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고아 세계 모자 왕, 은혜를 갚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손자로 유복하게 살다가, 일사후퇴 현장에서 가족과 헤어져 미군부대 쇼리가 된 소년.

오갈 데 없는 한국 소년을 돌봐 주고 생명까지 구해 준 미군 병사 빌리.

성공해서 꼭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한 전쟁고아는 백만장자가 되어 생명의 은인과 36년 만에 해후했다.

소학교 3학년 중퇴가 최종 학력인 모자 왕 백성학 씨의 극적인 삶을 보자.

 

가끔 신문 한 귀퉁이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인이 한국인을 찾는다는 기사가 실린다.

60여 년 전의 꾀죄죄한 모습을 담은 사진까지 실릴 때면, 보는 사람들도 과연 그 사람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한다.

은혜를 입은 한국인이 자신을 도와준 미군을 찾고 싶어 미국 신문에 광고를 낸 일은 혹시 없었을까?

그런 일이 있었다.

백만장자가 된 한국의 전쟁고아와 그 고아를 도왔던 미군 병사는 36년 만에 극적인 해후를 했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미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생명의 은인 빌리를 찾은 고아 소년은 한국의 영안모자 주식회사 백성학 회장이다.

연간 1억 개의 모자를 생산하여 전 세계 모자 판매량의 35%를 점유하고 있는 영안모자는 세계 최대의 모자 생산업체이다.

백 회장은 은인 빌리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300자주포 대대의 생존 부대원들과 2년마다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친목 모임을 하고 있다. 
  
백 회장은 300자주포 대대원들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첩 'MEMORY OF THE KOREAN WAR'를 제작해 600여 명의 생존 대원들에게 배포했다.

48페이지로 구성된 이 사진첩에는 한국전쟁의 참상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병사의 앳된 모습, 그들이 현재 노인이 된 모습이 담겨 있다. 
  
백 회장은 열 살 때인 1950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월남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김좌진 장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에게 군자금을 댔던 日善 백운휘 씨이다.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 흥원진에 어마어마한 땅을 갖고 있었던 백운휘 씨는, 삼일운동 때 신의주로 건너가 신의주 형무소를 폭파하는 데 주역을 맡았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함께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37명과 탈옥에 성공,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모두 지명수배되어 국내로 돌아올 수 없었다.

이 사실은 1947년에 먼저 월남한 삼촌 백동섭 씨에게서 들은 얘기라고 한다.

백 회장은 1963년, 한국일보에서 펼친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삼촌과 재회했다. 
  

광복되자 백운휘 씨는 가산을 정리해 신의주와 가까운 용암포로 돌아왔다.

광복되던 해 장남이 장티푸스로 목숨을 거두자 손자 성학을 끔찍이도 아꼈다.

백운휘 씨는 용암포에서 정미소와 벽돌 공장을 세우고 여섯 개의 지사를 설립했지만 1946년에 공산당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다.

1946년에 가족들은 모두 원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산과 가까운 안변에 친척에게 관리를 부탁했던 과수원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47년 여름 공산당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알리고, 세금을 내지 못하면 재산을 빼앗았다.

공산당의 폭정에 못 견뎌 메이지대학 정치과를 나온 성학의 삼촌이 남한으로 먼저 내려갔다.

1950년 5월 초순에 밤이면 군인들이 무기를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고 6월까지 인민군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정작 1950년 6월25일은 평온했다고 한다.

6월29일 원산의 기름탱크가 미군기의 폭격으로 폭발하여 대혼란이 있었다.

사나흘 간 계속 불길이 타오르면서 온 시가지가 기름 냄새로 뒤덮였다. 
 
7월 초에는 한국군이 포로로 잡혀 지나가는 것을 거리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젊은 청년들을 마구 잡아다 인민군에 입대시켰다.

성학의 가족들은 교회 청년들과 함께 원산 외곽에 있는 신고산 밑으로 피란을 갔다.

하지만 10월 초순에 가족들은 다시 원산으로 나왔다.

먹을 것이 없고 추워서 산속에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집이 폭격에 날아가 버리고 없어 교회 근처 빈집에 들어가 생활해야 했다. 
  
10월15일이 되자 남쪽 군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민군들이 여기저기 숨어서 전투기를 향해 총질하는 등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이 태극기를 갖고 나와 군인들을 환영했다.

성학은 10월 하순, 이승만 대통령이 원산역전 광장 해방탑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억양이 이상했다는 것과 연설 중간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이라고 했던 말은 기억이 나요. 어른들이 '남한의 대통령이 왔으니 이제 통일이 되었다'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12월 초가 되자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인민군을 돕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산항 부두를 오가던 미군들이 겨울 들어 부쩍 줄어들더니 아예 보기조차 어려워졌다.

공산당이 다시 내려오면 기독교인들이 큰 화를 당할 거라는 얘기가 떠돌았다.

광석 교회 교인들은 다 함께 원산에서 30리 남쪽에 있는 안변섬에 잠시 피신하기로 했다.

그런데 백운휘씨가 미군 GMC 트럭에 치여서 거동을 못 하게 되자 성학의 가족들은 피란을 포기했다.

출발하기로 한 날 아침, 성학은 교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려고 부두에 나갔다. 
  
"배가 떠나는 걸 구경하려고 서 있는데, 배 위의 교회 선생님께서 나를 불러요. 무슨 일인가 하여 부두와 배를 잇는 부교 발판 위에 올라갔어요. 배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때였죠. 교회 선생님께서 내가 안 되어 보였던지 돈을 주면서 사탕이나 사서 먹으라고 하더군요. 그 돈을 받으려다 그만 가족들과 이별하게 되었죠."
  
성학이 그 돈을 받는 순간 통통선이 고동소리를 울리며 목선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 충격으로 부두와 목선 그리고 통통선을 이어 주는 부교가 기우뚱했다.

자칫하면 성학이 바다에 빠질 상황이었다.

돈을 건네던 교회 선생님은 성학의 손을 꽉 붙잡고 배로 끌어올렸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울부짖었지만 배는 육지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어른들은 사흘 후면 원산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했으나, 국군과 UN군이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결국 닷새 만에 피란선은 주문진으로 향하게 되었다.

주문진에서 열흘 정도 지낸 다음 교인들은 각자 흩어지기로 했다.

성학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가 된 성학은 피란민들 틈에 끼어 경주까지 내려왔다. 
  
전쟁 중이라지만 경주는 매일 장이 열렸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성학이 취직한 곳은 시장의 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그릇을 자주 깨뜨리는 바람에 쫓겨나게 되었고, 다음에 얻은 일자리가 병원 청소부였다.

밥도 적게 주어 늘 허기가 졌던 병원에서 한 달 정도 일하다가 소년은 구두닦이로 나섰다.

하지만 구두닦이들의 텃세가 심해 그 일도 여의치 않았다.

그 와중에도 미군들에게서 물건을 얻으면 구두통에 넣어 소중하게 간직했다.

전쟁터에서 그런 물건은 화폐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1951년 초 날씨가 풀리고 전세가 호전돼 유엔군들이 북상하자, 그제야 원산의 가족들에게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군들에게 얻은 물건을 주면 기관사가 기차를 태워 줬습니다. 북쪽과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 강원도로 향했죠. 어른들이 철로를 따라 걸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기에 기차가 다니지 않으면 무조건 철로를 따라 걸었죠." 
  
강원도 홍천까지 무사히 왔지만 더는 올라갈 데가 없었다.

격전지 근처라 사람들도 별로 없어 얻어먹을 데도 마땅찮았다.

1951년 6월 말, 더운 날씨에 며칠을 굶은 소년은 결국 길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눈 감으면 죽을 것 같아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신문지로 둘둘 말아 놓은 게 보이는 겁니다. 그 속에 말라서 딱딱해진 찐빵 두 개가 들어 있었어요. 날씨가 푹푹 찌는데 찐빵이 상하지 않고 딱딱하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죠. 거친 밀가루로 만든 찐빵을 조금씩 떼어먹으며 기운을 회복했지요."
  
소년은 산속에서 헤매다가 강물이 불어나는 바람에 닷새 동안 오디만 먹고 견딘 적도 있었다. 

소년은 고아일수록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 남루한 옷이나마 자주 빨아 입었다.

1951년 8월 초, 그날도 강가에서 빨래하고 있는데 국군 한 명이 강에서 세수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려고 했지만, 군인의 눈에는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다.

당시 남북 양쪽에 어린 첩자가 많아 군인들이 전쟁지역에 있는 아이들을 믿지 못했다.

재빨리 구두통을 뒤져 아껴 두었던 콜게이트 치약을 꺼내 군인에게 내밀었다. 
  
그 일을 계기로 소년은 김종만 일병과 함께 인근 110포 부대에서 살게 되었다. 110포 부대는 독립 부대로 강원도 홍천에 있으면서, 105밀리 박격포로 6사단을 지원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열한 살 난 딸이 있었던 김종만 일병은 성학을 아들처럼 아껴주었다.

 

"내가 국군을 따라다닐 때, 북한군과의 전쟁보다 먹을 것과의 전쟁이 더 무서웠어요. 일주일치 부식을 타면 이틀 만에 다 떨어졌어요. 군인들은 틈만 나면 먹을 것을 마련하느라 온 신경을 썼을 정도예요." 
  
미군 부대 쓰레기통을 뒤지면 먹을 게 나왔다.

110포 부대 군인들은 미군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끌어모아 통에 넣고 팔팔 끓여 먹었다.

때로는 퀴퀴한 냄새가 날 때도 있었지만 성냥과 담배 등 쓰레기를 건져내고 끓여서 모두 나눠 먹었다.

군인들은 부대 주변에서 뱀, 개구리, 꿩, 노루, 새, 물고기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특히 산 까마귀가 많아 군인들에게 좋은 양식이 되었다.

중공군 시체의 배낭에서 피가 밴 강냉이 가루를 찾아내 끓여 먹은 때도 있다고 한다. 
  
식량이 모자라 부대원들이 굶는 일이 많아지자 소년은 텅 빈 민가를 돌아다니면서 식량이 될 만한 것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뭔가 득이 되는 일을 해야 군인들을 따라다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쇠꼬챙이로 여기저기 쿡쿡 찔러 보면 감자나 곡류가 나오는 일도 있었다.

군인들은 어렵게 식량을 구해와도 금방 다 먹어 버렸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우선 먹고 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백 회장은 그런 군인들 틈에서 살아남을 궁리했었다고 회고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프리마 몇 개는 비상식량으로 꼭 간직하고 있었어요. 한국 사람들은 C레이션 안에 들어 있는 프리마를 그냥 버렸어요. 그걸 모아 두었다가 이틀 정도 굶었을 때 혼자 개천에 가서 깡통에다 물을 붓고 끓여 먹곤 했지요." 
  
1951년 8월 말, 110포 부대는 전투투입 명령을 받았다.

소년도 전투지역에 따라가서 포탄 뒤에 붙이는 화약을 나르고, 적군이 쏜 포탄이 몇 km나 날아왔는지 거리를 쟀다. 
  
"특수임무 때 적진에서 고립되거나 대치하고 있을 때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 사복을 입은 내가 항상 앞서 나갔지요. 나는 태연한 척하고 인민군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소대장이 지시한 대로 적군의 포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적군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슬금슬금 살펴봤죠. 간혹 의심에 찬 눈으로 나에게 말을 거는 인민군이 있었어요. 그러면 능청스럽게 평안도 말과 함경도 말이 섞인 사투리를 구사했죠. 북쪽 말투를 들으면 대부분의 인민군은 별 의심 없이 보내 줬어요."

지뢰 매설 지역을 찾을 때도 날렵한 아이들이 앞장서기도 했다.

소년도 지뢰제거 작업에 여러 번 동행했지만 한 번도 위험에 빠진 적은 없었다. 
  
1951년 12월에 110포 부대는 후방 남원으로 이동해 남원 8사단의 전라도 공비 토벌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독립 부대인 110포 부대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보병 뒤에 붙어 다니면서 지원하는 일을 맡았다.

전 소대원들이 기차로 제천까지 내려와 트럭에 옮겨 탄 뒤 저녁 무렵에 출발했다.

아흔아홉 구비 박달재를 넘어야 하는데 눈까지 내렸다.

백 회장은 지금도 그때만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말했다.

박달재를 넘다가 차가 전복되어 34명 가운데 절반인 17명이 죽고 말았다. 
  
"트럭에는 포와 기름을 넣은 드럼통이 실려 있었어요. 갑자기 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때 트럭을 덮은 천막이 찢어지면서 그 천막이 내 몸을 감싼 덕에 나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어요. 죽지 않은 사람 가운데서 다치지 않은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어요. 차가 전복될 때 튕겨 나가면서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바위에 부딪혔기 때문이죠."
  
최극 소대장과 선임하사와 함께 마을로 달려 내려가 총을 쏘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냈다.

동네 사람들이 지게를 갖고 와서 동네로 시체를 날랐다.

전쟁 중이라 그렇게 하지 않고는 도움을 받을 길이 없었다고 한다.

겨우 부상병들이 몸을 추스르고 있을 때 미군 헌병 차와 앰뷸런스가 와서 부상병들을 실어 날랐다.

소대장은 성학에 죽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뒤져 유품을 정리하고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전방에 있을 때 골짜기에서 중공군 시체도 보고 국군 시체도 많이 봤지만 별 감정이 없었어요. 워낙 죽은 사람을 자주 봤기 때문이죠. 하지만 내가 아는 분들의 유품을 꺼내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렀지요. 모두 나에게 친절했던 형과 아저씨들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처음 부대로 데리고 간 김종만 아저씨는 가벼운 부상만 당했었죠."
  
이틀 후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장작을 지펴 시체를 모두 화장했다.

최극 소대장은 함께 일하던 병사들을 가족들에게 인계하기 위해 전쟁 중에도 화장했다.

모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소대원의 반이 죽고 나머지도 다쳤으나 보충병이 와서 함께 남원으로 향했다. 
  
110포 부대는 3개월간 남원 운봉리 포부대에서 전라도 공비 토벌을 지원했다.

민간인 가운데 공비들과 연결된 사람이 많아 부대원이 모두 몰살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

공비 토벌을 마치고 나서 얼마 남지 않은 부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는 운명을 맞았다.

4.2인치 포는 모두 보병에 인도되고 각각 전출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독립 부대인 110포 부대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소년은 강원도 양구의 96포병대대 제2포대 3분대로 배치된 김종만 씨를 따라 다시 강원도로 올라왔다.

금성 읍내에서 동남쪽 3km 후방에 떨어져 있는 770고지에 위치한 부대였다.

훈련장에는 155밀리 곡사포가 늘어서 있었다.

제2포대는 병사들이 많은데다 분위기도 삭막했다. 
박격포 소대의 군인들이 성학을 친동생처럼 아껴 주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소년이 할 일이라고는 대원들이 훈련 나간 사이에 막사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소년은 스스로 일감을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원들이 벗어 놓은 빨래를 하고, 양말을 깁고, 때로 총기 손질도 해 놓았다. 
  
부대 앞을 흐르는 강 건너편에는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강 건너라고 해봐야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어느 날 미군부대 쪽을 보던 소년은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있는 거에요. 세상에 나 같은 어린아이가 있다는 걸 잠깐 잊고 살았던 거죠. 얼마 후 미군부대에 있는 아이들과 마주치게 되었어요. 그 친구들이 나에게 껌과 초콜릿을 주더군요. 그 친구들은 나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얻어 갔어요." 
  
소년은 그 아이들을 따라 미군부대에 놀러 가기도 했다.

미군들에게 얻어 온 비스킷과 초콜릿 등으로 한국군들이 다과회를 하기도 했다. 
  
성학은 먹을 것도 많고 영어도 배울 수 있는 미군부대가 좋아 보였지만 김종만 씨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김종만 씨는 소년이 미군부대에서 놀다가 조금 늦게 가면 어떻게든 밥을 남겨두었다가 주곤 했다. 
  
가끔 나타나는 중대장은 귀찮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느냐면서 내보내라고 했지만 김종만 씨는 끝까지 소년을 돌봐 주었다.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을 때 김종만 씨가 포를 연결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저씨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트럭 위로 올라가서 놀고 있었다. 
  
누군가의 고함이 들리고 사병들이 놀라서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소년도 재빨리 뛰어내려 차 밑을 바라보았다.

포를 연결하다가 잘못되었는지 김종만 씨가 트럭에 깔렸었다.
성학은 눈물을 흘리며 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분대원들이 다가가 얼른 그를 꺼냈지만 이미 다리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신속하게 들것에 실어 김종만 씨를 앰뷸런스에 태우고 떠나버렸다.

"부대원들은 곧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고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요. 김종만 아저씨가 없는 부대에 더는 머물 수가 없었어요. 그 자리에 푹 꼬꾸라져서 한참을 울다가 건너편 미군부대로 터벅터벅 걸어갔어요."
  
백성학 회장은 김종만 일병과 함께 지낸 기간이 불과 9개월이지만 그 기간이 마치 10년처럼 길게 느껴졌다고 한다.

김종만 씨가 없었다면 자신이 전쟁터에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김종만 씨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성학이 찾은 미군부대는 제300자주포 대대로 미군 제24사단과 한국군 6사단을 지원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미국 와이오밍주 방위군의 한 병력으로 한국전쟁에 긴급 동원된 부대였다.

소년은 미군부대 앞에서 서성거리며 자주 만나던 친구 쇼리 문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저물녘에 쇼리 문이 정문으로 나오는 걸 보고 성학이 달려갔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쇼리 문이 미군들에게 소년을 쇼리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스름 저녁에 갈 데라곤 없는 소년을 위해 쇼리 문이 다시 한번 사무실에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한 미군 병사가 두 아이를 보고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쇼리 문이 성학을 소개하자 그 병사도 세탁부를 둘 만한 형편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어쩐지 그 병사가 친근하게 느껴졌어요. 그동안 귀동냥으로 들은 영어를 총동원하여 갈 곳이 없으니 여기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죠. 내가 안 되어 보였던지 한참 만에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성학은 그날로 미군 병사 빌리의 쇼리가 되었다.

당시 빌리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소년은 원산을 떠난 뒤로 거의 1년 반 만에 끼니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쇼리들은 미군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었지만 굶는 일은 없었다. 
  
"한국 군인들은 '인민군이 나타나면 하나 쏴 죽이고 고깃값이나 하고 죽어야지. 내 살값은 해야지'라며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에 비하면 미군들은 여유가 많았어요. 한국군들은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몰라 늘 긴장해 있었는데 미군들은 춤추고 기타 치며 여가를 즐겼어요. 일단 미군들은 먹을 게 풍부하고 삶의 방식이 달라 여유가 있었던 거죠." 
  
하지만 미군들도 치열하게 전투를 했다.

며칠 밤을 새우며 포를 쏠 때면 쇼리들이 뜨거운 커피를 끓여서 밤새 미군들에게 날랐다.

북쪽에서 미군부대로 포가 날아들어 포탄에 푹푹 파인 구덩이가 생겼다.

산 뒤에서 미군부대를 향해 날아온 곡사포에 미군들이 죽기도 했다. 
  
소년은 다른 군인들에게도 인정받아야 쫓겨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막사를 깨끗이 청소하고 다른 사람이 벗어 놓은 양말이나 셔츠까지 말끔히 세탁했다.

빌리는 성학에 늘 먹을 걸 챙겨 주었고 밤이면 자신의 침대 옆에 나무 상자로 잠자리를 만들어 그 위에 재웠다.

빌리는 시간이 나면 소년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독감에 걸렸을 때 약을 구해 주고 밤새 간호했다.

빌리는 일본으로 휴가를 다녀오는 길에 소년에게 줄 호랑이가 그려진 점퍼와 여러 가지 선물을 사왔다. 

 

 

 

 

 

성학이 미군부대 생활에 익숙해지고, 영어도 웬만큼 익혀 어려움이 없을 때 난데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미군부대에 있는 열다섯 살 이하 어린이를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여섯 명의 쇼리 중에 열두 살이었던 성학만 그 대상이었다.

이튿날 소년은 미군 차량에 실려 후방에 있는 고아원으로 갔다. 
  
그러나 군대에서 성인들과 생활하면서 조숙해진 소년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결국, 몰래 고아원을 도망 나온 소년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미군부대로 되돌아왔다.

부대원들은 성학이 유난히 빌리와 친밀하게 지낸 것을 알고 함께 생활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1953년 6월, OP 센터에 서류를 갖다 주고 오는 길에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성학은 개천에서 5~6m 떨어진 곳에서 포탄 상자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는 팬티만 입고 들어갔다.

개울물은 목욕하기에는 아직 좀 차가웠던 것이다.

갑자기 '뿅뿅' 소리가 들렸다.

'뿅뿅' 소리는 가까운 데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이고, '쉐쉐쉐' 하는 소리는 포탄이 멀리 날아가는 소리이다.

성학은 한국군 포부대에 있었던 경험을 살려 아주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막사로 들어가기 위해 일어섰다.

그 순간 근처 기름통에 포가 명중해 다른 기름통으로 옮겨붙으면서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휘발유 통 하나가 나에게 쏟아지면서 온몸에 불이 붙은 겁니다. 순간적으로 개천으로 뛰어들어가서 엎드렸어요. '치이익' 하고 불 꺼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내 몸에 불이 붙었던 시간은 몇 초에 불과했을 겁니다. 하지만 맨살에 기름불이 붙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지요. 개울로 달려가 엎드린 후 정신을 잃었어요. 그냥 두었으면 정신을 잃고 개천에 떠내려가다가 가라앉아 죽었을 겁니다."
  
개울에서 40~50m 떨어진 곳에 벙커가 있었다.

성학의 몸에 불이 붙은 사실을 알고 빌리가 야전 점퍼를 들고 뛰어나갔다.

빌리는 막 떠내려가는 소년을 건져 점퍼에 싸서 벙커로 돌아왔다.

곧 중대장에게 연락했고 포탄이 잠잠해진 틈을 타서 지프에 소년을 실었다.

성학의 몸은 부풀어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부대에서 20km를 달려 헬기장에 도착했고, 헬기는 소년을 태우고 화천 인근의 미군 야전병원으로 날아갔다. 
  
18시간 만에 깨어난 성학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성한 데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얼굴까지 붕대로 덮여 입만 겨우 벙긋거릴 수 있었다.

미국인 간호 중위가 하루에 두 번 몸에 감긴 붕대를 새로 갈아주었다.

몸에서 진물이 흘러나와 시트를 날마다 갈아 줘도 늘 흥건히 젖었다.

백 회장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빌리가 찾아오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고 회상했다. 
  
"빌리는 틈만 나면 찾아와서 위로해 주고 용기를 주었어요. 친구들까지 데리고 열 번 정도 왔을 거에요."
    

 

 

   
1953년 7월, 전쟁의 막바지에 철의 삼각지대인 중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300대대도 이 전투에 참여했고, 밀고 밀리는 가운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마침내 총성이 멎었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었고, 3년 1개월간 끌어온 전쟁이 승자 없이 멈췄다. 
  
성학은 휴전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얼굴의 붕대를 풀었을 때 한동안 오지 않던 빌리가 찾아왔다.

소년의 몸은 군데군데 진물이 남아 있고 껍질이 벗겨지긴 했지만 처음보다 훨씬 좋아진 상태였다.

빌리는 병실에 들어오면서 탄성을 질렀다. 
  
"야, 정말 많이 나았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두 사람은 오랜만에 밀린 얘기를 했고, 빌리는 무슨 얘긴지 할 듯 말 듯하다가 그냥 돌아갔다.

빌리는 헤어질 때 평소와 달리 눈물을 흘렸다.

빌리가 귀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왔지만 성학에게 차마 작별인사를 못 한 것이다.

얼마 후 빌리가 귀국했다는 사실을 안 소년은 서럽게 울었다.

할아버지와 김종만 아저씨에 이어 빌리까지 떠나자 자신이 정말 혼자라는 게 뼈저리게 실감 났다고 한다. 
 
상처에 딱지가 앉고 더는 진물이 나지 않자 의사는 바닷가에 가서 피부를 시커멓게 태우라고 했다.   
1954년 여름, 얼굴에 연고를 바른 다음 선탠을 하자 얼굴의 피부가 한 꺼풀씩 벗겨졌다.

딱지가 앉은 겉피부도 자연스럽게 벗겨졌다.

세 번의 선탠을 하면서 피부가 벗겨지고 나자 보들보들한 새 살이 돋아났다.

소년은 흉터 하나 없이 1955년 3월에 퇴원하고 미군병원을 떠나게 되었다. 
  
1955년 3월, 성학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서울에 왔지만 갈 데가 없었다.

국군과 생활할 때 한 사병이 서울에 가면 자신의 누나 집에 가보라고 적어 준 주소가 있어 무조건 그 집을 찾아갔다.

그 누나 집에서 며칠 머물 때 취직하게 된 곳이 바로 학생모자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원이 된 지 1년 만에 정식 점원이 되었고, 주인의 신임을 얻어 두 개의 점포를 관리하게 되었다.

18세 때까지 그 가게에서 일하면서 모자 제조기술과 판매방법, 유통에 대한 기술을 익혔다. 
    
1959년 19세 때 성학은 서울 청계천 4가에 모자 상점을 차리고 사장으로 변신했다.

새벽 1~2시까지 열심히 일한 백 사장은 불과 1년2개월 만에 가게를 확장하여 종로로 이전했다.

1962년 22세가 되던 해 공장 규모를 대폭 늘리고 직원도 많이 채용해 모자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화폐 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면서 새 지폐가 나왔다.

1962년 여름, 정부에서는 개인당 500원만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 준다고 발표했다.

많은 사람이 구화폐는 휴짓조각이 된다고 생각했다.

물건의 매매가 중단되었지만 백 사장은 구화폐로 물건을 팔았다. 
  
대신 모자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모자는 순식간에 다 팔려나갔다.

정부가 화폐를 바꿔 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모험했던 것이다.

발표한 지 3주 만인 7월 중순에 구화폐 전액을 신화폐로 바꿔 준다는 정책이 발표됐다. 
  
자금을 많이 확보한 백 사장은 공장을 확장하여 좋은 위치로 가게도 옮겼다.

전국에 대리점을 개설하고 승승장구했다.

1965년 산업박람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당시 '영안모자'도 출품했다.

격려차 현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모자 전시장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영안모자로구먼, 나도 이 회사 모자를 자주 쓰는데 제품이 아주 좋아. 무역진흥공사에서 수출육성상품으로 지원해도 좋을 것 같아."
  
대통령의 한마디에 다음날 조사팀이 회사에 와서 수출방안을 모색해 주었다.

이듬해 공장 규모를 확장, 일본에 모자를 처음으로 수출했다.

하지만 보세가공 수준이어서 제품 물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일본 회사가 돈을 벌었다. 
  
영안모자가 독자적으로 모자 수출을 모색하자 일본 회사는 기자재 보급을 중단하는 등 방해공작을 폈다.

하지만 백 사장은 유태계 상인의 도움으로 미국 수출의 길을 열었다.

미국 대도시를 돌며 모자 세일즈를 할 때 영안모자는 큰 인기를 끌었다.

가격이 저렴한데다 바느질이 꼼꼼했던 게 주원인이었다. 
  
1970년에 영안모자는 총 15만 9천 달러 어치를 수출했다.

백 사장은 1971년에 국내 판매를 전면 중단하고 모자에 영안 상표를 부착해 외국수출에 주력하기로 했다.

국내에는 영안모자가 아니더라도 10여 개의 군소업체에서 만드는 양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백 사장은 외국 바이어들에게 영안 상표를 부착해 팔다가 클레임에 걸리면 100% 책임지고 가격의 3%를 할인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밀었다.

바이어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72년부터 모든 제품에 영안상표를 부착했다.

1970년대 초만 해도 국내에서 고유 상표를 부착해 수출하는 업체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외국수출이 순조로운가 했더니 1972년에 미국에서 모자를 쓰지 않는 히피족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모자업계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스포츠 열기가 대단했다.

야구와 미식축구에 대한 관심은 거의 광적이었다.

야구 경기를 보다가 백 사장은 무릎을 쳤다. 
  
미국 프로야구단에 기념품을 50년이나 납품해 온 데이비드 왈소씨를 만나 팬 서비스 모자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납품하겠다고 제의했다.

일본과 대만, 홍콩에서 납품받은 팬 서비스용 모자가 질이 낮아 팬들에게 인기가 없어 고민하던 왈소 씨가 백 사장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영안모자에서 제작한 모자를 주는 날은 입장권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자 운동구점이 아닌 백화점과 일반 상점에서도 모자를 팔기 시작했다.

광고용, 기념품용, 직원용 모자 주문이 밀려 들어왔고, 영안모자는 세계적인 모자 회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영안모자는 1984년에 남미 코스타리카 진출을 시작으로 외국 공장 건립에 박차를 가했다. 

 

 

 

 

백성학 회장은 처음 모자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틈틈이 불우이웃 돕는 일에 나서면서 55세 이후에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을 계기로 사회봉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이틀 전에 내가 탔던 비행기였어요. 내가 뉴욕에서 업무가 늦어져서 그 비행기를 탔더라면 나도 죽었겠죠. 그러면 55세부터 사회사업하겠다는 결심을 실천할 수 없잖아요."
  
가장 먼저 실천한 것이 독립기념관 건립에 5억 원의 성금을 낸 일이다.

당시 대기업 회장도 2억~3억 원밖에 안 할 때였다.

무명으로 거액을 내자 언론에서 기탁자를 찾기 위해 한동안 애를 썼다.

이후 독립기념관에 불이 났을 때 1억 원을 더 냈다가 결국 백 회장의 신분이 드러나 화제가 됐다. 
  
백 회장은 1983년에 자신이 꼬마 군인으로 활약했던 홍천 강가에 6만 평의 땅을 샀다.

1986년에 고아원과 양로원, 교회, 장애인 수용시설, 재활 공장, 병원 등을 완공해 '백학마을'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건물 하나하나마다 그리운 이들의 이름을 붙였는데 장애인 수용시설은 '빌리 사랑의 집'이라고 이름 붙였다. 
  

1984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데이비드 리드 기자가 백 회장을 찾아왔다.

백 회장은 공연히 자신을 자랑하게 될 것 같아 취재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데이비드 기자는 빌리 얘기를 꺼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5천만 부나 발행되며 전 세계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니 기사가 나가면 빌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백 회장이 미국 출장을 갈 때마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빌리를 찾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백 회장은 그 얘기에 솔깃하여 인터뷰에 응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1986년 6월호에 '6·25 때 옛 전우를 찾는 한국의 모자 왕 백성학'이라는 기사가 7페이지나 실렸다.

기사가 나가자 미국 전역에서 300여 통의 편지가 왔다.

격려와 칭찬의 편지도 있었지만 자신이 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편지도 많았다.

다행히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을 통해 한국군 부대 소대장이었던 최극 씨와 분대장 박흥수 씨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김종만 일병은 끝내 소식이 없었다. 
  
빌리에게 연락이 없자 데이비드 리드 기자는 33년간 FBI에서 첩보요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코틀랜드 존스 씨를 백 회장에게 소개했다.

존스 씨는 무보수로 빌리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기사가 나간 뒤 수확이라면 300자주포 대대 A중대 상사로 복무하다 전역한 데이비스 씨가 연락해 온 일이다.

데이비스 씨는 '부대에서 일하던 4명의 쇼리 사진을 갖고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백성학인 것 같다.'는 편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왔다. 
  
그 사진에는 화상을 입어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40년 전의 '쇼리 학'이 있었다.

데이비스 상사의 편지로 빌리가 300자주포 대대 A중대에 근무했음이 확인되자 존스 씨는 미 육군본부로 달려가 1952년 한국참전 300자주포 대대원의 명단을 열람했다.

그 부대에 '빌리'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가 12명이나 있었다.

그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추적하여 연락을 취했지만, 모두 백 회장이 찾는 빌리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백 회장은 1986년 9월 백학마을 준공식 때 사진을 보내 준 데이비스 씨 부부를 초청했다.

그때 데이비스 씨가 6·25 때 참전한 300자주포 대대 병사들에게 사진을 가져오게 하여 사진을 보고 빌리를 찾자고 제안했다. 
  
1989년 5월, 36년 만에 A중대 전우 14명이 캔자스시티에 모였다.

백 회장은 그들이 가져온 천여 장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이틀 동안 사진을 보고 또 보았지만, 빌리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오래되어 기억이 희미해진 탓도 있었다.

전우들과 헤어지기 전날 밤, 백 회장은 확대경까지 들이대고 다시 꼼꼼히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한 장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가 '빌리를 찾았다.'고 큰 소리를 질렀지요. 그러자 전우들이 다가와서 사진을 보더니 '이 사람은 빌리가 아니라 데이비드 비티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비티'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빌리로 잘못 들었던 거죠." 
  
한국으로 돌아온 백 회장에게 곧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비티가 필라델피아 포트 리치먼드에 살고 있음을 알아냈다는 소식이었다.

데이비드 리드 기자와 존스 씨가 먼저 찾아가 백 회장의 소식을 전하자 비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의 친절은 당연한 건데 뭐하러 날 찾느라 그렇게 수고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존스 씨의 연락을 받고 백 회장은 정확히 3시간 만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6시간의 비행시간 동안 내내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비티의 집을 방문했을 때 58세가 된 초로의 신사가 백 회장을 맞아 주었다.

36년 만에 만난 비티는 '학, 옛날보다 많이 컸군.'이라며 백 회장을 껴안았다. 
  

두 사람은 6시간이나 손을 놓지 않고 쌓인 얘기를 주고받았다.

비티는 1957년에 제대한 후 20년간 제빵공장에서 일하다가 필라델피아 한 건물의 야간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임금은 시간당 8달러였고, 자녀는 넷이었다.

백 회장이 비티에게 집과 차를 사주고, 자녀의 학비를 대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러자 비티는 이렇게 말했다. 
  
"학, 나는 너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라고 생각해. 내가 사는 이 아파트는 이제 월부금이 거의 끝나가고 내가 버는 돈으로 우리 식구가 어려움 없이 지낼 만해. 난 지금까지 승용차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차도 필요 없다네. 그러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게나."
  
1990년 3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는 '6·25 때의 은인을 찾은 모자 왕 백성학'이라는 제목으로 또 한 번의 기사가 나갔다.

그 기사를 계기로 1993년부터 지금까지 300자주포 대대원들은 2년마다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첫해에 600여 명의 대원이 모였고, 요즘은 300여 명이 모인다고 한다.

비티는 한국을 방문해 영안모자 본사를 둘러보고, 강원도 홍성의 백학마을을 방문해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념관들을 둘러보면서 '쇼리 학'의 성공을 축하해 주었다. 
  

백성학 회장과 비티는 1995년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기념비 완공 기념식과 2000년 6월25일 한국전쟁 50주년 기념행사 등에 미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미국 굴지의 영화사들과 출판사들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와 책으로 만들자고 제의했다.

백 회장은 공연히 인간적인 자랑이 될까 봐 지금까지 그 일을 사양하고 있다. 
  

현재 영안모자는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한 9개국에 11개 공장과 15개 판매회사를 갖고 있다.

매년 1억 개의 모자를 만들어 연간 2억 2천만 달러의 매출액을 올리는 영안모자는 전 세계 모자 생산량의 35%를 생산하는 세계 1위 모자업체이다.

영안모자의 전 세계 공장에 근무하는 직원은 5,500여 명에 이르며,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한국 본사 직원 180여 명이 연구 개발과 샘플 제작을 하고 있다. 
  
국내 본사와 국외 공장은 수시로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생산 주문과 관련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영안모자는 홍콩텔레컴에 월 1만 달러를 내고 위성을 이용한 국제전화 전용회선을 사용하고 있다. 
  
백 회장은 15년 전에 나라에서 버린 봉제사업을 외국으로 끌고 나가 한국 직원들도 먹고살고, 국외에서 고용 창출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외국에서 번 돈을 국내로 들여오면서, 꼬박꼬박 세금을 내고 있다.

영안모자의 빚은 재산대비 5% 정도라고 한다. 
  
"사업이 많이 커졌지만 안 망한다는 보장이 없어요. IMF 때 이자가 35%까지 치솟았어요. 그때 빚이 있었으면 망했을 겁니다. IMF 때 우리는 실업자를 구제하는 차원에서 신입사원을 30명 정도 채용했어요. 기업인은 나라가 불안할 때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원부자재를 국외에서 서 외국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국내 경기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백 회장은 그동안 다양한 제의가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점에서 제의가 오기도 했고, 동업하자, 투자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나는 내가 가진 기술인 모자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내 세대는 모자를 완성하고, 2세들이 다른 걸로 뻗어 나갈 수 있게 경영 지도를 하고 있지요." 
  
영안모자는 얼마 전 대우자동차 버스 부문을 인수했다.

백 회장은 새로운 사업을 펼치는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10년 전에 코스타리카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뒤 버스와 특장차를 생산하고 있다며, 그 연장 선상에서 인수한 사업이라고 했다.

백 회장은 호텔과 목장도 소유하고 있다. 
  
"부동산을 활용하기 위한 개인사업이지요. 개인사업을 해서 고용도 창출하고 세금도 내고 있습니다. 개인 돈이 없으니 회사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세금을 적게 내려고 안간힘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나는 불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기 위해 개인사업을 합니다."
  
백 회장은 44년간 사업하면서 개인소득세를 182억 원이나 냈다.

1970년대 이후 언제나 개인소득 80위 안에 들었다.

백 회장은 세금을 많이 내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자식에게 정직한 걸 증명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제대로 내야 합니다. 제대로 상속해야 자식도 제대로 사업하지요. 자식에게 돈이 아니라 신의, 약속, 신용을 넘겨야 합니다. 2세가 신임을 얻으면 사업은 저절로 잘 되게 되어 있어요."

  
백 회장은 빌리와 재회한 것과 아내를 만나 가정을 갖게 된 것이 가장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백 회장은 아내의 모교인 이화여대에 어머니를 기념한 교회를 지어 기증했고, 국외에도 백학마을 7개를 건설해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백 회장은 1950년에 열 살의 나이로 월남했을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고 말했다.

그가 30년 된 가방과 지갑을 기워서 들고 다니는 걸 보고 주변에서 '너무 궁상 아니냐.'며 놀릴 정도로 검소하다.

골프도 치지 않고 별다른 취미도 없다는 그는 지갑에 약간의 비상금만 넣어 다닌다고 했다.

백 회장은 사업가든 정치인이든 종교인이든 과한 욕심을 내면 실패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평생 욕심부리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

 

 

 

다른 나라에서도 통할 타조 사육

 

 

뉴질랜드에선 타조 고기를 '오스트리치 미트(Ostrich Meat)'가 아닌 한국식 발음 그대로 타조(Tajo)라고 한다. 

뉴질랜드의 타조왕 배효섭(52) 씨 때문이다.

증권회사에서 20년간 명성을 달리던 배씨는 돌연 뉴질랜드로의 이민을 결행했다.

그는 그곳에서 난생 처음 축산업에 도전했고, 타조에 그의 인생 모든 것을 걸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뉴질랜드 타조 고기의 90%를 생산해내는 타조 대농의 주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배씨 또한 그 또래들이 그렇듯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충남 홍성군 광천이 그의 고향이다.

10대에 서울로 올라와 당시 동대문상고(청원고)에서 공부를 마치자 마자 바로 증권회사에 취직했다.

회사를 다니며 홍익대 무역학과(야간)에 다니며 공부했다.

그는 잘나가는 채권맨이었다. 

1976년부터 96년까지 딱 20년을 증권회사에 몸을 담았다.

그의 전담은 채권.

대우, 신한, 동부증권 등 회사를 여럿 옮겼지만 언제나 채권을 주특기로 삼았다.

잘 나가던 채권맨을 그만두고 왜 이민을 결심했느냐 물었다.

"채권을 오래 하게 되니 전체 경제 흐름을 읽게 됩디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우리 경제의 거시적인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빈말이 아니라 90년대 말에 IMF가 올지 예상했습니다. 거품 가득했던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란 것을요."

그는 마흔까지 월급장이 생활을 하고 그 이후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겠다는 인생계획을 이미 세워둔 터였다.

"20년 직장생활을 했으니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정한 게 이민입니다."

 

 


그럼 왜 뉴질랜드인가.

"당시는 IT산업이 각광을 받을 때였습니다. 그 다음은 뭐가 올지 궁리했는데 아마도 1차 산업이 다시 뜨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증권회사에서 만날 머리만 움직여 돈을 벌다 보니 땀 흘리며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서 땅 넓은 나라인 뉴질랜드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뉴질랜드에 와서 많이 돌아다니며 살펴봤다.

뉴질랜드의 축산업은 소와 양이 주축이었다.

소나 양은 언제든 시작해도 좋았다.

안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목표에서 제외했다.

안정적이란 건 발전 가능성도 높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때 타조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당시에도 타조는 인지도가 낮았지만 나중에 시장성이 나아지리란 것을 예상하고 타조에 몸을 던졌다.

"웰빙 바람이 불면서 타조의 고기나 가죽, 기름 등이 분명 소비되겠구나 짐작했습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막연한 믿음 하나로 시작했죠. 주변에선무모하다고 말렸습니다."


 

 


그는 99년도에 뉴질랜드 오클랜드 인근에 5만㎡ 되는 농장을 샀다.

4마리의 타조로 시작한 농장이다.

주변에서 타조를 사와 제일 좋은 어미 타조를 만드는 것이 첫 목표였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고 하는데 내 신조는 그런 다리는 건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는 게 없어서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미래가 있습니다. 과거의 경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망설이다가는 새로운 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는 '해외 나가서 사업
을 할 때 그래도 땅을 사서 하는 일은 그나마 안정적'이라고 했다.

어떻게 되든 땅은 남기 때문이다. 

그는 처음 타조를 시작하며 젖소도 250마리 키웠다.

타조를 늘리면서 젖소는 차츰 줄였다.

그리고 2000년 11월 100만㎡ 되는 지금의 농장을 구입했다.

현재 그가 키우고 있는 타조는 3,000마리.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타조농장이다.

그는 일단 시작한 것이니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데 온 심혈을 기울였다.

최고의 고기는 사육에 달렸다.

들쭉날쭉 없는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다.

다행히 뉴질랜드는 질병이 별로 없는 청정지역이었고 타조는 또 면역성이 강해 혹한 혹서도 잘 견뎌냈다.

사업 초기 사료를 사다 쓸 때였다.

사료 보관이 잘못됐는지 먹이가 이상해 어린 타조들이 죽어나갔다.

처음엔 원인도 몰라 속만 끓였다.

700~800마리가 죽어나가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사료 때문이었다는 이유를 알고 난 뒤 사료회사에 소송을 걸었고 3년여 법정다툼을 벌여야 했다.

그 3년간 자료를 수집해나가는 과정에 타조의 먹이 등 사육에 관한 귀중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타조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하나가 타조는 아무거나 잘 먹으니 아무렇게나 먹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물에 만 밥만 먹고 계속 살 수는 없잖아요. 타조도 마찬가지에요. 타조를 날개 달린 소라고 합니다. 풀을 뜯어먹고 사는 타조에게 풀의 영양소를 분석해 식물성 단백질이 많고 미네랄이
풍부한 것을 골라서 키워 먹였습니다. 축산이 발달된 국가답게 뉴질랜드에는 초지관리에 대한 지식이 많아 도움이 됐습니다. 타조는 또 스트레스가 극약입니다. 시속 60km로 달리는 놈들이라 넓은 공간이 필요하죠. 자연에서 편하게 맘껏 뛰어놀 수 있게 해야 좋은 품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국은 땅값이 비싸 그런 넓은 땅 구하기도 쉽지 않겠죠."

타조 고기를 생산하면서 그는 브랜드를
고민했다.

그냥 오스트리치 미트라고 하면 안될 것 같았다.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타조'란 한국식 발음이 쉽고 이해도 빨랐다.

그래서 배씨 농장에서 나오는 타조 고기는 'Tajo'란 브랜드가 찍힌다.

뉴질랜드 타조의 90% 이상을 배씨가 생산해내니 뉴질랜드에선 타조고기는 우리말 그대로 타조라 부른다.

뉴질랜드 고급식당 메뉴판의 타조요리 옆에는 'Tajo'가 명기돼 있고 웨이터도 "타조"하면 다 알아듣는다.

그는 "매년 타조 고기 수요가 급증해 고기를 댈 수가 없을 지경"이라고 했다.

그는 5개년 계획으로 6만 마리로 키울 생각.

"이제 겪을만한 시행착오는 다 겪었다고 생각합니다. 10년의 긴 시간을 겪어 쌓은 노하우가 있어 두렵지 않습니다."

그는 청년 실업 때문에 힘들어하는 고국의 젊은이들에게 과감히 외국으로 나갈 것을 권고했다.

"IT만큼이나 1차 산업이 미래의 주요 산업이 될 것입니다. 외국에 눈을 돌리세요.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

 

밝게 웃는 부탄 어린이들

 

 

 

 

과연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히말라야 산자락에 있는 부탄은  인구 65만 명, 1인당 국민소득이 1,200달러다.
이 작은 나라가 요즘 각국 국민 행복도 조사에서 단골로 상위 랭킹에 오른다.
왕추크 국왕은 국내 총생산(GDP)이 아닌 국민 총행복(GNH) 지수를 높이는 걸 국정 목표로 삼았다.
'숲을 최소한 국토의 60%로 유지해야 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넣었다.
교육과 의료에 예산을 쏟아부었다.
1984~98년 14년 사이 평균 수명이 19년 늘었다.
국왕이 숲속 나무집에서 살 정도니 보통사람이 남과 비교해 내가 잘사니 못사니 초조할 일도 없다. 
 

 

꼬스따 리까 해안


중남미 꼬스따 리까는 국민소득 6,500달러다.
도로는 우리 1960년대를 연상시키고 건물들은 낡았다.
그런데도 돈 싸들고 이민 온 미국계 은퇴자가 10만 명이 넘는다.
영화 '주라기공원'을 찍을 만큼 잘 보존된 자연, 돈이 많이 없어도 편하게 오래 살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작년 영국 신 경제 재단은 꼬스따 리까를 '살기 좋은 나라' 1위에 올려놓았다.
 

 

신나는 전통 멕시코 춤 

 
개인이나 나라나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전 영국 뉴사이언티스트지(誌)가 79개국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나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굶주림에 허덕일 것 같던 아프리카 나이지리아가 1위, 멕시코와 베네수엘라가 2·3위였다.
 
뉴욕타임스는 2005년 특집에서 부탄을 예로 들며 '국민의 행복도를 평가할 때 경제성장 말고 다른 기준이 필요해졌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여인의 해맑은 미소 


갤럽이 행한 최근 155개국 국민의 행복도 조사에서 덴마크가 
1위로 나타났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인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이 그 뒤를 이었다.
덴마크는 엄마가 아이를 낳으면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라는 팸플릿을 주는 나라다.
사회 전체가 보살피고 잘 키워갈 아이라는 뜻이다.
세금을 내는 만큼 나라가 많은 일을 해준다는 믿음이 국민을 행복하게 한다.

 

 

짱짱이 성님이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늘... 

 

한국의 GDP는 1970년대에 비해 수백 배 늘었지만 국민생활만족도는 여전히 50위권 밖을 맴돈다.

국민이 열심히 땀 흘린 만큼 국가가 행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개인의 행복은 자족(自足)하는 마음으로 어느 정도 채울 수 있다지만 국민 다수의 행복은 누가 보장해야 하는가.

 

출처 : 캄보디아 교민 신문

 

 

 

 

 

Posted by 행복자
,
사진

 

 

 

즐기면서 살고 싶어

 

 

낯선 곳을 여행하다가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짜릿한 상상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일수록 더욱 가슴을 뛰게 한다.

짐이 그랬다.

미국인인 그가 스페인 땅을 처음 밟은 건 스물다섯 살 때였다.

마드리드는 그의 고향 캘리포니아와 다른 별세계였다.

스페인사람들은 점심식사를 오랫동안 즐기고 시에스타라는 낮잠을 잤다.

저녁을 먹고는 매일 음악과 함께 춤을 추었다.

일과 성공, 돈이나 명예보다 문화와 삶을 즐기는 스페인이 짐에게는 천국 같았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마드리드에 눌러앉았다.

 

짐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얼마 전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때 숙소에서 만난 이가 가까운 곳에 괜찮은 재즈 바가 있으니 가보라고 했다.

짐은 그곳에서 열정적으로 트럼본과 색소폰을 불었고, 그가 이끄는 밴드 '까날 스뜨리뜨' 연주자들도 각각 기타와 피아노, 드럼 등을 열심히 연주했다.

모두 칠십 전후의 악사였지만 정말 멋진 음악을 들려주었다.

나는 단박에 반해서 새벽까지 연주를 들었고, 마드리드에 머무는 동안 매일 그곳에 들렀다.

 

어느 날 악기를 정리하는 짐을 보고 짧은 스페인어로 칭찬하려고 더듬댔다.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영어할 줄 알면 영어로 말해요. 난 미국인이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트럼본을 불었다는 그는 미 공군 군악대에 입대했다.

스페인에 몇 주 동안 파견 근무차 왔단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열정적인 마드리드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다 때려치우고 여기서 살 수 없을까?'라는 상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짐은 마드리드 대학 콘서트 장을 찾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밴드 음악이 좀 이상했다.

사회자가 트럼본 연주자가 못 나와서 하모니가 안 나와 미안하다고 설명했다.

무슨 용기였을까?

짐은 트럼본을 들고 무대로 걸어나갔다.

그들은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난생 처음 만난 다섯 젊은이.

단 한 번의 리허설도 없는 합주였지만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도대체 이 자연스러운 의기투합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무대에서 내려오면서 짐은 예감했다.

"나 여기서 살게 될지도 몰라..."

예감은 현실대로 됐다.

그날 운명처럼 만난 젊은이들이 43년 동안 같은 무대에 서고 있으니... 

 

 

 

'왜 저런 훌륭한 실력으로 이 작은 카페에서 연주할까?'라고 망설이다가 묻자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까날 스뜨리뜨'는 스페인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유명한 재즈 밴드란다.

큰 무대에도 많이 서봤고, 국가 행사에도 많이 불려갔지만 관객과 소통하며 즉흥적인 연주를 할 수 있는 이런 작은 무대를 더 좋아한다고 한다.

"솔직히 큰 무대는 엄숙하잖아요. 재즈 카페에서 연주하면 중간에 술도 한잔하고, 관객과 농담도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으니까요."

 

짐이 스페인에 눌러앉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이다.

평생 노래하고 춤추며 좋은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웃고 싶어서란다.

 

우리는 인생의 고민을 사서 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갑자기 다른 나라에 가서 트럼본을 불며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우리 어깨에 힘 좀 빼고 좀 더 즐기면서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글 : 방송작가 김수정 님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