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람을 따르는 신자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로마서 3:4)


   우리는 앞에서 주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신앙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왜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알려면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사단의 끔찍한 전략에 의한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창세 이래로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진행되어오고 있으므로 성경을 조금만 세밀하게 연구하면 즉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대로 사단에게 속고 있다.

그렇다면 사단의 탁월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높이는 일이다. 간단한 이 전략이 놀랍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지옥에 데려가는데 성공하였고 기독교를 3류 종교로 타락시켜 비참한 모습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사람이 창시자가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시작하셨고 그의 아들, 즉 사람이 아닌 신께서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종교들은 사단이 인간 중에 명철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 능력을 입혀주어 종교 창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위력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계(靈界)의 이와 같은 실상을 인간들이 한번만이라도 상상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은 사단이 기독교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실상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좋고 실력이 있고 외모가 나아보이면 곧잘 사단의 목표가 된다. 일단 사단은 자기의 목표를 정하고 나면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그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자로 세운다. 성공하게 하고 남보다 다른 장점이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한다. 그는 명성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특별한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로 나타나도 사람들은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나타나며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받은 종이라고 자기를 선전하기에 이른다.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도 나은 것이 아니며 특별하여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단은 사람을 높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에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람 우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선량한 양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마태복음 23장에서 경고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마태복음 23:8~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에는 선생이 없는 것인가? 지도자도 없는 것인가? 아비도 필요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하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비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아보는 바울과 같은 지도자가 교회 안에 많아야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생으로 호칭 받으며 군림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지도자라 칭함 받으며 양들을 늑탈할 것을 막고자 한 뜻이다. 아비라 하여 양들과 격차를 두고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디모데전서 2:5).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날 기독교의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다. 인간이 교회를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운영한다는 미명아래 인간의 생각대로 만들어낸 제도일 뿐 우리의 왕 되시는 주님은 이 일을 인정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정코 외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교회는 유기체요 생명체이다. 교회는 가족이다.

   첫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이 일에 사울왕은 합당한 본이다. 그는 전쟁에 승리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사무엘상 15:12). 이 일로 말미암아 주님은 슬퍼하시고 사울의 왕조를 철회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자신의 명예와 기쁨을 위하여 당연히 죽이라고 하였던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슬퍼하시고 사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념비를 세울만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여 그들 중심으로 교파를 만들어 오늘날 수많은 교단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사단은 이일을 주도하여 성공했고 그러므로 사울을 떠난 하나님이 오늘의 기독교를 떠난 것이다. 슬픈 일이다. 생각하여 보자. 루터, 칼빈,웨슬러, 무디 등 얼마나 많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는가. 그러나 그들을 오늘날 교파의 우두머리로 추앙하는 일은 결단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다.

   둘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시니 복음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구원받는 역사가 점점 사라지다가 결국 오늘날은 구원을 말하는 것조차 이단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어떤 교파에서 만든 이단 분별에 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이단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사도들이 구원을 외쳤고 구원을 받으라 하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 성경말씀이 아닌가(사도행전 2:40, 4:12, 16:31, 에베소서 2:8, 유다서 3절 등).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강조하면 이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구원을 강조하지 말라는 오늘의 가르침이 사단의 가르침이 아닌가? 구원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 예수 이름을 우리 언어에서 지우라는 뜻이 아닌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기독교인들이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성경과 다른 당신의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고자 하는 순전한 신자, 성자 같은 신자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잘못된 교회는 속히 떠나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떠난 교회는 사람이 만든 조직으로 운영되고 거듭난 적 없는 교인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말씀도 성령도 없다.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인데 결국 사단의 전략에 의해서 종교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이 교회 안에서 힘을 얻으며 교회를 운영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 그러나 분명히 알것은 성경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에 오늘의 기독교가 바른길로 가려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제도를 성경 안에서 찾고, 헌법은 성경으로, 지도자는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교회를 향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 살아날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할 것이며 거듭난 성도들로 교회당이 채워져서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큰 예배당을 짓는데 교회의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큰 건물보다 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해야 할 것이며 많은 숫자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끝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모든 기독교인을 다 지옥 자식으로 정죄하려 함이 아니다. 다만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성경을 기준하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여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인가 살피며 자신의 영혼의 문제도 겸손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옥에 가는 사람 모두 불쌍하지만 그 중에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종교생활하다 지옥에 가는 사람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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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울다가 지친 신자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 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말라기 2:13).


   하나님이 눈물을 싫어하실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흘리는 눈물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의 기독교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 무엇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 손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거나,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몸부림치며 울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신앙의 훌륭한 표본처럼 각인된 현실은 우리가 점검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물론 한나처럼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거나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다. 필자도 최근까지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통곡과 눈물의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진정한 신앙의 진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그들의 눈물을 과소평가 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눈물 속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어 우리의 신앙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현실에 눈물의 의미는 대단하다. 언급한대로 예배당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는 자들은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로 인정받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일이 우리에게만 처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말라기 시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 "눈물로 내 단을 가리우는도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일은 분명 사단이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눈물은 주의 단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주의 단을 보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하다.

   먼저 말라기의 말씀을 생각하며 눈물로 단을 가린다는 의미를 고찰해보자.


   눈물로 단을 가리는 첫 번째 의미는, 보여주는 신앙의 표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신앙, 이것은 가증스러운 신앙이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외향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찌들어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고 순전하고 순수한 양심도 더러움으로 변해있었다.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향한 애정과 경외심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변질되어 눈먼 것, 저는 것들로 드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가지고 나왔던 예물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기하여 드리는 자이므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말라기 1:13,14).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증스러운 행동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보여주는 신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고자 하여 외모를 꾸미고, 사람들이 보는 길모퉁이에서 크게 기도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마태복음 23:5).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큰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곳에 많은 시설들을 갖추어 외모를 과시 하려 하지 않는가? 또 교회의식에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모든 것들을 준비하여 웅장하게 보이려 한다. 성직자들의 의복이 그러하며, 성가대들의 가운이 그러하며, 내부의 수많은 시설들이 그러하다.

   보여주는 신앙의 극치는 아무래도 헌금이다. 일일이 이름을 다 기록하고 그것을 교회 앞에서 다 공표하며 주보에 명단을 발표하니 헌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러하므로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신앙으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회개하여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또는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인데 그 대상이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 앞에 감사하고, 사람을 섬기는, 신앙이 아닌 길을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체면 때문에 헌금하고, 분위기 때문에 헌금하고, 욕심 때문에 헌금하는 오늘의 현실이 보여주는 신앙의 극치이다.


   두 번째, 눈물로 단을 가리우는 것은 감정적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인 깨달음에 의한 감정변화가 아니라 감정변화에 의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감정을 주셨으나 감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혼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감정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심각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하여 훌륭한 설교를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사무엘상 2:3).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양심을 다 보고 계신다. 감정적인 표현이 신앙생활의 중심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통곡을 하고 울뿐만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정신이 없게 만든다. 더구나 새벽기도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많은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당만 지으면 주변에서 반대농성을 하여 못 짓게 하는 현실이다. 또 예배당 주변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야 마땅할 것이다.

   예배당은 우는 곳도 슬픈 곳도 아니다. 예배당은 은혜로 구원받아 지옥을 면한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에배를 드리는 곳이다. 그곳은 기쁜 곳이며 감사하는 곳이며 즐거워하는 곳이다. 거기는 우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눈물로 괴로워하는 곳이 아니다. 근심하는 곳은 더욱 아니다. 거기는 웃음이 있는 곳이며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이다. 생각하여 보라. 당연하지 아니한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 받아야 마땅할 죄인을 값없이 건져 주셨는데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그 감사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예배당에만 오면 얼굴을 찌푸리고 슬픔을 머금은 얼굴로 울어야하며 또 이러한 자들이 신앙심 깊은 신자로 인정받고 있다. 통성기도 시간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괴성을 지르며 우는 자들로 인하여 혼란스런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고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는가? 주님은 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밝으며 명랑하여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친구들과 잘 놀다가도 아버지만 만나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굴을 찌푸리고 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러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왜 세상에서 잘 지내다가도 예배당만 오면 울기 시작하는가? 기도만 시작하면 울기 시작하는가?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눈물로 단을 가리는 것의 문제는 습관적인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종교 규칙들을 만들고 그와 같은 규칙들을 열심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도 그와 같은 신앙의 모습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말라기 시대보다 예수님의 시대는 더 타락하여 그들의 가슴은 얼음보다 차가웠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규칙들은 수 없이 많아서 그들은 그 규칙을 지킴으로 피곤해 있었다. 그런데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방하였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태복음 15:1,2).

   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유대교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 지도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동은 이단적인 행동으로 정죄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성경에 없는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전통이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단이라고 공격한다. 필자가 믿기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요한 웨슬레나 루터나 무디가 와도 이단으로 정죄당할 것이다. 아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국교회에 오시면 당장 이단으로 규정되어 쫓겨날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학교도 나온적이 없고, 어떤 교파에 소속된 적도 없고, 오늘날 기독교가 지키고 있는 절차에 따라 예배를 드리지도 않으며, 목사란 호칭도 쓰지 않았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모이는 단체에 어떤 교파 이름도 붙이지 않았고, 그들은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볼 때 잘못되었으니 이단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질문하였다. 왜 필자는 교파에 속하지 않느냐고. 필자는 그것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며,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진실로 그러하다. 우리는 주님의 본을 따라, 말씀의 본을 따라, 이 두가지를 기준한 양심의 본을 따라 신앙을 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받지 못한 신앙생활의 모습인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면 기쁘고 즐거워야 하며 천국에 갈 수 있는 희망에 부풀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당에서 눈물이 습관화되어 있는 것은 무슨 현상인가? 그들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눈물로 시작하여 웃음으로 진행하며 웃음으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니 부활이 그것이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눈물 흘리는 회개가 나온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울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그들은 즉시 큰 기쁨이 충만하였다. 46절에 기록된 대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장면은 기독교의 시작의 모습이요, 오늘날 한 사람이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된 정상적인 모습이다. 필자가 편의상 기독교인이라 하였거니와 실제는 성도라고 표현해야 정상이다. 거듭난 정상적인 성도는 이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눈물은 필요하다. 이것은 필자가 서두에도 언급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러나 신앙의 기본은 이렇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죄인이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며 어찌 할꼬 하는 심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구원받기 직전의 준비된 모습이다. 이것을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준비된 자들이며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자들이다. 전도자가 그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일어나며, 형제 사랑이 일어나며, 말씀사랑이 일어난다. 그들에게는 충만한 기쁨이 있으며 천국에 대한 소망이 모든 슬픔을 이겨 그들의 삶이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힘든일이 있고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겠으나 천국에 대한 희망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쁨의 기초 속에 때때로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값없이 건져주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한 눈물이며, 허물과 실수로 지은 죄를 뉘우치는 눈물인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천국을 소유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통회의 눈물인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눈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있다. 죄를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있고, 기도제목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있다. 이와 같은 눈물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가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눈물이다.

   필자가 분별하기로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흘린 눈물의 대부분은 이 눈물과 종류가 다르다. 모든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불안하고 하나님 앞에 불안하며 자신들의 불완전한 삶에서 파생된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인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음으로 천국 갈 소망을 기초로 하고 있는 자들의 눈물과 이러한 눈물은 본질이 다르다.

   한국의 기독교는 구약의 말라기 시대처럼 눈물로 단을 가리우고 있다. 소경된 그들은 그와 같은 반복된 눈물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칭찬하고 있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은 이 시대에 응한 것이다(마태복음 15:14).

   사랑하는 독자여, 스스로에 속지 말고, 지도자에 속지 말고, 기독교에 속지 말라. 성경은 한 권이요, 길은 한 길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이것은 여러분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단번에 용서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은혜의 선물로 구원받은 것이며 죽어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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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험하고 확증하라


                              성경을 고치려는 신자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기독교의 생명을 무엇인가? 성경의 완전함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고치겠다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하겠는가. 필자는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

   필자가 만나보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자는 다양한 질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교회의 여러 가지 형식과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들은 성경에 없더라도 교회의전통을 중시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말인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과 그의 지도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그들은 다양한 말로 주님을 대적했는데 그 중에는  자기들의 전통, 즉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새로운 자기들의 전통을 접목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성경을 무시하는 일이며 고치려는 처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도 동일하다. 필자와 함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기독교 전통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인용하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성경에 보이는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몸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거룩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몸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은 성전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배웠는데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다 하였거니와 오직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인 무리일 뿐이다.

   절대로 건물은 교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는다든지 성전 봉헌식을 한다는 말들은 소경의 넋두리요 성경을 고치려는 처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교회 구조를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가? 성경은 오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각양 지체로 한 몸을 이루어 그 지체의 기능에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체가 교회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성직자가 되어서 교회를 대표하고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교리는 어떤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만인은(구원받은 자는) 다 같은 제사장이라고 외치지 아니하였던가. 성경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 단정코 말씀하셨다. 신부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신부 대신 목사로 명칭만 바뀌었지 아니한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중보일 수 있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제도는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잘못된 전통일 뿐이다.


   셋째로, 교파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서 누군가는 외쳐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교파를 나누어서 당을 짓고, 담을 쌓고, 경계선을 그리고, 명칭을 붙이고, 대표를 뽑고,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운영할 헌법을 만들라고 가르쳤는가? 헌법이 성경을 대신하고, 대표가 예수님을 대신하며, 조직이 성령을 대신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조직을 통하여 대신하면 하나님의 할 일은 무엇인가?

   1900여 년 전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종 바울은 교파 문제에 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린도전서 1:11~13).

   바울은 당파를 짓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유아적 발상이며 시기와 질투의 소산이며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발버둥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1,3).

   말씀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당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파주의를 주장하고, 종파에 속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 사람들은 성경을 능멸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파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교파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을 뜯어고치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오늘날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교파로 모이는 것은 정확하게 닮은 모습이다.

   넷째로 헌금에 관한 문제이다. 기독교와 그의 지도자들은 대답해 보라. 오늘날 명단을 공개하는 헌금은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만 양산하는 헌금제도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시중에 돌고 있는 여론은 "돈 없으면 예수도 못 믿는다. 예배당에 나가도 돈 없으면 행세하지 못한다. 예수도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한다" 하지 아니한가?

   헌금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가? 그냥 헌금하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물질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헌금하면 되지 아니한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이름 쓰면 헌금하고 쓰지 아니하면 헌금하지 않는 믿음의 수준이겠는가? 필자가 속한 교회를 40여 년간 지켜보는데 한 번도 기명헌금을 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예배당도 짓고 선교도 하고 교회도 잘 운영되고 불편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헌금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1~4).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경계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심을 기억하여 은밀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엄청난 헌금으로 인하여 많은 발전을 하며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지 필자는 확신할 수 없다. 아마 하나님은 산동네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그들을 복음으로만 돌아보는 허름한 예배당의 허름한 차림의 주의 종들과 함께 할 것이다.


   다섯째로 복음의 변질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복음을 지금 언급하고 싶다. 지옥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변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옥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막연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복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파고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기복신앙은 한국 토속신앙의 산물이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타락시켜도 누구 하나 외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기복신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정성껏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황당에 정성껏 빌면 복 받고 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토속신앙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분명하지 않으니 속죄에 대한 감격도 없다. 지옥의 절망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했는데 지옥에서 건져주는 핵심 진리인 속죄에 대한 감사가 있을 리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분석이다. 속죄를 그냥 교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끔찍한 사실을 많은 시간 사용하여 경고하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모든 설교시간에 지옥을 언급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1200도가 넘는 펄펄 끓는 불 속에서 미친 듯이 뛰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지옥에 간 가룟 유다에 대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지 아니하였던가. 이토록 무섭고 끔찍한 지옥을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경고하지도 않고 지옥에 대한 대책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한국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으로 인하여 영문도 모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천만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눈물이 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능력 체험도 아니고 감정적인 어떤 경험도 아니고 환상이나 꿈이나 기타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통하는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죄 용서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는 날이다. 존 뉴턴도 우리 찬송가 405장에서 이 놀라운 날을 간증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골로새서 1:6).

   얼마나 분명한가. 여러분에게 이런 날이 있는가? 어떤 집사님은 구원받았는가 물으니 자기 교회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은 다 선택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였는데 다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전체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가. 이와 같은 경우는 극단적이지만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는 천국에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예배당에 출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어떠한 변질보다도 무서운 변질이다. 복음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천국과도 관계가 없다. 복음이 잘못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변질되는 것이다. 성경 핵심이 복음이요 성경 중심이 복음이며 결론이 복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떠난 기독교를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외에도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를 향하여 할 말이 많다. 성경을 고쳐가는 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진리는 성경뿐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죄 용서받고 성경대로 구원받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단회적이고 실제적이다. 교파를 초월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다 같은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러분 개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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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돈으로 천국을 사려는 신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누가복음 16:14).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몽땅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지나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목자들이나 신자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왠지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모두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에 아픈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돈 없이 팔렸으니 값없이 속량되리라"(이사야 52:3) 하였거늘,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는 돈으로 천국을 사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들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값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르친들 무엇 하랴. 현실은 돈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인데...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머리요, 주인의 자리에 앉혀야 할 교회가 예수님을 몰아내고 돈을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현실이다. 돈에 의해서 교회의 직책이 정해지고 직분과 질서가 정해진다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세상의 타락을 배금주의라 하여 돈에게 절하는 풍토를 말하지 않는가? 작금의 기독교 상황은 돈이 교회 주인이요, 돈이 하나님이요, 돈이 천국 가는 차표가 된다.

   어떤 구도자는 교회에 나갔다가 놀라서 그만 두었다고 고백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슬프다. 모름지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보고자 참석하였는데, 상당 시간 헌금에 관한 광고를 하더니 또 한 사람 한 사람 헌금자의 이름을 발표하는데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정작 말씀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모습을 보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불우이웃을 도울 때도 이름을 숨기고 도왔다는 것이다. 이 구도자는 교회를 이상한 단체로 보고 있었다.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부정한 죄악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 돈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이 썩고, 양심이 썩고, 행동이 썩어간다. 돈으로 사람을 팔고 사고, 돈 앞에서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심지어 아내나 자식들까지도 팔아넘기는 무서운 세상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계급이 돈에 의해서 결정되고, 인간 사회의 모든 체계가 돈으로 결정되지 아니한가. 공산주의는 돈을 공동관리 하자는 것이요, 자본주의는 개인관리 하자는 것 아닌가.

   국제질서도 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아니한가. 미국의 힘은 돈에 있다. 큰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가. 일본은 인도보다 작은 나라지만 돈이 있으니 큰 소리 치고 있지 아니한가. 돈으로 모든 질서가 결정되는 세상, 돈에 의해서 우방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우방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상의 구조는 돈으로 말미암아 엮어져 있다.

   돈은 사람을 추하게도 만들고 귀하게도 만들며,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한다.

   돈이 교회를 정복했다. 돈이 교회를 농락했다. 돈에 의해서 교회가 무너졌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이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평가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헌금 실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지도자들의 인격적인 문제도 있다.

   필자는 수십 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한번도 기명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한결같이 무기명으로 헌금하게 하였다. 예배당 건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큰 돈이 필요해도, 순수한 무기명 헌금으로 빚 없이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성경에는 물질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하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하다가 심판 받는 장면이 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두려움이 없이 훔쳤다가 무서운 심판의 형벌을 받았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게하시라는 사람이 물질 욕심이 나서 자기의 주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의 저주를 받게 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물질은 참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또 다른 가룟 유다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진리를 팔고 사며, 양심을 팔고 사며, 인생을 팔고 사는데 결국은 영혼을 팔아먹는 타락한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회개하여야 한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그 주옥같은 설교를 직접 듣되 3년 동안을 듣고도 결국은 지옥에 갔으니, 돈이 얼마나 무서운 사단의 무기인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이 돈이 한국의 기독교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에 의해서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지고 모두가 막혀 지옥에 들어갈 때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지금 지옥에서 깨닫고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여! 부정하게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몇 푼 바치면 하나님이 갸륵하게 여기어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은가? 세상의 더러운 돈 몇 푼으로 천국을 사려는 간사하고 악한 무리들이 예배당 안을 채우고 있으니 슬픈 현실이 아닌가.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현장에서 보지 않았던가? 물위를 걷는 기적,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등 수많은 기적들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인간의 지혜로, 힘으로 불가능한 역사, 상식을 초월한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보고도 주님을 믿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돈으로 말미암아 마비상태가 되었는데,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모습인가!

   집사, 권사, 장로 취임하는데 일정한 돈을 내어야만 하고, 모든 행사나 절기에 특별헌금을 해야 하며, 모든 명목으로 만든 헌금들을 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약정헌금을 내야하며, 월정헌금, 주정헌금을 내야하며, 그 외에도 공사석에서 필요에 따라 돈을 써야만 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연적으로 돈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행세할 수가 없고 멀어지다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가 있다. 그는 오래 전에 헌금을 약정했는데, 사업이 망하여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집도 처분하고, 변두리에 초라한 집을 빌려 사는데 거기까지 약정헌금을 받으러 찾아오는 것도 보았다. 세금 징수하듯이... .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교회가 돈을 많이 거두어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을 짓고 기업적으로 움직여 몇몇 사람의 배나 채우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약간의 생색내기 봉사를 한다면 이게 될 말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을 잘 살펴보면 물질에 대해서 청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그는 소돔성의 인민과 재산을 연합군의 포로된 가운데에서 되찾아왔을 때 사람 외에 모든 재산을 가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치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하신 역사를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영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돈이 개입되면, 하나님의 하신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의 행동임을 알았던 것이다. 어찌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계산하랴(창세기 14장 참조).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다. 나아만이 사례의 뜻으로 엄청난 양의 물질을 주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었다(열왕기하 5장 참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사도행전 8:14~24).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 세례받은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자기도 안수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다가 사도들에게 무섭게 책망받은 장면이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사도행전 8:20).

   사랑하는 독자여! 돈으로 직분을 사고, 돈으로 교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확보하고, 돈으로... , "돈! 돈! 돈!"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들을 농락하다가 돈과 함께 망하여 지옥에 가면 어찌 하시려는가?

   회개하라. 오늘의 기독교 상황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돈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은혜로 주신 선물을 받으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고 하셨다. 구원은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집사님은 "믿는 자들에 한하여 용서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성경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일방적으로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까지도...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참조).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미 다 용서되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 3장 23,24절에서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예수님 당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현실은 부한 자들, 넉넉한 자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다 병이 나았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하러 가다가 나았는데, 그 중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이 불쌍한 문둥병자, 그가 주님 앞에 단순히 회개하고, 사례함으로 구원받았다. 그의 행위는 전혀 참작되지 아니하고, 선물로만 구원받았다. 물질은 더욱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이 사람 문둥병자가 선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하여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음으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으며,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구원받은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천국을 가는 데는 아무 조건도 물질도 행위도 상관없다.

   이렇게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가, 지옥에서 건짐 받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갈 뻔했던 끔찍한 사실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헌물, 헌금, 봉사 이것이 진정한 헌금이요, 신앙이다. 제도에 의해서 내는 헌금이 아니고, 주변의 분위기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구원에 의해서 드리는 헌금이다. 나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를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여 눈물로, 행위로, 물질로 섬기는 섬김,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요, 헌금인 것이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거나, 사업 망할까 무서워서 드리는 헌금, 복 받기 위해서 조건적으로 드리는 헌금, 이것들은 다 가증한 것이다. 우주와 바다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헌금을 강요하겠는가.

   "깨어라, 정신을 차려라." 사람에게 속지 말라. 우둔한 자들이여! 평생 예수 믿고 목숨 바쳐 죽도록 충성하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성경은 좁은 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가 쫓아가는 이 넓은 문을 따라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날 그대들의 눈물과 통곡과 비참한 처지에서의 후회는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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