속에서 더욱 더 왕노릇 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은혜 혹은 과분한 은총을 믿으면 믿을수록,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모든 형태의 사망 위에서 더욱 더 왕노릇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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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일본 '젊은이'가 부러운 이유?..대학에 안 갈 자유

SBS | 김승필 기자 | 입력 2015.05.19. 09:15 | 수정 2015.05.19. 11:24

일본의 청년 취업률이 높아지고 있다. 대졸예정자의 취직 예정률이 2~3년 전 70%대에서 올해는 80%를 넘어섰다. 고교 졸업 예정자도 마찬가지다. 고졸 예정자의 취직 내정률이 84%까지 올랐다. 모든 일자리가 대기업이나 공무원 같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은 아니겠지만, 취업 내정률이 80%를 넘는다는 것은 일자리를 구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구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도 한국 청년의 취업 시장은 암울하다. 지난 4월 한국의 청년 실업률은 10.2%로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의 청년 실업률은 내각부의 2013년 자료에 6.2-6.3% 정도인데, 올해는 5%대로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취업률보다 더 부럽고 중요한 게 있다. 일본 청년들은 대학에 가지 않을 자유가 있고, 굳이 직장을 갖지 않고 아르바이트만 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는 점이다.

● 대학진학률 일본 48% - 한국 70%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원하면 누구가 대학에 갈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현재 대학'은 '예전의 그 대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한국의 현재 대학 실정을 좀 과격하게 말하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지혜를 제대로 습득하는 것 같지도 않고, 좋은 직장을 잡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도 모두 대학을 간다. 70%가 대학에 가는 데 안 갈 용기가 없는 것이다. 즉 대학에 가지 않을 자유를 박탈당한 게 한국 학생들이다. 부모들은 자녀가 대학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어릴 때부터 각종 사교육에 목을 맨다. 내 아이만 뒤처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애들은 공부에 골병이 들고, 부모들은 사교육비에 등골이 휜다.

모두 대학 진학률 70%에서 생긴 심각한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반면, 일본의 대학 진학률은 48%다. 절반은 대학에 안 간다는 얘기다. 공부를 좋아하고, 공부 능력이 있으면 대학에 가는 것이고, 대학에 안 가더라도 별문제가 없다. 친구 절반 이상이 대학에 안 가기 때문이다. 일본의 학생들은 신이 나게 운동도 하고, 필요하면 직업 교육도 받는다. 학원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사교육을 받는 학생은 극소수다.

인구와 비교하면 일본 대학과 한국 대학 숫자의 적정비율은 3대 1이 정상인데, 실제는 2대 1이다. 인구에 비해 한국의 대학이 많다는 얘기다. 대학을 세워 이사장이 되고 싶어 하는 지방 유지들과 기업가 (교육 사업에 분명한 뜻을 가진 분들도 있긴 하다)와 지역 국회의원이 힘을 합치고, 여기에다 교육 마피아까지 가세하면서 곳곳에 필요 이상의 대학이 들어섰다. 대학에 가기가 너무 쉬어지면서 오히려 대학이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예전 명성을 날렸던 실업계 고등학교는 점점 줄어들었다. 명칭도 상고, 공고, 농고는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일본의 명문 실업계 고교들은 지금도 '떳떳하게' 상고, 농고, 공고 등의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 아르바이트 시급이 '1,000엔', 하고 싶은 일 하며 산다

선진국은 어떤 나라일까? '인건비'가 비싼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사람의 가치가 높고, 육체노동의 가치를 높게 쳐주는 여건이 갖춰진 나라이다. 핀란드 사람이 미국 아이비리그 박사과정에 다니는 학생에게 왜 그렇게 어려운 일하느냐고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다. 트럭 운전만 해도 박사 학위 소지자와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인건비는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최근 한국과 일본의 물가 수준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일본 도쿄 편의점의 알바 시급은 1,000엔 정도이다. 식당 같은 곳에서는 1,200엔에서 1,300엔도 받을 수 있다. 하루에 9시간, 한 달 20일만 일하면 2백만 원의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하고 싶은 취미활동을 하는 청년을 '프리터'라고 부른다. 이들은 사회 적응 실패자들이 아니다. 출세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줄에서 스스로 내린 것일 뿐이다.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 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프리터'를 선택한 것이다.

남녀 프리터가 결혼해서 살아도 생활에 문제가 없다. 자녀가 생기면, 병원비와 약값이 중학교 졸업 때까지 전액 무료이고, 아동수당도 꼬박꼬박 준다. 사교육비도 들지 않는다. 조금 성실하기만 하다면, 3-4인 가족의 생계에 전혀 문제가 없다. 택배비가 우리 2배가 넘고, 바지 밑단을 줄여도 1천 엔은 줘야 한다. 이 정도 가격이면 한국 소비자로서는 비싸다. 하지만, 육체노동의 대가를 인정해 주는 것이고, 그러니 대학에 가지 않고 좋은 직장을 갖지 않아도 살만한 것이다.

● 대학 진학률 줄여야 청년도 부모도 산다

월급쟁이보다는 사장님이 낫다. 하지만, 한국은 직장을 명예퇴직하거나 정년퇴직한 사람들이 자영업에 뛰어들며 사장님이 되려고 한다. 가진 것은 퇴직금뿐이고, '업의 실태'에 대한 체감적 지식은 전혀 없다.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다. 일본은 '고졸'이 자영업에 뛰어든다. 이미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간의 실전경험을 체득하고, 자기가 가게를 낼 타이밍까지 제대로 포착한다. 어느 길목이 손님이 많은지, 경쟁가게가 있는지 없는지 모두 알고 있다. 단골까지 확보한 상태이다. 당연히 성공률이 높다.

모두가 대학을 가지 않고 청년 세대 때부터 길을 나눠준다는 것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하지만, 한국은 모두가 대학에 가면서 모두가 불행해 지고 있다. 대학을 갔기 때문에 기대 수준은 높아지고, 배워야 할 기술을 배울 때는 놓치고 만다. 번듯한 직장에 가지 못하는 90%의 청년은 패배자로 전락한다. 대학 숫자를 과감하게 줄이는 게 청년도 살고, 부모도 살고, 우리 경제도 사는 방법이다.
김승필 기자kimsp@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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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아이에게 잘 공감해 주는 게 중요하다는데… 이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만약 예를 들어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 오면 어떻게 공감해 주는 게 좋을까요? 공감하자니 계속 싸우고 다닐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도록 혼을 내기는 해야겠는데, 이럴 땐 어떻게 공감해 주어야 하나요?

A : 많은 부모님들께서 이런 고민 한번쯤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공감도 해주어야 하고 훈육도 시켜야 하는데 이 선택의 기로에서 아이에게 공감을 잘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님으로부터 따뜻하게 공감 받는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요.

아이가 공감 받는 느낌 : 아! 엄마가 내 마음을 잘 알고 있구나!

많은 부모님들이 이 부분을 어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경우에는 그렇지 않더라도 유독 아이가 무언가 잘못하거나 실수했을 때, 공감을 해주어야 할 지 아니면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교육을 해야 할 지 부모의 입장에서 판단하느라 정작 아이가 느끼는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게 되지요.

공감을 먼저 해야 할까요 아니면 실수가 없도록 야단을 먼저 쳐야 할까요?

정답은 '상관없다'입니다. 공감과 훈육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도 되고, 선후관계가 다르더라도 아이 입장에서 분명하게'아, 엄마가 내 마음 잘 알고 있구나.'라는 느낌만 있다면 야단을 맞아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야단을 쳤을 때 괜찮지 않은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경우이므로 주의하셔야 합니다.

분명 아이가 잘못해서 야단을 쳤는데, 아이가 이를 거부하려 할 때에는,'내 입장을 몰라주고 내 탓을 한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에게 소홀하다, 나를 미워한다.'는 느낌을 느낄 때입니다. 아이는 항상 자신이 잘했건 잘못했건 간에 부모님은 자신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데, 자신의 입장을 알지 못하면서 야단을 친다고 느낄 때에는 서운함을 느끼겠지요. 야단을 맞더라도 자신이 어땠는지,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그렇게 할 때의 기분은 어땠는지 부모님이 알고 있다고 잘 느끼고 있다면 야단이나 훈육, 심지어 체벌까지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공감을 잘 하기 위한 비결: 아이의 입장이 되어 보기

그렇다면 아이의 입장에서'아! 엄마가 내 마음 잘 알고 있구나!'라고 느낄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떠한 공감이 필요할까요?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이해시키고 설득을 하려 해도 아이가 뜻을 굽히지 않고 요지부동인 반면, 어떨 때는 머리 한번 쓰다듬어도 아이는 숙이고 들어오기도 합니다. 참 종잡을 수 없는 게 아이들입니다.
아이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눈높이를 맞추고 '~구나!.'하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도 괜찮습니다만, 그러한 형식이나 태도에 집중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히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 00이 ~구나!'라고 반응하는 것은 무척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바로 알아차리거든요. 그게 엄마의 진심인지 아니면 어디서 책을 보고 시도해보는 말껍데기 일뿐인 피상적인 반응인지를.

아이들에게 잘 공감하는 비결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말투나 눈빛, 태도를 노력하더라도 그게 진심이 아니라면 아이들은 단박에 알아차립니다.잘 공감하는 비결은 진심이 담긴 반응 그 자체입니다.

아이의 입장을 추측해보고, 나라면 어땠을지 짐작해 봅니다. 또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이의 입장과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면 그때 그 감정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짐작과 추측만으로 섬세하게 공감이 되지는 않습니다. 내 기억을 더듬어보고, 추측해보며 반드시 아이에게 물어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넌 어땠어?'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알고 싶다는 마음이 있을 때,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일이야?'

아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을 진심으로 알고 싶어한다고 느낄 때 진솔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래서 넌 어땠니?'라는 질문 뒤에 무언가 추궁하고 확인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을 때에는 아이들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다. 때문에 공감을 잘 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감이 어려운 이유: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대상화하는 것

비단 아이뿐 아니라 타인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바로 대상화입니다.대상화가 무엇일까요? 한 사람을 대할 때 나와 같은 동등한 인격체, 살아 숨쉬고 생각하고 느끼며 나와 유사하게 무언가를 갈망하고 소망하며 때로는 좌절할 때도 있는 '한 인간'으로서 대하는 게 아니라,내 욕구에 방해가 되는 어떠한 물체/방해물/대상처럼 여기는 마음입니다.

출근길에 바쁘게 계단을 뛰어내려가는데, 어떤 아이가 깁스를 한 채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가는상황을 떠올려 봅시다. 내 마음에서는 어떠한 움직임이 있나요.

그 아이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사람 많은 출근길을 헤치며 아픈 다리로 힘겹게 걷는다는 게 얼마나 힘이 들지, 얼마나 답답할지 짐작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짐작이 된다면 나는 바쁘지만 아이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서 비켜가겠지요. 그 아이의 입장이 되어 짐작해 보는것이 바로 공감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대상화를 할 때는 전적으로 내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내 목적에 충실하려면 그 아이는 바쁘게 가는 출근길에 방해물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어딘가에 깁스를 했건 말건, 얼마나 아플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가 가지 않고, 바쁜 내 발걸음을 방해하는 어떠한 물체처럼 여겨져 짜증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바쁜데 걸리적거리는 어떠한 대상으로 여깁니다.

내 마음의 움직임이 그렇다면 내 행동은 어떠할까요? 신경질을 내며 비켜가거나, 급하다면 밀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대할 때 공감하는 방식과 대상화하는 방식은 이렇듯 내 입장을 생각하느냐, 그 사람의 입장도 함께 고려하느냐로 극명하게 나뉩니다.

공감은 아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반응 차이뿐 아니라,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의 반응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당장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일부 반응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정치적 입장이나 성향,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부 '그만 좀 하지.'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을 볼 때, 공감의 결여가 얼마나 냉혹한 반응으로 나타나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내가 희생자의 유가족이라고 짐작해 본다면 뉴스를 보며 무심하게 '뭐 더 받아먹을게 있다고 저리 시위하나.'라는 식의 반응을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가족이나 내 친구가 차가운 바닷물 속에 잠겨있다고 생각하면, 배를 인양하네 마네 하는 논의가 과연 고려의 대상이 됐었을까 싶습니다.

찰나의 순간조차 그들의 슬픔과 상실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대할 때, 공감에 실패하는 차가운 반응이 나타나게 됩니다. 계단을 뛰어내려갈 때 깁스를 한 아이가 걸리적거려 '바빠 죽겠는데 왜 길을 막고 난리야?'라고 짜증이 벌컥 이는 것처럼요.

아이에 대한 부모님의 마음가짐에서도 가끔은 공감에 실패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합니다.
퇴근 후 피곤에 지쳐 쉬고 싶은 욕구가 클 때, 나에게 휴식의 욕구가 전경으로서 지배적일 때 아이가 놀라달라며 나에게 다가온다면 이를 공감적으로 받아주기 어려워집니다. '나는 쉬고 싶은데, 휴식을 방해하는 걸림돌'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대하게 되며, 그러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놀아주려는 것은 참 고역스럽지요.

공감을 잘 하기 위한 연습: 짧은 순간 멈춰서 나를 살피는 습관

공감을 잘 한다는 것은 일종의 습관과도 같습니다. 짧은 순간 잠시 멈춰 서서, 내 마음의 흐름과 욕구를 알아차리고, 상대방의 마음의 흐름과 욕구를 짐작해보려는 연습이 바로 잘 공감하는 비결입니다. 공감적인 양육이란 피곤하고 버거운 살림과 양육을 하는나의 입장에서 아주 잠시 벗어나, 아주 짧은 순간 지금 내 눈앞의 아이의 입장이 되어 느껴보는 것입니다.

아이의 입장이 헤아려질 때 아주 자연스러운 보편적인 감정반응을 하게 됩니다.

화가 난 아이에게는 달래려 하고, 심심해하는 아이를 놀아주려 하며 슬퍼하는 아이를 위로하고 좌절한 아이에게 지지와 격려를 보내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게 됩니다. 의도적으로 노력하려는, 머리로 이해하고 어떠한 매뉴얼처럼 애를 쓰는 반응이 아닌, 심정을 헤아려 그에 적절한 자연스러운 반응을 할 때 그것이 가장 최선의 공감입니다.

칼럼니스트 : 이형종 임상심리전문가 (삼성생활문화센터 상담실)

※ 본 컨텐츠는 삼성스포츠단이 제공하는 심리학 전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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