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유산균 '아토피 치료 효과' 입증>
김치 유산균서 아토피 치료 미생물 발견
(경산=연합뉴스) 홍창진 기자 = 영남대 맞춤의료연구단은 최근 임상실험을 실시해 김치 유산균에서 피부 아토피질환의 치료효능을 지난 미생물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8일 밝혔다. 사진은 전자현미경으로 5천배 확대한 균주. <<영남대학교>> 2010.4.8
realism@yna.co.kr

영남대 맞춤의료연구단 세계 첫 성과

(경산=연합뉴스) 홍창진 기자 = 영남대 산학공동연구진이 김치의 미생물이 가진 아토피 치료효과를 인체 임상실험을 통해 처음으로 입증해 관심을 끌고 있다.

영남대 맞춤의료연구단(단장 박용하)은 8일 "최근 임상실험을 통해 김치유산균에서 피부 아토피질환을 앓는 어린이환자에게 우수한 치료효능을 지닌 미생물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밝혔다.

박용하 생명공학부 교수와 한윤수 충북대 의대 교수, ㈜프로바이오닉(대표 홍윤미) 등으로 구성된 산학공동연구진은 지난 수년간 김치 미생물의 아토피질환 치료효과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끝에 김치에서 유산균의 일종인 '락토바실러스 사케이 프로바이오 65' 미생물을 발견했다.

이 미생물의 치료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2~10살 어린이 아토피환자 100여명을 대상으로 3개월간 투여한 결과, 아토피질환이 대조군에 비해 최대 238% 호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연구진은 실험결과를 미국 아토피전문의학학술지 '알레르기,천식,면역학 학회지' 4월호에 발표했으며 연구결과로 국내특허를 취득했고 미국과 유럽, 중국에도 특허출원 중이다.

맞춤의료연구단은 "부작용 없는 천연면역조절제인 김치 유산균으로부터 기존 아토피 치료약물의 대체제를 개발할 수 있음을 최초로 입증했다"며 "아토피질환 치료제 개발의 새 지평을 열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박용하 단장은 "현대인의 난치병인 아토피질환을 다스릴 신약개발 가능성을 열었고 한식(韓食) 세계화에도 기여할 것"이라며 "올 상반기 국내 바이오기업을 통해 상품화하고 전 세계에도 보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보건복지부, 교육과학기술부, 중소기업청의 연구개발사업 지원으로 이뤄졌다.

한편 연구팀은 오는 10~11일 대전의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열리는 '2010 과학의 달 기념 사이언스데이'에서 새로 개발한 김치 유산균 음료를 선보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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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아줌마' 송명희씨 신지식 농업인 선정
(원주=연합뉴스) 김영인 기자 = 냄새 안나는 청국장을 개발한 `청국장 아줌마'가 올해의 신지식 농업인으로 선정됐다. 강원 횡성군 안흥면에서 `안흥콩터'를 운영하는 송명희(53.여) 대표가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올해의 신지식인(농산물 가공분야)으로 선정됐다. 사진은 송 대표 모습. <<지방기사 참고>> 2010.4.7
kimyi@yna.co.kr

(원주=연합뉴스) 김영인 기자 = 냄새 안 나는 청국장을 개발한 `청국장 아줌마'가 올해의 신지식 농업인으로 선정됐다.

10년전 서울에서 강원 횡성군 안흥면으로 귀농해 `안흥콩터'를 운영하는 송명희(53.여) 대표는 냄새 없는 청국장을 개발해 농림수산식품부로부터 올해의 신지식인(농산물 가공분야)으로 선정됐다.

송 대표는 청국장에 대한 오랜 연구끝에 기존방식과는 차별화된 지식과 기술을 활용,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등 농업.농촌의 혁신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어렸을 때 고향인 원주를 떠나 서울에서 평범한 주부로 생활하던 송 대표는 청국장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지난 2001년 홀로 귀농해 2003년 '냄새 없는 청국장'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온라인 판매 등을 통해 송 대표의 청국장이 널리 알려지면서 2005년 남편도 직장을 그만두고 합류해 전통방식 그대로 제조하는 고유의 청국장 맛을 이어가고 있다.

송 대표는 `냄새 없는 청국장’의 비밀은 짚과 발효실의 온도와 습도, 발효시간에 있다고 소개했다.

온.습도 조절장치가 갖춰져 있는 황토 발효실에서 가마솥에 삶은 콩을 3일 정도 발효하는 과정을 거쳐 청국장이 완성된다.

이 청국장은 안흥면 일대의 국산 콩을 사용해 옛 방식 그대로 만들어 특유의 냄새가 없고 깊은 맛을 내고 있다.

안흥콩터에서는 용도와 재료에 따라 찌개용 청국장을 비롯해 생청국장과 쥐눈이콩 청국장, 가루 청국장, 청국장환, 간장, 된장 등을 만들어 판다.

송 대표는 "청국장을 너무 좋아해 만들고 만들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며 "앞으로 학교급식에 냄새없는 청국장을 납품해 아이들도 전통 발효식품인 청국장을 먹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도내에서는 해양 심층수를 이용해 송이 발효주를 개발한 양양군 김광희(52)씨와 백합 신품종 `두산'을 개발한 영월군 안재영(52)씨도 이번에 2010 신지식농업인으로 함께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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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 외친 김교신이 대표적 제자

2010.04.06 15:05 입력 / 2010.04.06 15:06 수정

우치무라 간조를 배운 한국의 지성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성서조선’ 창간 동인 6명. 1927년 2월 촬영한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정상훈·김교신·송두용. 동인지로 시작된 ‘성서조선’은 16호부터 김교신이 단독으로 출간했다.(출처:『김교신전집』, 부키, 2001년)

1920년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연에는 김교신·송두용·함석헌·정상훈·양인성·류석동 등 조선인 유학생 6명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 돌아와 1927년 봄, 동인지 형식으로 월간 ‘성서조선’을 창간했다. 이들 중 끝까지 무교회주의자로 남은 이는 김교신과 송두용이다.

김교신(1901~45·사진)은 함흥공립농업학교 졸업 무렵 3·1운동을 맞아 태극기를 제작해 돌린 일로 일본경찰의 가택수색을 받는 등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떴다. 그해 3월 일본 유학을 떠날 때 청년 김교신의 가슴은 일본에 대한 원한으로 가득했다. 유학 중 기독교 신앙에 들어간 그는 우치무라 간조 문하에서 1921년부터 7년간 신앙을 배웠다. 김교신은 스승을 가리켜 발톱 끝에서 머리털 끝까지 애국의 화신(化身)이라며 절대적 존경을 바쳤다. 진리 위에 일본을 세우겠노라는 우치무라의 애국심이 자신의 조국애와 서로 통한다고 직감했던 것이다.

종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파악한 그가 택한 애국의 방법은 ‘성서조선’ 발간이었다. ‘성서조선’은 16호부터 동인지 형식을 벗고 김교신 단독의 개인 잡지로 발간되었다. 김교신의 ‘성서조선’ 독자이자 그의 성서 모임에서 신앙을 배운 인물 중에는 후일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의사 장기려도 있었다. 김교신은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를 역설했는데, 이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한 기독교의 내용이나 형식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깨닫고 만든 기독교를 가지고 우리가 겪는 역사적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곧 기독교 토착화 노력이었다.

김교신은 서울의 양정·경기고보,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지리 교사로 근무했다. 양정 시절에는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를 겸하기도 했다. 1935년 11월 일본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손기정은 김교신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교신은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 하면서도 자동차 뒤창에 얼굴을 보였고, 손기정이 코스를 달리는 내내 그의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대표선수 선발에 어려움을 겪었던 제자에 대한 안쓰러움과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한(痛恨)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송두용(1904~89)은 충북 영동에서 어린 시절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살았을 정도로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자랐다. ‘성서조선’ 동인 6명 중 막내로 스승과의 만남은 3년에 불과했으나 우치무라의 성서 집회를 통해 신앙을 배웠다. 우치무라가 별세한 1930년 ‘성서조선’에 기고한 글 ‘은사 우치무라 간조 선생’에서 송두용은 스승에게서 ‘산 신앙’을 배웠노라고 고백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그 많던 땅을 소작인들에게 헐값에 매각 처분했다. ‘한국의 톨스토이’라는 별명 그대로다.

노평구(1912~2003)는 배재고보에 다니던 1930년 초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하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학업의 길이 막히자 마포 도화동 산동네에서 빈민 어린이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어느 날 종로에서 서점에 진열된 ‘성서조선’을 발견한 후 김교신을 만나 스승으로 모셨고, 김교신의 권유로 일본에 가서 우치무라의 제자인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와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문하에서 1945년까지 10년간 성경을 공부했다.

광복 후 노평구는 김교신의 ‘성서조선’의 뒤를 이어 월간 ‘성서연구’를 창간해 50여 년 동안 500호를 발간했고, 일생 주일마다 종로 YMCA회관에서 성서연구 집회를 주최했다. 김교신에 이어 한국 무교회 운동을 이끈 노평구는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규정하고, 직설적이고 통렬한 어조로 한국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꾸짖었다. 그는 한국 기독교가 외형은 커졌지만 콘텐트가 빈약하므로 그 부분을 무교회 진영이 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노평구의 제자로는 고려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유희세, 충남 홍성의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을 지낸 홍순명, 고교 교사를 지낸 한병덕, 경북대 교수 박완·진익렬, 한국기술교육대 교수 임세영, 동국대 교수 최정일, 사업가인 전희채 등이 있다. 필자도 그중 하나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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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평화 외치며 전쟁하는 일본, 하나님이 불벼락 내릴 것”

2010.04.06 15:03 입력 / 2010.04.06 15:11 수정

부활절 아침에 ‘일본의 양심’ 우치무라 간조의 기독교 정신을 찾아서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4일 부활절의 아침이다. 부활절은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날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믿을 수 없는 일을 믿음으로써 시작됐다. 부활 사건은 미스터리다. 그러나 신생의 역설이 담겨 있다.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만 새로운 탄생이 가능하다는 역설이다. 신생의 역설은 기독교 안에 끊임없이 자기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어 왔다. 인류 문명의 진전에도 기여했다.

일본 근대사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1861~1930)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신앙의 자기혁신이란 면에서, 국가의 양심 회복이란 면에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지성이다. 제도적 교회의 독선을 경계하는 무교회 신앙을 열었고, 전쟁을 일으킨 조국에 대해 “하나님이 불벼락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해 국가의 적으로 낙인 찍혔다. 김교신·함석헌·송두용 같은 이를 제자로 삼아 한국 지성사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선 기념우표가 나올 만큼 유명하지만 현대 한국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침 지난주 우치무라 선생 80주기를 맞아 중앙SUNDAY가 도쿄에서 그의 흔적을 찾는 여행� 했다. 우치무라의 끝없는 자기혁신적 신앙, 부활의 신앙을 추적했다.

1923년 62세 때의 우치무라 간조. 이 무렵 그는 이마이칸에서 성서 강연에 정열을 쏟았다. [ICU 제공]
도쿄 시부야역에서 걸어서 7분 정도에 있는 금속노동회관 3층 회의실. 일요일인 지난달 21일 오전 10시. 공무원을 정년퇴임한 반나이 무네오(坂內宗男·76)의 성서 강의가 한창이다. 30여 명 되는 청중 대부분은 60~70대다. 800만의 신이 산다는 일본에서 그의 강의 제목은 ‘유일한 하나님을 따르다’였다. 반나이는 출애굽기 20장 3, 4절을 읽었다. 3절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이고 4절은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이다. 반나이는 “15년 전쟁(1931년 만주사변부터 1945년 2차대전 종전까지) 때 피침략국, 특히 한국 기독교도들의 수난에 대해 냉담했던 것,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게 하는 데 가담한 것은 3절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4절을 들어 일본의 천황제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했다. 교회건물도 십자가도, 목사도 없는 무교회주의자의 성서집회는 1시간40분 만에 끝났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모습 여전히 간직
매주 열리는 무교회주의자들의 성서집회는 132년 전인 1878년 홋카이도(北海道)의 삿포로 농업학교 기숙사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같은 형태로 시작됐다. 당시 17세의 앳된 학생이었던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에 함께 입문한 동기생 7명과 일요일과 수요일에 모임을 가졌다. 기숙사 방에는 밀가루 통에 파란 담요를 덮은 강단이 만들어졌다. 지도자는 학생들이 돌아가며 하고 참석자들이 한마디씩 자기 얘기를 했다. 이런 집회 방식은 지금도 비슷하다.

우치무라가 일본 열도를 흔든 사건은 30세의 꽃미남 교사였던 1891년 1월에 발생했다. 도쿄 제일고등중학교 강당엔 교사 60명과 학생 1000여 명이 모였다. 단상엔 ‘일본인의 신’이었던 메이지 천황의 초상과 그가 서명한 교육칙어가 놓여 있었다. 칙어 낭독이 있은 뒤 한 사람씩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셋째로 올라선 젊은 교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절을 하지 않았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신앙인에게 천황은 그저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웅성거림은 소란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전대미문의 이 사건을 앞다퉈 보도하면서 ‘불경사건(不敬事件)’으로 명명했다. 우치무라는 이 사건으로 학교에서 쫓겨난다. 국가와 국민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다. 이후 다른 학교에 취업을 했으나 그곳서도 오래 근무하지 못했다. 불경사건의 주인공은 군국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조국의 종말을 예언했다.

러일전쟁(1904~1905년)이 끝나 온 나라가 승전 분위기에 도취해 있을 때 우치무라는 “앞으로 일본은 동양평화를 위한다면서 더 큰 전쟁을 할 것이다. 그러면 가이사마(하나님)가 일본에 불벼락을 내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30년에 타계했지만 그 뒤 일본은 실제로 더 큰 전쟁을 벌였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하늘에서 불벼락(원자폭탄)을 맞았다.

우치무라는 동양평화를 명분으로 한국침략이 당연시되던 지적 풍토에서 보기 드문 친한파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있자 ‘조선에서 일본인의 대실패’라는 글을 썼다. 1910년 한일병탄 때 그는 “나라를 잃어 슬픔에 잠긴 민족을 생각했다. 일본은 영토를 넓힘으로써 영혼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직장을 잃고 우치무라는 강연과 저술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도쿄 기독교 청년회를 상대로 1915, 1917, 1922년 세 차례에 걸쳐 성서 강의를 한다. ‘성서연구회’를 만들고 『성서의 연구』란 잡지를 출간했다. 김교신·송두원· 함석헌 등 한국 무교회주의 1세대들이 우치무라의 강의를 들은 것도 이때다. 우치무라는 일기에서 “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조선인이다. 그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성서연구회를 한 보람이 있다”고 썼다.

복음엔 국적 없지만 기독교인에겐 국적 있다
다시 2010년의 도쿄. 우치무라가 강연을 했던 이마이칸(今井館·이마이라는 사람이 기증한 건물)은 원래 신주쿠에 있는데 1935년 지금의 메구로구로 옮겼다. 성서강의장에는 지금도 우치무라가 사용했던 강단과 의자가 놓여 있다. 2층짜리 건물인 자료관에는 우치무라의 강연 내용과 저작물이 빼곡히 쌓여 있다. 그곳에서 전철로 40여 분가량 떨어진 우추시의 공원묘지에는 석묘로 된 우치무라의 무덤이 있다. 우치무라의 묘에서 하나 건너 이마이칸을 기증한 이마이의 무덤이 있다. 마침 춘분을 맞아 다녀간 성묘객이 두고 간 꽃이 보였다.

묘비명은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라고 쓰여 있었다. 69세에 세상을 떴지만 묘비명은 20대 미국 유학 시절에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유학을 떠나기 전 삿포로 농학교 졸업식에서 우치무라는 친구들과 함께 평생을 두 개의 ‘J’에 바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을 가졌다. 두 개의 J는 예수(Jesus)와 일본(Japan)이었다. 젊은 시절 우치무라 선생의 영향을 받은 김진홍 두레교회 목사는 ‘두 개의 J’에 대해 “선생이 복음에는 국적이 없지만 크리스천에겐 조국이 있다는 인식에 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과 일본, 일본과 세계, 세계와 예수, 예수와 하나님을 일체화하는 무교회신앙은 가장 개인주의적이면서도 가장 민족적이며 가장 개방적인 독특한 가치관을 성립시켰다. 이런 가치관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과학주의가 충돌 없이 조화하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했다. 사회주의에 대한 우치무라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는 ‘사회주의’란 제목의 글에서 “기독교와 흡사하면서 가장 다른 것이 사회주의다. 성서에서 말하는 소위 불법이 숨은 자이다. 불평과 완강과 파괴의 사상만이 있다”고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본성이 제국주의자와 똑같이 싸움을 좋아하는 체질이라는 주장도 했다.

우치무라가 한 번 성서 강의를 하면 300~400명이 몰려 들었고, 강의가 끝난 뒤에도 그 숙연한 깨달음에서 헤어나지 못해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형성된 제자들은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도쿄대 총장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정부를 비판하다 학교에서 쫓겨났다. 야나이하라 말고도 도쿄대 총장 2명, 문부대신(교육부 장관) 5명이 우치무라의 제자 그룹에서 배출됐다.

우치무라 정신의 향기는 문필에서 느껴진다. 간결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언어들이다. 기성관념과 제도신앙에 젖은 사람들을 찔끔찔끔 놀라게 하는 말들이 많다. “하나님, 나는 당신에게 나와 내 집을 축복해 주십사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나를 당신의 것으로 써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사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치게 해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치무라는 세상을 회피하는 나약한 인간형은 아니다. 그 반대다. “세상을 피하려고 하지 말라. 세상을 이겨야 한다. 환경이 개선되길 기도하지 말라. 마음이 개선되길 기도하라.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말라. 은총이 더하기를 바라라. 밖으로 부유해지고 흥하기를 바라지 말라. 안으로 기뻐하고 즐거운 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은 희망의 동물이다. 앞을 바라봄이 자연스러우며 뒤를 돌아다 봄은 부자연스럽다. 희망은 건전하며, 회고는 불건전하다. 죄를 잊어 버리고, 병을 잊어 버리고, 실패를 잊어 버리고, 원한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과 생명과 성공과 사랑을 향하여 나아갈 뿐.”
관념성을 떨치고 실용적 삶을 촉구하는 글들도 많다. “인간의 가치는 그의 ‘지금’의 가치다. 그의 과거의 가치가 아니다. 그가 과거에 선인이었다 해도 ‘지금’ 악인이라면 그는 악인이다. 그가 과거에 악인이었어도 ‘지금’ 선인이면 그는 선인이다. 그의 가치는 그의 ‘지금’의 가치다. 우리는 그의 과거를 따져 그의 가치를 정하지 않는다.”

우치무라의 출생과 교육, 회심은 흥미진진하다. 우치무라는 “나의 아버지는 훌륭한 유교학자였고, 공자의 기록과 말씀을 거의 대부분 암기하셨다 ”고 회고했다. 우치무라는 유교적 전통이 있는 사무라이 가정에서 자라면서 일본의 신사마다 있는 수없이 많은 신을 믿었다. 그는 신마다 다른 금기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애썼고 그것이 날마다 늘어나고 모든 규칙을 지켜 신을 만족시키기가 어려운 지경이 돼갔다. 우치무라는 그즈음 “드디어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고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서 적었다. 16세 때 삿포로 농업학교에서 만난 유일신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그의 발언은 소박했다. “새로운 믿음의 실용적인 유익은 금방 드러났다. 내가 믿어왔던 800만 이상의 많은 신을 버림으로써 (금기나 규칙들은) 전부 쓸모없는 것들이 돼 버렸다.”

삿포로 농업학교 학생들을 기독교 세계로 이끈 건 미국 매사추세츠 농업대학 학장 출신으로 이 학교에서 8개월간 교무주임으로 근무하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W S Clark) 교수다. 클라크 교수는 이 학교 1기생 16명을 모두 개종시켰고, 이 1기생들이 2기생인 우치무라를 전도했다. 클라크 교수는 귀국할 때 하얀 눈길 위를 말을 타고 학교를 떠났다. 그때 작별 인사로 클라크 교수가 남긴 말은 아시아에서 매우 유명한 말이 되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 이 장면을 형상화한 큰 유화 그림이 지금도 홋카이도 도청 2층 기념관에 걸려 있다.

도쿄=송상훈 중앙SUNDAY 사회탐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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