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CEO의 한식 만들기 ④ 브래들리 벅월터 오티스 한국법인 대표 [중앙일보]

2010.03.13 00:33 입력 / 2010.03.13 00:37 수정

“원기 회복엔 삼계탕 … 한 달에 두세 번 먹어”

브래들리 벅월터 대표가 자신이 만든 삼계탕을 선보이고 있다. [정치호 기자]
“삼계탕을 먹고 있으면 마냥 행복해요. 부드러운 닭고기 살이 입에서 살살 녹을뿐더러 진한 향의 인삼을 먹으면 없던 힘도 불끈 솟아나는 듯합니다.”

다국적 엘리베이터 제조업체인 오티스의 브래들리 벅월터(45) 한국법인 대표는 열렬한 삼계탕 애호가다. 1994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는 그는 거의 한 달에 두세 번 꼴로 삼계탕을 먹는다. 원기 회복에 이만한 음식이 없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나이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연스레 건강을 챙기게 되는데, 삼계탕보다 영양가 높은 음식은 없기 때문이죠.” 특히, 닭고기 안에 소화가 쉬운 찹쌀이 들어가 몸이 아플 때 먹으면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인 그가 삼계탕을 처음 맛본 것은 83년. 미 유타주 브리검영대학교에 다닐 당시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자 한국에 여행 왔을 때 먹어보고는 완전히 매료됐다고 한다.

“머나먼 타국에서 삼계탕을 맛보는 순간 고향서 먹던 치킨누들수프 생각이 났다”며 “그때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감기 걸렸을 때 흔히들 먹는 음식이 바로 치킨 누들 수프입니다. 삼계탕과는 맛이 비슷한데다 보양식으로도 좋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음식이죠.”

벅월터 대표가 94년 오티스 한국법인에 최고재무관리자(CFO)로 발령받으면서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 뒤 2008년부터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한국 생활이 벌써 16년째이다. 오래 살다 보니 여러 한식을 두루 먹어봤지만 삼계탕만한 게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유창한 한국말로 “엘리베이터가 없는 삶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지만 삼계탕 없는 삶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다.

“많이 먹어는 봤지만 만들어보긴 처음”이라는 벅월터 대표가 영계를 손질하는 것을 시작으로 삼계탕 만들기를 시작했다. 그가 모자와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자 옆에서 도와주던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김재선 주방장은 “스타 셰프 같다”며 응원했다.

먼저 영계 뱃속에 대추 한 개를 넣고 미리 불려 놓은 찹쌀을 마늘·인삼과 함께 채웠다. 그는 뱃속의 찹쌀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조심하면서 영계의 두 다리가 풀리지 않도록 엇갈려 꼬아 묶었다.

벅월터 대표는 “삼계탕용 닭고기는 따로 있나” “찹쌀은 어느 정도 불리는 게 좋으냐”고 또박또박한 한국어 발음으로 연방 질문을 던졌다. 김 주방장은 “무게가 400~500g 정도의 알을 낳기 이전의 영계를 주로 쓰고, 찹쌀은 여러 시간 동안 물에 불리는 게 좋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삼계탕 육수를 우려내기 위해 김 주방장이 황기·대추·대파·생강·청주 등 재료를 물에 넣고 끓이자 벅월터 대표는 “삼계탕용 육수를 이렇게 따로 끓이는지 몰랐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삼계탕이 다 끓자 벅월터 대표는 한 수저 맛을 본 뒤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맛 때문에라도 (내가) 해외에 한식당을 열게 된다면 꼭 삼계탕 전문점을 열 것”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는 한식 세계화에 대해서도 “해외에 한식이 소개될 때 본연의 맛을 완전히 잃어버린 ‘퓨전(fusion)’ 요리만 소개되는 경우를 간혹 봤다”며 “한국 사람들이 자기 음식을 더욱 사랑하면서 자신감을 가지고 세계에 알렸으면 좋겠다”라고 충고했다. 삼계탕만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맛을 살려 해외 시장에 도전하라는 것이 그의 주문이다.

글=이은주 중앙데일리 기자
사진=정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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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CEO의 한식 만들기 (12) NH-CA자산운용 대표 프랑스인 니콜라 소바쥬 [중앙일보]

2010.06.12 00:19 입력 / 2010.06.12 00:19 수정

“잘 익은 김치 썰어 넣은 볶음밥과 전 꿀맛”

소바쥬 대표이사가 직접 만든 김치볶음밥과 김치전을 선보이고 있다. [오상민 기자]
대부분의 한국 음식은 요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김치 볶음밥과 김치전은 예외입니다. 잘 숙성된 김치와 같은 재료 하나만 있으면 간편하게 만들 수 있을 뿐더러 맛 또한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NH-CA자산운용 니콜라 소바쥬 대표(49)는 김치 없이는 못 사는 푸른 눈을 가진 파리 출신의 프랑스인이다. 평소 식사약속이 없을 때마다 그는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여의도 회사 근처의 숨겨진 맛집을 찾아다닌다. 그에게 ‘맛집’ 평가 기준은 김치 맛이라고 한다.

“외국인인 저에게 ‘맛있는 김치’란 한 입 먹었을 때 아삭아삭하고, 고추 양념이 적당해서 너무 맵지 않은 것입니다. 프랑스·이탈리아에서도 마늘을 쓰는 요리가 많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은은한 매운 요리에는 익숙하지만요.”

그가 김치를 이용한 김치 볶음밥과 김치전을 처음 맛본 것은 2007년 한국에 부임하기 전인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레디아그리콜자산운용 도쿄사무소장, 홍콩지사 이사를 지내오면서 업무 출장차 한국을 종종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한국인 친구와 함께 한 한정식집을 찾았는데 반찬으로 나오는 김치전과 전골·찌개 등을 먼저 먹은 뒤 남은 국물에 김치를 넣어 볶아주는 김치 볶음밥의 맛에 순식간에 매료돼버렸다.

소바쥬 대표는 “그때 김치의 독특한 맛을 잊지 못해 일본·홍콩 등에서도 한식당을 자주 가곤 했다”며 “그것만으로 부족해 주말에 집에서 가족과 함께 종종 김치 볶음밥과 김치전 등을 만들어 먹었다”고 말했다. 이번에 한식 만들기에 참가한 것도 김치 볶음밥과 김치전 만드는 방법을 전문가로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라고 한다.

먼저 양념을 어느 정도 씻어낸 김치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써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요리 만들기에 들어갔다. 이어 김치 볶음밥에 들어갈 당근·양파 등 각종 야채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미리 달궈놓은 프라이팬에 들기름을 두른 뒤 재료를 볶기 시작했다.

고소한 향에 심취된 듯 소바쥬 대표는 옆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코엑스 인터컨티넨탈의 오흥민 주방장에게 들기름과 일반 참기름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자 자 오 주방장은 “들기름은 들깨를 볶아서 짜낸 기름이며, 참기름은 참깨를 볶아서 짜낸 기름”이라고 설명했다. 갓 지은 흰 쌀밥을 프라이팬에 넣어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다시 볶았다. 요리가 거의 완성되 가자 소바쥬 대표는 “볶음밥 위에는 계란 프라이를 하나 얹어야 제 맛”이라고 말했다 이어 부침가루와 물의 비율을 맞춰 반죽을 만드는 것은 시작으로 김치전 만들기에 들어갔다. 반죽에다 낙지·새우 등 해산물과 김치를 골고루 넣어 섞은 뒤 올리브유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종잇장처럼 얇게 펼쳐 동그랗게 부쳐냈다.

요리가 완성되자 소바쥬 대표는 능숙한 젓가락질로 따끈한 김치전을 간장·식초·파·설탕·잣 등을 섞어 만든 특별한 소스에다 찍어 한 입 먹었다. 오 주방장이 접시 위에 모양을 내서 올려놓은 김치 볶음밥도 한 숫갈 맛본 뒤 “한국 음식도 프랑스·이탈리아 음식처럼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고 감탄했다.  

음식을 함께 나누며 소바쥬 대표는 한식세계화에 대해 느꼈던 생각을 털어놨다. “불고기·비빔밥 등은 한국의 대표음식으로 해외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김치 볶음밥과 김치전은 많은 외국인에게 아직 생소한 음식입니다. 더 많은 대중에게 한식을 소개하려면 메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는 아울러 “정부의 노력과 더불어 한식을 포함한 한국 문화를 해외에 널리 알려야 한다” 고 조언했다.

글=이은주 중앙데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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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구호선 공격 논란 속 한국 온 이스라엘 페레스 대통령 인터뷰 [중앙일보]

2010.06.12 00:10 입력 / 2010.06.12 02:46 수정

지금은 ‘문명의 충돌’ 아닌 ‘세대 간 충돌’ 시대 … 북한의 새로운 세대 등장에 주목합니다

“국제사회는 우리에게 왜 (핵무장으로) 강해지려 하냐고 불평한다. 답은 ‘당신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니까’다.”

9일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이 최근 가자 지구를 향하는 국제 구호 선박을 이스라엘 군이 공격한 것에 대한 본사 김영희 대기자의 질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박종근 기자]
이스라엘 핵무기 보유 의혹에 대한 질문에 시몬 페레스(87) 이스라엘 대통령이 내놓은 답변이다. 의미는 단순 명료했고 목소리는 냉철 단호했다. 9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자 지구 구호선 진압 작전에 대해서도 “자기방어”라며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해갔다. 천안함 사건과 관련해서는 “내 나라의 군함이 격침됐다면 나라를 지키는 데 필수적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페레스 대통령은 반 세기 가깝게 의원으로 활동하고 총리 두 번을 비롯해 외교·국방·재무 장관 등 요직을 거친 이스라엘 정치의 전설이다. 1994년엔 중동 평화에 진전을 가져온 오슬로 평화협정의 성과를 인정받아 야세르 아라파트 당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런 그가 70여명의 경제사절단을 대동하고 8일 한국을 찾았다. 10일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단독·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과학기술·경제 분야 협력을 논의하고 11일 한국을 떠났다. 9일 j가 그를 만났다.

만난 사람=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사진= 박종근 기자

● 대통령께서는 1993년 외교장관으로 팔레스타인과 오슬로 평화협정을 이끌어내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동에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오슬로 협정에서 남은 게 뭡니까?

“오슬로 협정으로 국경에 대한 67개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정식으로 인정하는 계기가 만들어졌어요. 그때까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니었어요. 팔레스타인은 역사적으로 국가 체제를 갖춘 적이 없고 그래서 국경이 없었습니다.”

● 대통령께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두 개의 국가로 공존하자는 ‘2국가 체제’를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강경파인 네타냐후 총리도 찬성인데 왜 아직도 평화가 요원합니까.

“부분적으로는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 탓입니다. 반이스라엘 과격 단체인 하마스가 평화의 걸림돌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협상을 계속할 겁니다.”

● ‘2국가 체제’에 관해서도 대통령과 네타냐후 총리 사이에, 그리고 좌파인 노동당과 우파인 리쿠드당 사이엔 근본적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내 책임은 총리와 함께 국정을 잘 꾸려나가는 거니까 입장 차이가 있어도 존중해요. 우리는 두 개의 다른 나라에 속한 게 아니라 같은 나라의 지붕 아래 살기 때문입니다.”

●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께서는 팔레스타인과 협상을 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국민들은 팔레스타인이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고 사람을 죽이는데 팔레스타인을 신뢰하고 너무 많은 것을 그들에게 내준다고 비판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정은 한국도 유사합니다. 정부의 대북 협상은 ‘퍼주기’라는 비판과 의혹을 받아요. 대통령께서는 평화협상의 필요성과 이스라엘 내부의 비판을 어떻게 조정하십니까.

“먼저 역사가 증명하는 대로 독재는 자멸을 초래할 뿐이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문명의 충돌’을 주장한 새뮤얼 헌팅턴의 생각과는 달리 지금은 ‘세대 간 충돌’의 시대라고 봐요. 북한에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사람들의 눈을 가릴 수는 있어도 독재자 한 사람이 수많은 사람의 눈을 영원히 가릴 순 없지 않습니까. 나는 남한 정부가 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발전 사례는 어떤 총기보다 강한 무기입니다. 궁극적으로 북한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어요. 이스라엘은 전쟁을 1순위로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만 전쟁을 했어요. 한국은 인내심을 가지면 좋은 결과가 올 수 있습니다.”

● 대통령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협상 파트너인 상대는 없고 파트너는 노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과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 같은 사람도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노(No). 아마디네자드는 독재자이지 대통령이 아닙니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고, 평화의 편입니다. 북한에 대해 한국은 너그러움을 보여왔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인민의 고통은 한국이 아닌 북한의 독재자에게서 비롯된 겁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 역시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확고한 의지와 함께. 누가 내 나라의 군함을 어뢰로 격침시켰다면 나에게는 나라를 지키는 데 필수적인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어요.”

● 지난달 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로 항해하던 국제구호선단을 공격해 9명이 죽었습니다. 국제사회 비난이 비등합니다. 이건 이스라엘에 악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가자지구 하마스 정부의 입장이 강화되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를 풀라는 압력을 받겠지요.

“선단의 배는 여섯 척이었고 다섯 척엔 민간 운동가들이 타고 있었지만 마지막 여섯 번째 선박은 전투를 목적으로 와서 도발을 했어요. 우리에게는 우리를 겨냥한 무기를 실었을 것으로 의심되는 선박을 세워 검색할 권리가 있어요. 우리 측 요원들이 승선하자 그들이 먼저 구타와 총격을 시작했고 우리는 정당방위를 한 겁니다. 우리는 가자지구를 봉쇄하는 게 아니라 가자지구로 가는 무기를 봉쇄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가자지구를 떠난 후, 그들은 우리를 향해 약 1만 발의 로켓을 쐈습니다. 서울에 1만여 개의 로켓이 날아온다고 상상해 보세요.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사일 공격을 받는 것은 적의 어뢰 공격으로 우리 군함이 침몰당한 상황과 같아요.”

● ‘경제 평화’가 대통령의 지론인데 그 뿌리는 16세기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주창한 경제평화론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에라스무스는 “필요하다면 평화를 사라”고 유럽의 국왕들에게 건의했어요. 북한의 경우를 보면, 지도층이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국민들을 잘살게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만 추구합니다. 그런 경우엔 경제평화가 맥을 추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전형적인 경제평화론인 한국의 햇볕정책도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비현실적인 야망 때문에 파산상태를 맞았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위대한 인물일 수 없어요. 경제평화는 최선의 선택이긴 해도 유일한 선택은 아닙니다. 경제평화란 정치협상과 함께 가야 돼요. 정치협상이 없는 경제평화, 경제평화 없는 정치협상은 바람직하지 않아요. 경제는 세계적 영역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에라스무스의 논리는 오늘의 세계에는 안 맞아요. 오늘날 경제는 특정 국가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이뤄집니다. 가난은 특정 국가에만 나타나요. 북한이 계속 가난하고 싶다면 놔둬요. 북한이 가난에서 탈출하고 싶으면 개방을 해야지요. 하늘길을 열고 문을 열어야 해요.”

● 이란의 핵무장을 막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의 성공 여부가 북한의 비핵화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겁니다. 경제 제재가 이란 지도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란 핵시설에 대한 군사공격이 필요합니까?

“이란과 북한의 차이를 먼저 말하지요. 이란은 내부에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에 대한 저항세력이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죠. 이란에 대해선 경제 제재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아마디네자드가 생명의 존엄성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점도 부각돼야 합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처형하는 인간이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입니다. 테러 세력에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요. 경제 제재보다 이런 도덕적 타락성을 먼저 부각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 대통령께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입니다. 핵을 가진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대해 핵을 갖지 말라고 요구할 도덕적 권위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어요. 위협을 받는 건 우리입니다. 이스라엘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혹이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리고 이런 의혹 자체가 억지력이 될 수 있다면 그걸 왜 마다하겠습니까. 핵을 이용하는 것보다 핵보유 의혹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지요.”

● 핵보유 의혹을 억지력으로 활용한다는 말입니까.

“그래요. 예전에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내게 이스라엘 핵시설이 있다고 의심받는 지역을 좀 가보자고 해요. 내가 말했지요. ‘내가 미쳤습니까? 가보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의혹이 해소되고 나는 목이 잘릴 거요.’ 의혹으로 충분해요.(웃음)”

● 이스라엘이 적대 국가·민족에 둘러싸인 협소한 생활공간에서 생존하면서 정치적인 민주주의와 경제적인 번영까지 누리고 있는 건 기적 같은데 그 비결이 뭡니까.

“우리의 역사와 전통의 힘이죠. 우리는 항상 약소민족이었어요. 항상 반대파가 있었죠. 항상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 살아왔어요. 모세 시대 이래 항상 더 나은 것을 위해 투쟁하는 게 우리 유대인들의 DNA입니다. 모세의 십계명은 일종의 현대문명의 기초가 됐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라는 개선되는 가치를 발견했다면 모세는 변치 않는 가치를 주창한 겁니다. 둘 다 유대인으로 같은 전통을 공유하고 있어요. 과학자는 지식만 가져서는 안 됩니다. 과학자는 관습에 맞서 싸우는 혁명가입니다. 그리고 그 혁명은 마음으로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 유대인도 항상 관습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우상숭배에 맞섰고, 노예제도에 불복했습니다.”

● 이스라엘의 교육제도가 이스라엘 힘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스라엘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교육방법은 영원하지 않고 항상 변화합니다. 중요한 건 아이들에게 지식을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성격을 개발해 주고 호기심을 일깨워 주고, 카리스마를 길러주고, 배우는 방법을 가르치는 거지요. 지금은 주머니 속의 돈이 아니라 머리가 밥을 먹여주는 시대입니다.

또 우리 교육제도는 학생을 다양하게 평가하는 체계를 갖춘 게 특징입니다. 우수한 학교와 덜 우수한 학교 간 우열에 따라 교육을 해요. 이스라엘에선 군대도 훌륭한 학교 역할을 해요. ‘군대의 캠퍼스화’지요. 군대는 남녀 모두에게 지도력을 길러주고 옳은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줍니다. 저는 한 나라의 미래를 보기 위해선 주식시장이 아니라 연구원에 가보라고 합니다. 대전 KAIST를 방문했는데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한국을 만들어 낸 건 뜨거운 교육열이라는 걸 알아요.”

● 리더십의 원칙은 뭡니까.

“사람들 위에 서지 않고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위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뿐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정리= 전수진 기자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

시몬 페레스(87) 이스라엘 대통령 앞에는 ‘최연소·최장수·최고령’이라는 수식어가 단골로 붙는다. 이스라엘 대통령실이 제공한 자료엔 “16세부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고 돼 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비드 벤구리온에게 발탁돼 29세에 이스라엘 최연소 국방부 국장에 올라 이스라엘 군수산업의 토대를 닦았다. 이후 국방·외교·재무·교통부 장관직을 두루 섭렵했다. 총리도 두 번 역임했다.

여기에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수 의원이다. 1959년 36세에 이스라엘 의회인 크네세트(Knesset)에 입성한 후 2007년 대통령 당선 때까지 꼬박 47년을 의원으로 활동했다. 여기에다 세계의 현직 국가 수반 중 최고령으로 알려져 있다.

노벨 평화상은 보너스다. 93년 이츠하크 라빈 당시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과 함께 오슬로 평화협정을 도출해내 중동 평화의 중대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 받았다. 이들은 이듬해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사진). 라빈 전 총리는 그의 평생 라이벌이자 동지였다.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1923년생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48년 이스라엘 독립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다. 그가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 할아버지는 랍비(유대교 지도자)였고 홀로코스트 때 목숨을 잃었다. 그는 유럽에서 태어나 11세 되던 해 부모를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한 후 집단농장 키부츠에서 일하며 정치 활동에 몸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그는 정치적 강경파로 분류됐다. 종교적으로도 그랬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유대교 안식일에 규율을 어기고 라디오를 듣는 것에 격분해 라디오를 부숴버렸을 정도”라고 한 인터뷰에서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다 점차 온건파로 바뀌어 갔다. 85년에 총리로 재직할 당시엔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 병력을 철수시키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선 경제적 협력을 통한 평화 유지와 함께 ‘영토 타협론’을 주장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공존하자는 2국가 체제를 옹호한다.

아들 둘, 딸 하나를 뒀다. 딸은 언어학자, 아들은 각각 수의사와 벤처캐피털 사업가로 키워냈다. 그는 또 『새로운 중동』(1993)을 비롯해 10권이 넘는 영어·히브리어 책의 저자다.

히브리어로 번역된 박완서·이문열·황순원·이청준씨의 한국 단편 문학을 즐겨 읽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전수진 기자



j 칵테일 >> 유독 까다로운 경호

검색대를 통과할 때 카메라는 경호요원이 보는 앞에서 반드시 바닥을 향해 한두 번 빈 셔터를 눌러 이상 없음을 확인 시켜야 한다.

“쉿!”

9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기자들이 들어섰을 때 페레스 대통령은 서류를 검토 중이었다. 보좌관들이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돋보기를 쓴 은발의 대통령 앞에서 보좌관들은 살금살금 걷고 소곤소곤 속삭였다. 대통령이 펜을 놓고 “이제 됐다”고 하자 몇몇 보좌관은 손뼉까지 쳤다. 마치 인기 연예인을 대하는 듯했다. “카리스마가 대단하셔서 다들 스타처럼 대통령을 좋아해서 그렇다”고 한 대통령실 직원이 귀띔했다.

인터뷰에 이르는 길도 쉽지 않았다. 분쟁 지역인 데다 최근 구호선단 공격 사건이 국제이슈가 되고 있어선지 인터뷰 1시간 전부터 보안 검색을 시작했다. 노트북·촬영·조명 장비를 일일이 두 번씩 점검했다. 한국 측 경호 담당자는 “다른 나라 정상보다 유독 까다롭다”고 전했다.

인터뷰에 임하는 페레스 대통령은 노련한 ‘정치 9단’다웠다. 나지막하면서도 뚜렷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손짓·몸짓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인터뷰 말미에 건강 비결을 묻자 페레스 대통령은 “비밀인데”라고 눙치는가 싶더니 곧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게 열쇠다. 먹는 것부터 사고방식까지 철저히 관리한다”고 털어놨다. 낙관적 자세도 강조했다. “낙관론자건 비관론자건 죽을 때는 똑같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다”며 “난 낙관론을 선택했다. 그게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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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의 마법, 공짜로 뿌리면 더 크게 돌아온다"
CC컨퍼런스 "비상업적 콘텐츠 복제 규제할 필요 있나"
2010년 06월 09일 (수) 14:36:56김종화 기자 ( sdpress@mediatoday.co.kr)

"지난해 호주 노보텔호텔에 체크인 한 후 객실에 갔더니 유럽형 어댑터가 없었다. 어댑터가 없다고 프런트에 얘기했지만, 프런트에서도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휴대폰을 이용해 트위터에 메시지를 올렸다. (지금 어디에 와있는데 유럽형 어댑터가 없더라는) 글을 올린 뒤 20분 만에 프런트에서 어댑터를 가져가라고 했다. 노보텔호텔 본사에서 트위터를 체크하고 '그 고객에게 어댑터를 갖다 주라'고 한 것이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 한 사람의 사례는 몇 가지 안 되지만, 여러 명이 모여서 목소리를 낸다면 서비스나 제품의 만족도가 더 높아질 것이다.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트위터를 통해 서비스의 불만에 대응하면 문제가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이 오픈(개방)이고, 셰어(공유)다. 더 많이 나눌수록 더 많이 얻는다. 공유는 새로운 흐름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 Creative Commons License)로 알려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가 지난 4일 '오픈이 주는 사회적 혁신'을 주제로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대강당에서 국제컨퍼런스를 열었다.

CCL의 창안자 로렌스 레식 미 하버드교수는 물론 조이 이토 CC CEO와 세계 각지에서 모인 CC 활동가들이 공유와 개방의 철학을 나눴다. 아이삭 마오(Issac Mao) 소셜브레인재단 상무는 지난해 호주의 한 호텔에서 겪었던 자신의 일화를 소개하며, '나눠서 과연 내가 얻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했다.

"블로거들은 이렇게 물었다. '전 세계에 공유하면 내가 얻는 것은 뭐냐'라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다. 전통적인 비즈니스모델에서 벗어나야 답을 찾을 수 있다. 부가가치경로를 보자. A에서 B로, B에서 C로, C에서 다시 A’로 돌아간다. CCL을 적용했을 경우 A에서 A’는 더 향상된 것이 돌아온다."

▲ 지난 4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국제컨퍼런스에서 CC 활동가들이 주제발표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아이삭 마오, 크리스토퍼 아담스, 장 필립스. 이치열 기자 tryth710@

영화배급사 VODO.net의 감독인 제이미 킹(Jamie King)은 불법복제를 기회로 삼았다. 그가 2006년 P2P(peer to peer, 공급자와 소비자 개념이 아닌 개인과 개인이 인터넷상에서 파일을 직접 공유하는 방식)로 영화 <스틸디스필름>을 배급한 경험은 이렇다.

"불법복제자들은 영화산업에 해가 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난 다르게 생각했다. 복제를 컨트롤 할 게 아니라 그 상황을 이해할 기회라고. 복제됨으로 인해 가치가 창출될 방법을 생각해보자, 그래서 불법복제자들을 통해 영화를 배급하게 됐다. 처음엔 1만5000다운로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150만 건을 내려 받았다. 자원 활동가들이 전 세계 30개 언어로 이 영화를 번역했고, 한국어로도 번역됐다.

이런 게 어떻게 비즈니스냐고 묻는데, 우리에겐 엄청난 가치였다. 이렇게 확산되기 전에는 아무도 우리를 몰랐다. 그런데 그 뒤엔 우리에게 프로젝트를 맡긴다는 등 고용제의가 물밀듯 들어왔다. 이 사건 하나로 우리에 대한 전 세계의 인식이 바뀌었다. 소규모 영세영화제작사가 유명한 영화제작사가 얻을 법한 관심을 얻었다.

여기에 우리는 이 영화가 마음에 들면 1달러를 기부해달라고 했다. 두 번째 영화부터는 최소 5달러를 보내달라고 했다. 15달러 이상 보내면 특별한 선물을 준다고 했다. 그 뒤엔 선물이 없어도 계속 15달러 이상을 보내왔다. 그렇게 받은 2만2000달러의 기금다큐멘터리 한 영화에서 버는 것보다 훨씬 큰 금액이었다."

CC 활동가가 아닌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득은 무엇일까.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인증샷'을 찍고 싶은데 제지받은 경험이 있는 이는 일본의 모리아트뮤지엄을 가볼 만하다.

미술관은 프랑스의 퐁피두 등이 영구전시작품은 사진을 찍게 허용하는데, 일본은 이를 막는 데 문제의식을 가졌다. 알고 보니 저작권과 관련된 매우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고민 끝에 CC를 적용했다. 지난해 7월 이 곳에서 열린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작품전은 만질 수는 없지만, 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플래시만 터뜨리지 않으면 됐다.

아이를 데려온 엄마와 학생들은 작품을 배경으로 마음껏 '인증샷'을 찍었다. 작품은 작가의 소유지만, 미술관에 전시된 동안 이를 찍은 사진은 찍은 이의 것으로 했다. 요미우리신문에 성공적인 작품전이라는 기사가 났고, 이 미술관은 새로운 관객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같은 방식의 작품전은 올해까지 계속됐다. '미술은 공공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방송사도 합세했다. NHK 크리에이티브 라이브러리는 평균 1분 분량인 3000개의 비디오클립과 40가지 사운드 클립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재가공해서 다시 업로드하는 것도 제한하지 않는다. NHK 표기만 지키고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된다. 여기에 이 클립들을 가공할 수 있는 온라인 에디팅 툴도 제공했다. 그 결과 6개월 동안 2500개가 넘는 작업이 있었다.

NHK 세이노신 야마기시 PD는 "BBC, PBS, ARD, 여기에 알자지라까지 이런 식으로 콘텐츠를 공유하고 있다"며 "이는 전 세계적 추세"라고 했다.

'intoinfinity.org'에서 아이폰 리믹스 어플리케이션을 선보이고 있는 타카히로 사이토·이즈미 요시다와 이른바 '오픈소스시네마'로 불리는 리믹스영화를 만드는 브렛 게일러도 공유가 주는 가치를 강조했다. 개방과 공유가 이 전에 없던 콘텐츠를 만들었고, 그 것의 가치가 여기에 참여한 이들 모두에게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CCL이 적용된 콘텐츠는 6월 현재 전 세계에서 1억8500여 만 개로 추정되고 있다. 저작자 표시(BY), 비영리 목적(NC), 변경금지(ND), 동일조건 변경허용(SA) 이 네 가지 조건만 지키면, 당신은 자유라는 것이다. 조이 이토 CC CEO는 "어떤 이들은 알자지라에 CCL을 적용하게 내버려두면 어떡하느냐고 묻지만 CC가 알자지라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CCL이 붙은 콘텐츠를 널리 공유할 수 있는 표준화된 플랫폼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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