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백악관에서 생활하는 두 딸에 엄격한 생활 지침이 화제다.

그녀는 두 딸 말리아(14)와 사샤(11)의 언론 노출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면서 이들이 보통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고 종종 밝혀 왔다.

미국 포털 야후뉴스는 말리아와 사샤가 어머니로부터 받는 교육, 훈련이 보통의 수준을 넘어선다며 이를 소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는 가야 한다'가 그 첫째다.

말리아와 사샤는 지난 6일 밤 자정 가까운 시각까지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엄마 아빠와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밤사이 워싱턴DC로 520㎞를 날아가 다음 날 아침 7시에 등교했다.

 

 

 


미셸은 딸들의 텔레비전과 컴퓨터 사용 시간을 엄격히 통제한다.

텔레비전은 주말에만 볼 수 있다.

평일엔 학교 숙제나 교육의 일부로 보는 것을 제외하면 텔레비전을 일절 못 본다.

그녀는 '주말에도 야외활동을 많이 해 텔레비전 볼 시간을 최소화한다.'고 말했다.

컴퓨터 사용 또한 숙제를 하는 시간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번 달 고등학생이 된 말리아는 휴대폰을 주말에만 사용할 수 있다.

운동은 두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이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엄마가 골라준다.

미셸은 '일부러 아이들이 어려워할 운동을 골라 고생하면서 터득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고 말했다.

또 무엇이든 한번 배우기 시작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뭔가 배우는 게 힘들어지면 그때부터 진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라며 포기하지 않게 한다.

실제로 말리아는 테니스를 배우기 싫어했으나 지금은 학교 대표 선수로 선발될 정도의 실력이 됐다고 야후뉴스는 전했다.

 

 

 


두 딸은 대통령인 아버지 덕분에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는데, 어디든 다녀오면 보고 배운 것에 대해 리포트를 작성해야 한다.

가사를 담당하는 집사들이 있지만 말리아와 사샤는 스스로 잠자리를 정리하고 자기 방을 청소해야 한다.

식사 때는 꼭 채소를 먹어야 하며 과자는 식사를 다 마친 후에만 먹을 수 있다.

말리아와 사샤가 따라야 할 지침들은 대부분 미셸의 교육 방침이다.

퍼스트레이디로서 바쁜 일정인 그녀는 '대통령의 딸이라고 해서 작은 공주님들이 아니다. 책임감과 경쟁력을 길러줘야 한다. 그리고 두 딸이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여성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엄마가 항상 곁에 있어주지 않아도 제 몫을 다 하는 학생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참모들은 '우리 자녀도 미셸에게 보내 교육시키고 싶다.'고 말한다고 야후뉴스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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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졸업 연설문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여러분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 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왜 자퇴했을까요?

 

그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친어머니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 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면 변호사 가정에 입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자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이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물론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이어서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 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17년 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학비가 아주 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께서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후에 보니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자퇴한 순간, 흥미 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관심 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하나에 5센트 하는 코카콜라 빈 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또, 매주 일요일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곳곳에 붙어 있는 포스터와 상표들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 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지를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 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금방 매료되었습니다.

 

 

 

 

 

이런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 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 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 지어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드(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천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 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당하다니!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1년 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저는 인생의 초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 했습니다.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 사건 탓에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 중 어떤 한 가지도 겪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독하고 쓰디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 봅니다.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 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노동은 인생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 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세 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길에 서 있을 것이다.

이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없어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는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 의사들은 악성 췌장암으로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 동안 해줄 수 있는 것을 단 몇 달 안에 다 해치워야 된다는 말이었고 임종할 때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 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지는 않죠.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지금의 여러분은 그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멀지않은 때에 여러분도 우리 윗대가 그랬듯이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 할 것입니다.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말고 즐겁게 사십시오.

감사합니다.

 

 

 

 

My way, Frank Sina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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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 강홍빈(66) 서울역사박물관장은 박 대통령의 행정수도건설 계획에 참여했던

도시설계 전문가로 서울시 부시장을 지냈다.

 

 

67세 방송 데뷔, 70세 화단 입문, 88세 산문집… '나는 내 나이가 좋다.'

 

열두 살, 그녀의 꿈은 의사였다.

순백색 가운을 입고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돌보리라 다짐했다.

책으로 뒤덮인 부친의 서재에서는 더 큰 세계로의 비상을 꿈꿨다.

야밤에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고모를 동경했다.

그런 딸에게 아버지는 금독령을 내렸다.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했다.

대신 바느질과 살림을 배웠다.

태평양전쟁 한창이던 시절, 11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 출가해 대식구를 건사하는 동안 그녀의 꿈과 이름 석 자는 까맣게 잊혔다.

사람들 몇은 이광수 소설 '흙'의 실제 모델이었던 계몽운동가 이종준의 맏딸로 그녀를 기억한다.

누구는 원효 연구에 일가견이 있는 이기영과 분석심리학의 대가인 이부영의 누이로 알고, 또 누구는 한국 알레르기학계의 명의로 이름을 날린 강석영의 아내로만 그녀를 기억한다.

그렇게 영원히 잊힐 뻔한 이름을 건져 올린 건, 이기옥 자신이었다.

67세에 방송에 데뷔하고, 70세에 화단에 입문했다.

얼마 전엔 '나는 내 나이가 좋다.'라는 산문집을 펴냈다.

인생에 대한 통찰, 곰삭은 연민으로 가득한 문장들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온 무명 여인의 삶에서 길어올린 것이었다.

 

 

"나도 젊었을 땐 '노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지?' 궁금했다우. 한데 늙어보니 노인으로 사는 재미가 참 좋아요. 수능 시험 본다고 맘 졸이게 하는 자식 없고, 취직 안 되고 장가 못 간다고 걱정시키는 아들 없고요. 건방지게도, 난 절대 추하게 늙지 않고 남들이 아깝다며 섭섭해할 때 세상 떠야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니에요. 구십을 앞둔 왕 노인이 되니 사물의 이치가 보이고, 사람의 마음이 보여요. 욕심 다 내려놓은 홀가분한 평화가 있어 좋아요."

그래도 여인이라, 책 곳곳에 육신의 노쇠에서 오는 절망감을 드러내셨는데...

"가다가다 거울에 비치는 모습이 사람 같지 않지요. 말려든 눈언저리, 갈퀴 같은 손…. 가느다란 손끝이 재간 있어 보인다던 섬세한 손이었는데,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받아들여요. '그래도 아직 눈이 보이잖아?' 하면서."

이번이 첫 책이 아닙니다.

일본 작가 소노 아야코의 수필집 '계로록(戒老錄)'을 '아름답게 늙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셨지요.

"예순한 살 때예요. 남편 학회 일로 교토에 따라갔다가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지요. '나이 든 사람들이 조심하고 지켜야 할 사항'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데요. 세상에 내놓을 요량은 아니었고, 함께 늙어가는 딸과 며느리에게 선물로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우리말로 옮겨봤지요."

 

 

언제나 청춘 녹화장면

 


그 번역서가 계기가 되어 KBS 라디오 '언제나 청춘'이란 프로에 데뷔합니다. 

'이기옥의 5분 칼럼'을 3년 넘게 방송하셨지요.

"그거 할 땐 목에다가 메모지를 아예 걸고 다녔어요. 버스 안에서, 노인정에서 또래 노인들 관찰하고 이야기 동냥해서 밤낮으로 썼지요. 평생 처음으로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하는 것이니 참 열심히 했지요. 데이트하자는 남자도 있었으니깐."

아름답게 늙는 지혜 한 가지만 일러주시지요.

"젊은이들에게 잔소리하지 않는 거요. 그들이 겪어보지 않은 얘기를 자꾸 할 이유가 없어요. 뒤는 산이 되든 바다가 되든, 저희끼리 알아서 살게 놔두고,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양 열심히 사는 거예요."

글쓰기는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30대 중반이었나 봐요. 11남매의 맏며느리라는 굴레가 씌워졌는데 그에 걸맞은 넉넉함도, 처세도, 언변도 없으니 힘겨울 때마다 메모하듯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말로는 쏟아낼 수 없는 감정을 깨알같이 써내려가면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꿈을 이루지 못한 울분이었을까요?

"전문직 여성들에 대한 부러움이 늘 있었어요. 농촌계몽에 뛰어든 아버지의 그늘에서 평생 노동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처럼 내 안에 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매사에 솜으로 싼 듯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말하는 게 일본식 교육이라 속엣것을 마음껏 분출하질 못했어요."

소설습작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젊어서 쓴 건 남편이 다 찢어버렸어요. 하필 서랍에 숨겨놨던 신춘문예 습작을 들켰지요.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60살이 훨씬 넘어서예요. 이호철 선생 문하에 들어가 소설작법 배웠죠. 강의 첫마디가 '소설은 다 거짓말이다.'였어요. 참 솔직하지요? 글을 쓰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넓어지고 세밀해져요. 버스를 타도 승객들의 앉음새며 음성, 표정까지 세세히 살피게 되고요. 재미있지요."

 

신춘문예의 꿈은 아직 갖고 계십니까.

"설마요. 빠르게 변화하는 요즘 문학 장르를 내가 따라갈 리 만무하지요. 작품을 썼다면 '박완서' 식으로 썼겠다 싶어요. 내가 보고 겪은 근현대사에 조금만 허구를 가미하면 한 권의 소설 충분히 되지요. 나 어릴 적 우리 집 사랑채엔 새벽이면 낯선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할아버지 혼자 그들을 맞았지요.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눈을 피해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거였어요. 할머니에게선 노상 동학 난 이야기를 들었어요. 피란길 한길에서 제 아버지를 낳으셨대요. 그런 이야기들…. 내가 쓰기는 글렀고, 누가 소설로 써보겠다면 그 이야기 들려 드릴 용의는 있어요."

그녀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조양의숙을 세워 농촌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던 황해도 봉산의 지주이자 독립운동가였다.

부친인 이종준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형 출판사인 한성도서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성도서는 심훈의 '상록수',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기', 김동환의 '국경의 밤',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등 당대 문학가들의 저서를 출간했다.

고향인 황해도 봉산으로 낙향한 뒤에는 봉산농사학교를 세워 여생을 농촌계몽에 헌신했다.

이광수 소설 '흙'에 등장하는 주인공 허숭의 실제 모델이 이종준이다.

 

 


이광수의 소설 '흙'의 모티브가 부친인 이종준 선생의 삶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나중에 고모들이 알려줬지, 소설 읽을 땐 몰랐어요. 애정관계가 복잡해서 뭐 이런 소설이 있어, 외려 불평을 했지요. 난 심훈의 '상록수'가 훨씬 좋았어요."

아버지 이종준은 어떤 분이었나요.

"만날 작업복만 입고 사셨어요. 다른 친구분들처럼 반듯한 양복 한 벌 갖춰 입은 모습 못 봤지요. 여성이 눈을 떠야 우리나라가 발전한다며, 봉산 내려와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글 가르친 거예요. 전국에서 우리 마을이 문맹률 가장 낮았지요. 한성도서 일도 열심이셨지만 도통 수익이 나질 않아서 할아버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그놈의 회사는 올해도 달력이랑 책만 보내는 거냐? 올해에도 또 땅을 팔아야 하는 거냐?'"

이광수 선생의 친일행적을 두고 논란이 컸는데 이종준 선생은 어떤 입장이셨나요.

"그때는 이미 봉산에 내려와 농사교육에 전념하실 때라 특별한 언급은 안 하신 걸로 알아요. 다만 화재로 쑥대밭이 된 한성도서를 다시 일으키려면 베스트셀러인 '흙'을 다시 찍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아버지를 비롯한 창립멤버들이 반대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계몽운동, 개화운동에 앞장서신 분이 딸의 출세를 막으신 건 의외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처럼 될까 봐. 자기 딸들은 남편 보필하고 가정 잘 다스리는 현모양처로 살길 바라셨어요."

 

 

 

 

 

 


가부장이셨군요.

"밥 먹을 때 오빠는 할아버지와 겸상을 하고, 남동생은 할머니와 겸상을 해요. 어머니와 딸들은 둥그런 밥상에 둘러앉고 그 가운데 아버지가 앉으시고. 곁눈질해 보면 오빠 상에는 장조림, 굴비 같은 반찬들이 올라 있어요. '삼국유사'도 오빠에게만 가르쳐주시니 서러웠지요."

그 오빠라는 분이 원효 연구에 일가를 이루셨다는 이기영 박사인가요?

"우리 집안의 둘도 없는 대들보지요. 늦게 본 아들이라 집안에서 왕이었고, 공부까지 잘하니 고모들도 오빠를 떠받들었어요. 프랑스 유학 중 불교에 심취한 뒤로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어머니와 갈등이 많았어요. 96년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빈소에 예배와 불공이 번갈아가며 이뤄졌을 정도였으니까."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간 고모 이선행을 동경하셨죠.

"담이 큰 고모가 혼수비용 미리 받아내서 큰일을 도모한 거죠. 미국 가서는 군관학교 다니던 최윤호 박사 만나 결혼했고 이승만, 조병옥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지요. 단발머리에 야무진 표정의 고모 사진을 자주 들여다봤어요. 고향에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가 고모를 돌아보지 않으셨대요. 최윤호 박사는 항일운동하시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돼 옥사하셨고 소생이 없던 고모는 혼자 사셨고요. 소련군, 나중엔 인민군 눈을 피하려고 촌부 행색을 하셨는데 워낙 세련된 자태라 고모는 그게 잘 안됐어요."

신여성이었던 어머님께서 마음고생을 좀 하셨겠어요.

"아버지를 도와 눈만 뜨면 치맛자락에 불이 나도록 일만 하셨으니까요. 미국 고모와 동기 동창이라 열등감 같은 게 있었을 거예요. 그래도 나중엔 고모가 엄마를 부러워했어요. 인생이 그래요."

아버님께서 결국은 시집간 맏딸의 집에서 짧은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일본 패망 후 소련군이 진주해 들어오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됐지요. 출산하러 친정에 가 있던 나는 갓난아기를 둘러업고 38선 꽝꽝 언 갯벌을 버선발로 넘어왔고, 소련군들에게 강간당하지 않으려고 여동생들은 머리를 박박 깎아 남장하고 다녔어요. 아버지의 충격이 제일 컸지요. 소련군이 아버지가 애써 지은 학교 강당을 통째로 허물어서 그 목재로 모닥불을 피웠거든요. 그 무렵 서울의 한성도서는 원인 모를 화재로 타 없어져 아버지의 일생이 송두리째 무너져내린 거예요.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나셨지요. 비운의 역사 한가운데 계셨어요."

의사가 되지 못하고, 의사와 결혼했습니다.

"의사는 학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님께서 두 딸을 의사에게 시집 보냈어요. 태평양전쟁 중이라 식도 못 올리고 몸뻬 차림으로 기차를 탔지요. 스무 명 넘는 식구들 우글대는 시댁으로 들어서는데, '아, 내가 잘못 왔구나.' 싶더라고요."

 

 


한국전쟁은 무사히 넘기셨나요.

"한강 다리가 끊겨 피란을 못 가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고지식한 남편은 서울대학병원으로 일하러 갔는데, 그 양반이야말로 전쟁을 호되게 치렀어요. 처음엔 국군 부상병을 치료했겠지요. 하지만 인민군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었어요. 병상의 국군들이 사살되는 장면, 동료 교수들이 빨간 완장을 차고 다니는 모습. 부상당한 인민군을 치료하는데 죄다 앳된 소년들이더래요.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됐을 땐 하수도관으로 숨어 병원을 탈출했어요. 거기 남아 있으면 납북될 게 뻔하니까."

인민재판도 보셨나요?

"내가 칸나 꽃을 싫어해요. 섬뜩해요. 인민재판을 한 그 자리에 핏빛으로 붉은 칸나 꽃이 피어 있었어요. 어떤 아들은 아버지를 살려내는 조건으로 자기가 의용군에 자원해 갔지요. 아버지는 살았지만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리 손주들에겐 대물림되어서는 안 될 역사의 비극이에요."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란 갔다가 환도는 홀몸으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남편은 언제고 자기 연구가 우선인 사람이었어요. 피란 시절 나라에서 일본 유학을 허락한다는 발표가 나자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애들과 나만 남겨두고 비행기를 탄 사람이에요. '우린 뭐 먹고 살아요?' 하니까 아버님께 맡긴 돈 있으니 그리로 가래요. 기가 막히지요. 서울로 왔더니 생판 모르는 사람이 우리 집을 차지하고 있어요. 눈물로 호소해서 겨우 돌려받았어요."

서울대가 펴낸 '한국의학인물사'에 부군인 강석영 박사가 소개돼 있습니다.

"업적은 대단했던가 봐요. 엊그제도 사촌 시동생이랑 남편 이야기를 하는데 '그래도 형님이 환자는 잘 고치셨죠.' 하대요. 온화한 듯 보여도 외골수에 불같은 성격이라 제자들이 벌벌 떨었어요. 학문적으로는 만점이지요. 그런데 가정엔 도통 관심이 없어요. 자기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고 바쁘니까. 무거운 장바구니 한 번 받아준 적 없는 남자예요."

심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60대이니 너무 빨리 갔지요. 작별인사도 못 하고 황망히 갔어요. 우리 남동생이 그래요. 매형이 누나를 너무 잡고 살아서 이젠 놓아줘야겠다 하시고 일찍 떠난 것 같대요."

"인생은 강물 같은 것,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보듬고 망망한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것, 나는 그 강물 어디쯤에서 이 글을 쓰고 있을까?('나는 내 나이가 좋다.' 중에서)"
그러고 보니 부군이 돌아가신 뒤 방송과 그림, 글쓰기를 본격화하셨네요.

"혼자서도 재미있게 살아요. 자립심이 강 박사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이지요."

 

 

 


94년부터는 그림을 그립니다.

한국야외수채화회 회원으로 전시도 하셨고요.

왜 하필 수채화였나요?

"물맛이 좋아서요. 맑게 번지는 그 맛이 좋아요. 근데 마음대로 안돼요. 그림이 잘 되었다 싶으면 손을 딱 떼야 하는데, 더 잘할 욕심에 붓을 한 번 더 칠하게 되고, 그러면 떡칠이 되고 말지요. 인생사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20여 년 그려온 작품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셨습니다.

"지나온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추억의 그림 보따리예요. 누구는 개인전을 열라고 하지만 민폐지요. 다행히 내 그림을 받아주는 데가 있어서 고맙게 내놓은 거예요."

어찌 보면 그 세대 다른 분들에 비해 풍족하고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그럼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만큼 축복받은 노인네지요. 아직 내 발로 걸어 장을 보러 가고, 아직 간을 맞출 수 있고, 아직 바느질할 줄 하니 그 또한 감사하고요. 다시 태어난다 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할머니로 사는 걸 택할지도 모르겠어요. 바보 같지요?"

소망은 무엇입니까?

"결코 현역이 될 수 없는 나이예요. 무대의 막은 내렸고, 휘장 뒤에서 조용히 내 몫을 해야 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해요. 몸이 아프면 아픈 대로, 마음이 외로우면 또 외로운 대로 그것을 극복하는 의지가 있다면 우리 또한 저 성성한 솔잎을 이고 몇백 년을 늙어가는 노송의 위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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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아들의 죽음과 자폐증, 암 그리고 실명... 다시 태어나다

 

 

이민아 변호사가 '땅끝의 아이들'이란 책을 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그동안 이민아를 대신해주던 많은 수식어를 이제는 내려놓아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없을 만큼, 험난했던 인생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에는 험난한 인생의 비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아픔과 죽도록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혼, 싱글맘의 고통, 세 차례에 걸친 암 수술, 멀쩡했던 26세 아들의 죽음 그리고 둘째 아이의 자폐 진단...

그녀의 고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기 싫어서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야 했던 외로운 소녀, 이민아.

늘 아버지 체면과 명성의 그늘에 살아야 했던 그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텅 비어 껍데기만 있는 달팽이와 같았다.'라고 말한다.

바쁘고 피곤한 아버지는 품속에 안기려는 딸을 밀쳐냈고, 늘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녀는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철없는 생각을 했다.

중학생 때 밤에 잠이 안 올 때면 아버지 서재에 몰래 들어가 위스키를 훔쳐 먹기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자기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참 좋았다. 존경스러운 게 아니라 그냥 좋았다. 일에 대한 무한한 열정이 있었고, 돈을 많이 벌려고 일을 하신 적이 없다. 창조, 새로운 지식을 알고 배우는 것, 가르치는 것을 즐거워하셨다. 아버지와 나 둘 다 완벽주의자다. 아버지처럼 문학을 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책도 엄청나게 읽는다. 토씨 하나 잘못된 문장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의 집은 언제나 질서가 있고 안전했다. 뭐든지 잘하셨고 빈틈이 없었다. 속옷은 한국 면이 최고라며 지금까지도 직접 딸의 속옷을 사서 부치는 분이다.”


남들이 볼 때 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다.

이어령 교수, 강인숙 건국대 교수의 1녀2남 중 맏이로 태어난 이민아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조기졸업한 수재였다.

그런 그녀가 1981년 졸업하자마자 무명의 청년작가 김한길과 미국으로 떠났다. 

걱정하는 부모의 눈길도 뿌리친 채 정말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와 새로운 삶을 꿈꿨다.

 

 

 

"나의 부모님은 한국 부모로서 거의 완벽한 분들이었다. 문제는 사랑에 대한 어른과 아이의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작가, 교수, 논설위원 등 3개 이상의 직함을 가지고 살며 늘 바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 그 팔에 매달려 사랑받고 싶은 딸이었는데, 배고프고 피곤한 아버지는 ‘밥 좀 먹자’ 하면서 나를 밀쳐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조기 졸업하고 죽을 만큼 사랑한 남자, 작가 김한길과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을 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저는 참, 말을 잘 듣던 아이였어요. 마음이 약해서 반항을 못했어요. 그런데 언젠가는 아이가 부모의 곁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때의 진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기가 어려울 만큼 마음이 약해서 자신의 영역을 설정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문제였던 거죠. 제가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했던 것이 바로 남편을 선택하는 일이었죠."

가진 것 없는 학생 부부의 생활은 빠듯했다.

당시에는 유학생의 공식적인 취업이 금지되던 때라 남들이 다 꺼리는 일밖에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은 고되기만 했다.
그 와중에 첫째 아들 유진이가 태어났고, 이민아는 아이를 키우며 헤이팅스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다.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제가 한 선택이 잘한 것이라는 걸 아버지께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힘들다는 사실조차 이야기할 수가 없었어요. 부부가 있어요. 남편은 주말에 차고를 깨끗이 청소하며 부인의 가사를 돕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인은 주말만이라도 남편과 손잡고 바닷가를 거니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소한 어긋남이 쌓여 파경으로 치닫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입니다. 그걸 몰라서 남편과 힘들었어요. ‘여보 내가 맛있는 거 해놨어.’ 하면 ‘나 지금 밥 먹을 기운 없어.’ 하고, ‘나랑 얘기 좀 해, 나 안 좋아?’ 하면 ‘왜 이렇게 귀찮게 해!’ 하면서 음성이 높아졌어요. 그러면 어릴 때 아버지가 ‘원고 마감시간이야, 얘 좀 데려가!’ 하고 소리질렀을 때처럼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김한길과의 첫 결혼에 실패했다.

책에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한 사랑이었다’고 썼다.
4년간 지속된 결혼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아버지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첫사랑에서 찾았다고 착각했다. 이것만 있으면 딴 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고 믿고 미국으로 왔는데 그 남자의 세계 또한 나와는 단절돼 있더라. 스물두 살, 너무 어리고 철이 없을 때이기도 했다. 말도 안 통하는 미국에서 아이 낳고 공부도 하고 돈도 벌어야 하니 죽을 맛이었다. 흑인들도 마다하는 일자리, 밤을 새우는 주유소 일을 최소 일당을 받으며 했고 낮에는 햄버거 가게에서 일했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남편은 자존심에 더욱 이를 악물었을 테고 그러면서 서로에게 지쳐갔다."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할 때까지 아버지에게 투정 한 번 안 하던 이민아는 이혼하자마자 아버지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결국 아버지를 망신시킨 딸이 된 것 같아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런데 이혼하고 돌아온 딸에게 화를 낼 줄 알았던 아버지는 '애가 말랐다. 밥 좀 먹여.'라는 말로 마음을 대신했다.

그때 이민아 변호사는 자신이 지금껏 아버지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년간 쌓여왔던 오해와 거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것은 계속 만들어가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기본적인 신뢰와 내 딸이 나를 존경한다는 기본적인 토대가 가장 중요해요. 실패 속에서 약해졌던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원망은 없었을까?
“전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유진이를 함께 낳았고, 아들에겐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 유진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로서 최선의 역할을 다한 사람이다. 나는 결혼이 언약이라는 것을 몰랐다. 많은 젊은이들이 연애지상주의에 젖어 있는데, 나 또한 그랬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사랑이 식었는데 억지로 맞춰서 사는 것은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문화적인 거짓말에 속았고 자기애도 강했다.”


이혼 후 이민아 변호사는 공부를 계속했다.

아이를 헤이팅스 로스쿨에 부속된 탁아소 겸 학교에 맡겨놓고 공부를 했다.

"저에게는 고아 멘털리티가 있었어요. 싱글맘으로 3년 동안 일하고 공부하고 아이를 돌보는 걸 혼자서 해내야 했거든요. 내가 돈을 안 벌면 우리 둘은 굶어 죽겠지, 내가 잘못하면 우리는 끝나 하면서 저는 유진이만 쳐다보고 유진이도 저만 바라봤죠. 저의 아픔과 짐을 수없이 아이에게 보여주었기에 아이가 힘들어했던 것 같아요."

이민아 변호사는 본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 보니 편두통, 위궤양, 요통, 불면증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진이가 16세가 됐을 무렵 아이도, 이민아 자신도 더는 버틸 힘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제자리에 돌아오기까지 1년간 요란한 사춘기를 보냈다.

그 외에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아이. 

버클리 대학을 졸업한 IQ 159의 똑똑하고 멋있는 청년이었던 유진이는 26세 되던 해 여름, 갑자기 쓰러져 코마 상태에 빠진 뒤 19일 만에 병명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저에게는 가장 뜨거운 불이었어요. 장례식 이후 꼬박 3년을 울었어요. 1년은 거의 매일 울었고요. 3개월 동안은 아예 침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이불 속에서 울기만 했어요. 하늘을 믿을 수 없었고,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매일 울면서 신을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 가득한 마음으로 유진이 또래의 비행 청소년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게 됐다.

떠밀리듯 그 아이들을 만났다.

신기한 것은 그 아이들을 유진이를 사랑했던 마음으로 돌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전에도 검사, 변호사로 일하면서 청소년 문제 상담활동을 열심히 해왔지만 내 아이와 다른 아이를 가르는 벽이 내 마음에 있었다.

유진이가 죽은 뒤 그 벽이 엷어진 거다.

아이들을 엄마의 사랑으로 품어주었더니 변하기 시작하더라.

술과 마약을 끊고 부모에게 돌아가더라.

서른 명의 아이들이 나를 '마마미나'로 불렀다.

유진이가 그리워 내가 울면 아이들이 나를 안고 기도해줬다.

유진이의 죽음이 한알의 밀알로 내 가슴에 떨어져 이기적이었던 나를 세상의 어머니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게 이민아 변호사는 침대 밖, 세상 속으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유진이가 떠나던 해인 2009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마약과 술에 빠진 청소년 구제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2월, 이민아 변호사는 국내에서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안경이나 렌즈 없이 밝은 세상을 보고 있지만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왔다.

안경으로는 교정되지 않을 만큼 고도근시였던 그녀는 렌즈를 껴도 운전을 겨우 할 만큼 시력이 좋지 않았다.

평생을 렌즈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늘 망막 손상의 위험이 있었고, 이미 렌즈에 닳고 닳아 의사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도 여러 번 들었다.

자칫 망막이 찢어지면 영구적으로 복구할 수가 없고 점차 앞을 보지 못해 실명한다는 것이었다.

재혼한 후 낳은 둘째 아들이 자폐 진단을 받은 것은 이때 즈음이었다.

열두 살이 되도록 아이는 엄마의 지시를 이해하거나 따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하와이로 건너가 특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미 초등학교를 다섯 번이나 옮겼고 중학교도 1년을 다니다가 쫓겨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재정 상태가 좋지 않던 하와이 크리스찬 스쿨은 개인적인 관리가 필요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신 그녀가 상근 보조교사로 일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제가 단순한 작업을 잘 못해요. 학교에서 제가 하는 일이 주로 채점이었는데, 자꾸 틀리니까 선생이 보기엔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나 봐요. 변호사라는 여자가 단순한 채점도 제대로 못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거죠. 저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제가 괘씸하게 보였는지 점점 일거리가 많아졌어요. 그때 좋지 않은 눈으로 엄청난 양의 채점을 해야 했기에 눈에 큰 무리가 왔어요."

하지만 엄마의 정성이 통했는지 1년이 흐르자 둘째의 자폐 증세가 기적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폐증은 불치병에 가까워 회복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둘째 아이는 이제 운전도 하고 일반적인 생활도 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이민아에게는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망막박리 현상이 일어나 거의 앞을 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수술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이민아는 물론 이어령 교수 부부도 절망에 빠졌다. 

이어령 교수는 딸이 볼 수만 있으면 신을 믿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민아 변호사는 망막박리 7개월 만에 찢어진 망막이 다시 붙는 기적을 경험했으나 다시 앞이 보이지 않아 병원에 찾아갔을 때 백내장 진단을 받고 현재는 수술한 후 양쪽 눈 시력을 모두 회복했다.

"셋째와 넷째는 첫째와 둘째 탓에 흘리고 뿌린 눈물이 선물로 준 아이들이에요. 둘째가 19살, 셋째가 17살, 넷째가 15살이에요. 첫째가 유난스러운 사춘기를 보낸 터라 아이 셋이 모두 10대가 되는 때를 무척 두려워했는데, 이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어요. 참 착한 아이들이에요."

 

아이 넷 수월하게 키워보려고 미합중국에서 공무원인 검사를 10년 했는데, 남을 정죄하는 직업이 점점 힘들어졌다.

그 무렵 한인교회 목사님으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 같은데 이 검사에게 그 소년 변호 좀 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검사라서 맡을 수 없다고 했더니 사직을 해서라도 맡아달라고 했다.

아이를 한 번만 보고 오자고 했다가 코가 꿰여서 변호사가 된 셈이다.

 

아이들이 술과 마약에 취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다.

그녀도 처음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가 대부분 건실한 사람이었고 자식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를 변호사로 이직하게 한 K라는 아이만 해도 부모에게서 상처받을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는데 엄마 아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뛰쳐나갔다.

그건 ‘사랑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받아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한다’고 말해줘야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사랑은 이렇듯 구체적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한다’고 느끼게 해주면 폭력과 어둠의 세계에 빠져 있던 아이들도 울면서 부모의 품에 안긴다.

 

 

 


사실 이민아 변호사는 세 번의 암 수술로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었다.

갑상선암의 사망률은 극히 낮지만 재발로 심신이 쇠약해진 것이 사실이다.

사랑의 묘약에 취해 아빠 품을 떠났던 꽃 같은 나이 22세 때부터, 실명 위기에 처했던 때까지, 30년 동안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던 이민아 변호사.

하지만 그녀의 웃음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순수했다.

"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자유와 평화로움을 누려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죽음에 자유로워지면서 사는 게 더 즐거워지고 무서운 것이 없어졌죠. 저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삶에 활력을 얻을 수 있어요."

 

아프리카 케냐에도 간 그녀는 나이로비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을 더 가야 하는 웨브예라는 마을, 그야말로 땅끝인 곳은 샘물이 없고, 오물이 흘러들어온 강물로 밥을 해서 먹는다.

아프지 않은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 배가 다 맹꽁이 배처럼 튀어나왔고, 목욕을 태어나 한 번도 안 했는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아이들이 끌어안는데 역한 냄새가 진동해서 참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거기서 사랑의 위선을 보았다고 했다. 


"내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이 죽을 것 같은 진통 끝에 첫 아이를 낳아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없다. 불 사이를 지나지 않으면 보석은 나오지 않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오늘 죽는다면 오늘이 세상을 떠날 완벽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민아 목사는 인터뷰 다음날 막내딸이 한국에 들어온다며 즐거워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한국에 머물고 있는 엄마의 여정이 길어지자 막내딸이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이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막내딸은 잠시라도 한국에서 학교에 다닐 계획이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글 : 진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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