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20년 전 1억 주고 ‘일본 지도’ 사온 학자

                
           
기자
이지영 기자
 문세광 테러에 대한 일본 책임 묻고
‘을사조약은 국제법상 무효’ 밝혀내
외규장각 ‘조건 없는 반환’ 근거 제시
국제법 연구 통해 국가 자존심 지켜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
이충렬 지음, 김영사
300쪽, 1만4000원
 
한 사람을 아는 것은 한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다. 고(故) 백충현(1938∼2007) 서울대 교수의 전기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국익과 직결된 학문인 국제법의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백 교수는 1961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8∼2004년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학자다. “국가 간의 분쟁은 외교의 힘으로 해결된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외교의 힘은 항상 법적 이론이 뒷받침할 때 비로소 정당한 방법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소신으로 일평생을 국제법 연구에 바쳤다. 그는 화려한 영웅은 아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직업적 소명에 충실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백 교수는 70∼71년 미국 하버드대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국제법 연구가 개발도상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다. 그는 귀국 후 72년 외무부에 근무하는 후배들과 국제법 연구모임을 만들었다. 매주 한 차례 그의 서교동 집은 젊은 외교관들과 대학원생들이 모여 밤늦도록 토론을 이어가는 공부 장소가 됐다. 연구모임의 전문성이 깊어지면서 외교부에서도 국제법이 연관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그의 집으로 찾아와 이론적 대응책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시작했다. 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때도 그랬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총련에 포섭된 문세광이 일본 정부가 발행한 여권을 위조해 한국에 들어와 일본 경찰이 분실한 총으로 저지른 범행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국제법상으로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외교부의 요청을 받은 백 교수는 밤을 새며 자료를 뒤졌다. 마침내 국제법상 모든 국가는 자국의 영토 안에서 외국을 향한 정치적 테러를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들어 일본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논리를 찾았다. 또 타국의 권리에 반하는 행위를 위해 자국 영역의 사용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례도 발견했다. 이는 일본으로부터 “조총련의 반한국적 활동을 규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2년 규장각에서 관장 이태진 교수(맨 오른쪽)와 백충현 교수(맨 왼쪽)는 고종의 서명과 어새 등을 확인하며 일본과 체결한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체결 문서가 국제법상 무효임을 밝혔다. [사진 김영사]

1992년 규장각에서 관장 이태진 교수(맨 오른쪽)와 백충현 교수(맨 왼쪽)는 고종의 서명과 어새 등을 확인하며 일본과 체결한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 체결 문서가 국제법상 무효임을 밝혔다. [사진 김영사]

독도와 외규장각 의궤는 그가 국제법학자로서의 책무를 다해 지켜낸 유산이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독도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국제법적 근거 마련에 나섰다. 또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밝힐 수 있는 결정적 증거인 ‘관판실측일본지도’를 수집했다. ‘관판실측일본지도’는 1870년 메이지 정부가 간행한 지도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백 교수는 97년 이를 도쿄의 고지도 전문점에서 1억 원의 거금을 주고 구입, 한국 땅으로 가져왔다. 또 프랑스의 외규장각 의궤 반환 문제에 대해서는 “프랑스 측이 전시(병인양요)에 한국에서 약탈해간 것이기 때문에 전시국제법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조건 없는 반환”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는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은 65년 한일회담에 의해 소멸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를 국제법 차원에서 명쾌히 밝혔고, 을사조약과 정미7조약은 국왕의 비준서가 없어 국제법상 무효임을 알렸다. 그는 학문으로 국가의 자존심을 지킨 학자였다.
 
그가 맘껏 연구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치과의사인 아내 이명숙(73) 전 연세대 교수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아내가 건네준 목돈으로 그는 연구모임을 서울국제법연구원으로 체계화시켜 운영했고, 또 이를 외교부 산하 재단법인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올해는 백 교수가 뇌출혈로 쓰러져 별세한지 꼭 10년이 되는 해다. 활자로 되살아난 그의 삶이 잔잔하지만 먹먹한 울림을 전한다.
 
[S BOX] 백충현 교수 어린시절 등 사생활은 다루지 않은 까닭
저자 이충렬(63)은 우리 출판계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전기 작가다. 『간송 전형필』(2010)을 시작으로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2012),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2013), 『아, 김수환 추기경』(2016) 등을 펴냈다. 그는 치밀한 취재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모아 한 인물의 삶을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1994년 ‘실천문학’에 단편소설 ‘가깝고도 먼 길’로 등단했던 그가 전기를 쓰게 된 것은 간송의 삶에 매료돼서였다. 혼자 10년 넘게 자료 조사에 매달렸고, 그 결과로 내놓은 『간송 전형필』은 8만부 가까이 팔렸다. 백충현 교수는 그가 외규장각 의궤 환수 과정을 지켜보며 알게 된 인물이다. 그는 “1년 여의 취재를 거친 뒤 ‘사회와 역사에 의미있는 성취를 남긴 학자’란 부분에 초점을 맞춰 책을 썼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등 “평이했던” 사생활 부분은 다루지 않았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20년 전 1억 주고 ‘일본 지도’ 사온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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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교인이 순교한 교회도...개신교 최대 순교지 영광

교회도, 마을도 불에 타... 신안엔 '섬교회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있어

17.03.20 16:34l최종 업데이트 17.03.20 16:34l

 영광 염산교회의 77인 순교 기념비. 한국전쟁 때 전 교인의 4분의 3인 77명이 순교, 한국 개신교의 최대 순교지로 남아있다.
 영광 염산교회의 77인 순교 기념비. 한국전쟁 때 전 교인의 4분의 3인 77명이 순교, 한국 개신교의 최대 순교지로 남아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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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에는 개신교 순교지가 부지기수다. 여수와 순천, 영광과 신안·목포·영암이 중심이다. 여수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도 사랑한 손양원 목사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광군 염산면은 한국 개신교의 최대 순교지로 꼽힌다.

영광군 염산면에 있는 염산교회는 1939년 설립됐다. 한국전쟁 때 77명, 전 교인의 4분의 3이 순교했다. 한국 개신교의 최대 순교지로 남아있다. 죽창에 찔려서, 교회 옆 설도 수문에 무거운 돌멩이를 매단 채 바다에 빠뜨려져 죽었다. 교인들은 죽는 순간까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염산교회에는 예배당 앞에 순교공원이 조성돼 있다. 순교 기념비가 있고, 순교자 합장묘가 있다. 설도항 수문 앞에 순교탑도 있다. 순교자료 전시관, 순교체험관, 시비 '우리는 천국 간다'도 세워져 있다.

 영광 염산교회의 77인 순교기념비와 순교자 합장묘. 염산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최대 순교지다.
 영광 염산교회의 77인 순교기념비와 순교자 합장묘. 염산교회는 한국 개신교의 최대 순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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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 설도항 수문 앞에 세워진 기독교인 순교탑. 탑 뒤로 염산교회 예배당이 보인다.
 영광 설도항 수문 앞에 세워진 기독교인 순교탑. 탑 뒤로 염산교회 예배당이 보인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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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전체가 순교한 교회도 영광에 있다. 염산면 야월리에 있는 야월교회다. 1950년 가을 전 교인 65명이 순교하는 참상이 벌어졌던 곳이다. 염산교회에서처럼 돌멩이를 함께 매달아 설도 앞바다에 던져졌다. 산 채로 땅속 구덩이에 묻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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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교회와 성도들의 집도 불에 탔다. 한 동안 교회도, 교인도 없는 마을이 됐다. 옆 마을 염산교회 청년들이 들어와 복음의 씨앗을 다시 뿌렸다.

야월교회에 순교기념관이 있다. 2009년 문을 열었다. 한국선교와 호남의 기독교 역사, 일제의 탄압과 한국교회, 한국전쟁과 야월교회에 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성경책 등 기독교 고서를 모아놓은 자료실도 있다. 전시물이 알차다.

추모관에서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들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기념관의 상징조형물인 '맞잡은 손'도 애틋하다. 십자가 조각공원도 잘 꾸며져 있다. 1990년에 세워진 순교기념탑도 있다.

 영광 염산 야월교회의 순교 기념공원과 기념관. 야월교회는 1950년 가을 전 교인 65명이 순교하는 참상이 벌어졌던 곳이다.
 영광 염산 야월교회의 순교 기념공원과 기념관. 야월교회는 1950년 가을 전 교인 65명이 순교하는 참상이 벌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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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 야월교회 심재태 목사가 순교기념관에서 야월교회 교인들의 순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야월교회에서는 전 교인 65명이 순교했다.
 영광 야월교회 심재태 목사가 순교기념관에서 야월교회 교인들의 순교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야월교회에서는 전 교인 65명이 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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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에는 '고무신 선교'로 알려진 문준경 전도사가 있다. 한 해에 아홉 켤레의 고무신이 닳을 정도로 선교를 했다. 문 전도사는 100여 곳의 교회를 개척하고, 240명을 교회 지도자의 길로 인도했다. '섬 교회의 어머니'로 불린다.

문 전도사가 1932년 처음 개척한 교회가 임자도 진리교회다. 임자도는 이혼한 남편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자신이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사역자의 길을 가려면 그를 용서해야 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하고 싶었다. 임자도를 첫 개척지로 선택한 이유다.

 신안 증도 증동리교회 전경. '고무신 선교'로 알려진 문준경 전도사가 1933년 개척한 교회다. 교회에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신안 증도 증동리교회 전경. '고무신 선교'로 알려진 문준경 전도사가 1933년 개척한 교회다. 교회에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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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 증도에 들어선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 문준경 전도사는 한 해에 아홉 결레의 고무신이 닳을 정도로 열심히 선교해 ‘고무신 선교’로 알려져 있다.
 신안 증도에 들어선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관. 문준경 전도사는 한 해에 아홉 결레의 고무신이 닳을 정도로 열심히 선교해 ‘고무신 선교’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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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의 교회는 모두 문 전도사가 개척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교회가 1933년 개척한 증동리교회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 기념비가 여기에 세워져 있다. 증도면사무소 옆에 있다. 교회에서 가까운 데에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도 들어섰다.

증도엔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외에도 가볼만한 데가 많다. 해변과 어우러진 갯벌 위를 걸을 수 있는 짱뚱어다리와 우전해변이 있다. 태평염전과 소금박물관, 소금전망대도 있다. 증동리교회 뒷산에서 내려다보이는 한반도 지형을 닮은 우전해변 풍경도 독특하다.

 신안 증도 소금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태평염전. 드넓은 염전은 바닷물이 햇볕과 바람을 만나 천일염으로 만들어지는 곳이다.
 신안 증도 소금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태평염전. 드넓은 염전은 바닷물이 햇볕과 바람을 만나 천일염으로 만들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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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안 증도를 찾은 여행객들이 한반도 지형을 닮은 우전해변을 내려다보고 있다. 증동리교회 뒷산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신안 증도를 찾은 여행객들이 한반도 지형을 닮은 우전해변을 내려다보고 있다. 증동리교회 뒷산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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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는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와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의 위대한 여정이 배어있는 공생원이 있다. 윤치호는 가난 때문에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다. 14살 때 소년가장이 됐다. 미국인 선교사 덕에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가 됐다.

당시 목포에는 걸인과 고아가 넘쳐났다. 윤치호는 이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 공생원을 세웠다. 1928년, 당시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윤치호는 1938년 선교사들이 세운 목포정명여학교 음악교사였던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윤학자)와 결혼을 했다.

윤학자는 일본인에 가해지던 편견을 참으며 남편을 도왔다. 한국전쟁 때도 고아들을 두고 도망갈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다. 윤치호가 행방불명된 뒤에도 공생원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다. 1968년 56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목포 공생원에 세워진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 흉상. 공생원은 윤치호 전도사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란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목포 공생원에 세워진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 흉상. 공생원은 윤치호 전도사가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란 의미로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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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공생원에 있는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 기념관. 윤치호와 윤학자의 삶과 생애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목포공생원에 있는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 기념관. 윤치호와 윤학자의 삶과 생애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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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눈여겨볼 개신교 성지가 또 있다. 양동교회다. 1898년 세워진 옛 목포교회다. 미국인 선교사가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한국인 목사와 신도들이 키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다.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으로 많은 신도들이 구속됐다. 1942년 부임한 박연세 목사는 반일운동을 이끌다가 형무소에서 순교했다.

윤학자 여사가 근무했던 정명여학교(현 정명여중)는 1903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세웠다. 옛 목포교회 주일학교에서 출발한 전남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목포 정명여중에 세워진 독립기념비. 일제강점기 정명여학교는 목포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다.
 목포 정명여중에 세워진 독립기념비. 일제강점기 정명여학교는 목포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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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정명여중에 남아있는 옛 선교사 사택. 현재 100주년 기념관과 음악홀로 쓰이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목포 정명여중에 남아있는 옛 선교사 사택. 현재 100주년 기념관과 음악홀로 쓰이고 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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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여학교는 목포 만세운동의 진원지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압박에 맞서 자진 폐교했다가 광복 이후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학교 입구에 독립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연유다. 당시 선교사 사택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영암의 개신교 순교자도 많았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자가 영광 다음으로 많은 지역이다. 24명이 순교한 영암읍교회를 비롯 학산면 상월교회 35명, 군서면 구림교회 18명 등 모두 87명에 이른다. 왕인박사유적지 맞은편에 영암 기독교인 합장묘와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영암군 학산면 상월교회의 순교자 기념비. 영암은 한국전쟁 당시 순교자가 영광 다음으로 많은 지역이었다.
 영암군 학산면 상월교회의 순교자 기념비. 영암은 한국전쟁 당시 순교자가 영광 다음으로 많은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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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억 기부 강석창 회장 "재산 99%도 마저.."

CBS 김현정의 뉴스쇼 입력 2017.04.13. 10:11 댓글 222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강석창 (미네랄바이오 회장)

'나는 기부를 하기 위해 사업을 한다.'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회장님의 기부 철학입니다. 지난 20년간 기부한 돈만 해도 100억 원이 넘는데요. 사업을 그만두면 전 재산의 99%를 내놓겠다 이런 공언까지 했습니다. '꽃을 든 OO' 하면 떠오르는 그 화장품,
그 화장품 회사의 창업주입니다. 강석창 회장. 오늘 화제 인터뷰에서 직접 만나보죠.
강 회장님, 안녕하세요.

◆ 강석창> 안녕하세요. 강석창입니다.

◇ 김현정> 아니, 20년 동안 기부하신 돈이 정말 100억 원이 넘습니까?

◆ 강석창> 네, 100억 조금 넘습니다.

◇ 김현정> 아니, 그래서 저는요. 회장님이 원래 타고난 부자, 재벌2세쯤 되는 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혀 아니에요. 1980년대에 중졸에 영업사원부터 출발을 하셨다고요?

◆ 강석창> 87년부터니까 20대 초반부터 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 김현정> 사실은 최종학력이 중졸인 영업사원이면 월급이 기부를 할 정도로 충분하진 않았을 걸로 생각이 되는데요. 기부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 강석창> 처음에 기독교방송이 그때 언론 탄압을 받으면서 일반 청취자들이 기부하고 이런 것들 보고, 정말 기독교방송이 그렇게 어려운가 해서 찾아갔었거든요.

◇ 김현정> 아, 저희 CBS요?

◆ 강석창> 그렇죠. 그게 기부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 김현정> 저는 몰랐어요. 이거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CBS를 돕는 기부부터 시작하신 거예요? CBS가 언론 탄압받고 있던 그 시절에?

◆ 강석창> 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어려운 데를 선정해서. (웃음)

◇ 김현정> 맞습니다. 괜찮습니다.

◆ 강석창> 그때는 정말 (CBS가) 어려우셨던 것 같아요.

◇ 김현정> 그렇게 시작한 기부가, 회사를 직접 창업하면서는 매년 매출의 1에서 2%를 기부하겠다 약속을 하고 많을 때는 순수익의 30%까지 기부하신 적도 있다면서요?

◆ 강석창> 네, 회사 창업은 1992년도에 창업했습니다. 그때는 이익이 3%, 2%밖에 안 났었습니다. 그때는 1%내는 것 자체가 이익금의 50%도 되고 그래서 지나놓고 계산해 보니까 이익금으로 계산하면 기부한게 한 30% 되더라고요.

◇ 김현정> 아, 그렇게.

◆ 강석창> 그동안 낸 거 역산해 보니까 30%쯤 이익으로 계산이 되길래 기부 금액을 이익금의 30%로 바꾸게 된 겁니다.

◇ 김현정> 대단하세요. 제가 실례되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워낙 또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니까 말씀드립니다마는 최종학력이 중졸이신거죠?

강석창 회장. (사진=미네랄바이오 제공)
◆ 강석창> 고등학교도 다니긴했는데 제가 3학년 한 달 다니고, 건강이 너무 안 좋아서 중간에 스스로 자퇴를 했습니다.

◇ 김현정> 건강이 안 좋아서?

◆ 강석창> 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거꾸로 화장품을 하게 됐으니까 그게 역으로 보면 행운이 된 걸로 볼 수도 있겠죠.

◇ 김현정> 그거는 무슨 말씀이세요? 그것 때문에?

◆ 강석창> 공부를 했으면 은행 들어갔을 거거든요. 어디까지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화장품 회사에서 1200억 매출 하는 것보다는 못하지 않겠습니까? 결과적으로 그런 건데. 전화위복이 와서 새옹지마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나쁜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걸 잘 극복하면 오히려 큰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더라고요.

◇ 김현정> 그렇군요. 미네랄바이오의 강석창 회장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내가 사업을 그만두게 되면 전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 이런 약속을 또 하나 하셨어요?

◆ 강석창> 네, 그런데 신문에 그게 좀 잘못된 거 같은데 '손 떼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주변에 보면 나중에 하겠다는 분들은 제대로 하는 분들이 별로 없더라고요. 단계적으로 해야죠. 나중에 한다는 얘기는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 김현정> (웃음) 그럼 손을 다 떼게 되면 그때 99%가 아니라, 지금부터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해서 99% 하겠다 이런 말씀이세요?

◆ 강석창> 당연히 그래야 되겠고요. 한꺼번에 99% 다 하면 회사는 문을 닫아야 되니까 이거를 주식을 기부하게 된다면 배당금이 그쪽으로 가게 될 거고 그러면 계속 회사 이익이 기부하는 게 되겠죠, 이익으로.

◇ 김현정> 네. 그런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셨어도 솔직히 가족들은 좀 서운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 강석창> 그런 얘기도 좀 있었죠.

◇ 김현정> 아, 있었어요?

◆ 강석창> 그런데 요즘에 가족들도, 기부라는 것이 결국은 내가 복을 받는 길이거든요. 제가 많이 평상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아이들도 많이 받아들인 상태고요. '열심히 일해서 연봉 많이 받으면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제가 방향을 주고 있습니다.

◇ 김현정> 네가 열심히 해서 네가 많이 벌면 되지 뭘 그러냐? (웃음)

◆ 강석창> 그렇죠. 노력하지 않고 벌리게 되면 대부분 잘못되더라고요, 일반적으로.

◇ 김현정> 그렇군요. 지금 말씀하시면서 그러셨어요. '결국은 내가 나눠주는 게 다시 내 복으로 돌아오더라.' 퍼주고 퍼주고 또 퍼주는 게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는 겁니까?

◆ 강석창> 마케팅도 그렇게 봅니다. 제가 미네랄바이오를 통해서는 우리 제품을 무료로 막 주려고 합니다.

◇ 김현정> 고객들한테요?

◆ 강석창> 네, 이것도 하나의 일종의 기부가 아닐까.

◇ 김현정> 그렇군요. 지금 들으시는 분들 중에 '사실 나도 기부하고 싶어. 기부하고 싶지만 이게 실천이 어렵다. 또 내가 지금 당장 손에 쥔 돈이 너무 적다. 회장님은 많이 버시니까 그렇지만 나는 지금 당장 살기가 어렵다. 어떻게 기부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 분들에게 뭐라고 하시겠어요?

◆ 강석창> 네. 그런데 기부가 이게 보니까 또 습관인 것 같더라고요. 주변에 보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던 기부도 못하시더라고요.

◇ 김현정> 대부분 '나 많이 벌면 그때 나눌 거야, 그때 할 거야.' 말하는데 실제로 많이 벌면 그렇게 안 됩니까?

◆ 강석창> 돈을 많이 벌면 쓸 데는 더 많아지더라고요.

◇ 김현정> (웃음) 희한하죠. 많이 벌면….

◆ 강석창> 공장도 지어야 되고. 그러다 보면 못할 수가 있겠더라고요.

◇ 김현정> 그렇죠, 그렇죠. 그래서 '기부는 습관이다.' 100원 벌면 100원 버는 대로, 1만 원 벌면 1만 원 버는 대로 거기서 조금이라도 떼내서 기부하십시오, 이런 말씀이시군요?

◆ 강석창> 그리고 더 중요한 거는 기업해서 돈을 벌게 되면 이걸 내 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고객의 주머니에게 나한테 가지고 온 거거든요.

◇ 김현정> 물론입니다.

◆ 강석창> 그중의 한 30% 정도는 가난한 고객한테 돌려준다면 (사회적으로도) 부의 분배라든지 공유경제하고 딱 맞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 김현정> 참…. 회장님, 감사드리고요.

◆ 강석창> 네, 감사합니다.

◇ 김현정> 기부를 그냥 많이 하셔서 감사드린다기보다는 그런 철학을 여기저기에 알려주고 다니시는 저는 그 점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 많이 해 주시고요. 오늘 귀한 인터뷰 고맙습니다.

◆ 강석창> 감사합니다.

◇ 김현정> 전 재산의 99%를 내놓겠다, 그리고 지금까지 100억 원이 넘게 기부를 한 기부왕입니다. 미네랄바이오 강석창 회장이었습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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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허리 통증 달고 산 프랑스 환자 한국서 새 삶

  • 강경훈 헬스조선 기자   

수술 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들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35년 동안 괴롭혔던 허리 통증에서 벗어난 프랑스 프랑수아 비아씨/사진=우리들병원

프랑스 남부 알프스 샤모니에서 수 십 년간 스키 강사로 지낸 프랑수아 비아(57∙샤모니 골프클럽 재무이사)씨는 35년 전 스키를 타다 허리를 다친 후 지금까지 고생 중이다. 병원에서는 딱히 수술을 할 상황도 아니니 정 못 참겠으면 진통제 먹고 물리치료나 받고 너무 힘들면 안정을 취하라는 얘기만 들었을 뿐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비아씨는 "의사들은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만 체크했다"며 "그들은 내 삶의 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다 올해 초 한국의 LPGA 선수 중 한 명이 허리 시술을 받고 별 무리 없이 다시 골프채를 잡는 것을 보고 수소문 끝에 우리들병원을 찾았다.

이달 초 우리들병원을 찾은 비아씨는 스키나 골프를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디스크 쿠션을 보존하면서 섬유륜을 성형하는 치료를 하자는 얘기를 듣고 15일 내시경 추간공 절개술, 인공 인대 삽입술, 내시경 디스크 성형술을 받았다. 모두 전신마취 없이 시술기구가 들어갈 정도만 째는 최소침습으로 이뤄졌다. 비아씨는 "일을 오랫동안 쉴 수 없고 바로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는 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치료법을 논의하는 게 인상적이었다"며 "시술 중에도 어디가 불편하거나 통증이 있는지 지속적으로 안심을 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시술이 끝나고 1시간 정도 안정을 취한 후 비아씨는 혼자서 일어날 수 있게 됐고 35년간 괴롭혔던 다리, 팔의 통증은 치료 직후 바로 사라졌다. 비아씨는 "프랑스에서 큰 수술을 받았다면 회복까지 2~6개월 고생했을 것"이라며 "의료진, 행정직 등 병원 모든 직원이 환자를 위해 즉각적인 준비가 잘 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들병원 이상호 회장은 "환자의 통증을 없애는 것은 물론 정상적인 삶과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삶의 질을 올릴 수 있는 시술의 효과에 대한 연구도 지속적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http://health.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4/26/20160426010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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