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분단현장을 가다 제1부 -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④ 임진강 [중앙일보]

2010.04.13 01:17 입력 / 2010.04.13 09:43 수정

[베를리너판 1년 기획] 하룻밤 새 19회 결전, 강 물줄기도 바꾼 ‘피의 능선’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 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냐.’분단의 슬픔과 통일을 염원한 북의 노래 ‘임진강’의 일부다. 북에서는 물론이고 재일조선인들과 일본인들에게 널리 애창되었던 노래다. 일본의 포크가수 가쓰히코에 의해 번안된 가사로 불리던 임진강이 남쪽에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이즈쓰 가쓰유키 감독의 ‘박치기’라는 영화를 통해서다.

빛과 바람, 강과 새 등 자연은 철책선을 넘어 자유롭게 남북을 오간다. 남쪽 사람이든 북쪽 사람이든 사람들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철책선을 넘나들지 못한다. 함경남도 원산의 두류산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군사분계선을 지나 남방한계선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기도 연천군 필승교에 도착해야 비로소 남녘땅을 적신다.
노래 임진강이 이 땅에 흘러들기까지 꽤나 먼 길을 달려온 셈이다. 임진강의 물줄기는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흐르는데, 같은 정서와 소원을 담은 노래 임진강은 이국의 언어로 재번역돼서야 남쪽 땅에 겨우 닿았다.

빛과 바람, 강과 새 등 자연은 철책선을 넘어 자유롭게 남북을 오간다. 남쪽 사람이든 북쪽 사람이든 사람들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철책선을 넘나들지 못한다. 함경남도 원산의 두류산에서 발원한 임진강은 군사분계선을 지나 남방한계선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기도 연천군 필승교에 도착해야 비로소 남녘땅을 적신다.임진강은 지나간 전쟁의 역사와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을 그대로 보여주는 강이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와 당나라, 조선과 일본, 한국과 중국, 중국과 영국, 그리고 현재의 남과 북까지. 구비구비마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강에 성벽을 쌓고 철조망을 두르고 피를 흩뿌린 것은 인간들이다. 강은 그저 바다를 향해 묵묵히 흐를 뿐이다. 임진강 맑은 물을 따라 흘러보기로 한다.

태풍전망대에 오른다. 남쪽에서 볼 수 있는 임진강의 최상류 지점이다. 군사분계선은 임진강 허리를 툭 자른 다음 강의 중심을 따라 길게 이어지다 연천평야 쪽으로 향한다. 물론 말뚝 하나 없는 허상의 선이지만 긴장의 선이기도 하다. 태풍전망대와 군사분계선의 거리는 불과 800m. 북의 초소에서 사정거리 안쪽에 있어 방탄유리로 둘러쳐진 최긴장의 전망대다.

강 건너 연천평야를 감싼 나지막한 두 개의 산이 보인다. 피의 능선이라 불리는 베티고지와 노리고지다. 전쟁의 막바지,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는 산의 높이를 낮추고 강의 물줄기를 바꾸고 못의 모양을 바꾸었다. 13시간 동안 19차례의 결전, 국군 30명과 중공군 3000명의 전투. ㎡당 4700발의 탄약, 중공군 2700명과 국군 700명의 목숨. 베티고지와 노리고지를 설명하는 이 숫자들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임진강을 따라 내려오다 처음으로 만나는 다리는 필승교다. 민간인 통제구역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다리다. 전쟁 전에 사용되었던 목조다리에는 철조망이 휘감겨 있다. 다리를 밟아 강을 건널 수 있는 것은 무성한 잡초들뿐이다. 태풍전망대 앞 임진강 줄기가 군사분계선이라면 필승교는 남방한계선을 긋는다. 강은 다시 거친 물살로 구비를 돌아 돌아 도감포로 향한다. 합수머리에 이르러 한탄강과 만난다.

필승교 옆에 서 있는 목조현수교의 모습. 목조 현수교는 군 작전용 교량으로 이용됐으나 1986년 필승교를 건설한 뒤 사용을 중단했다.
개여울나루를 힘차게 돌아나온 임진강은 두지나루에 와서 잠시 숨을 고른다. 두지나루에는 복원된 황포돛배가 있다. 지금이야 시간마다 운항하는 관광배이지만 예전에는 소금·새우젓·인삼 등을 싣고 서울의 마포나루와 두지나루를 오가던 배였다. 옛사람들은 무명천에 황토 물을 들여 돛을 달고 나무로 짜 맞춰 뒤틀림 없이 튼튼한 황포돛배를 만들어 띄웠다고 한다. 두지나루에서부터 고랑포까지는 강줄기가 시원하게 곧장 뻗어 있다. 남방한계선도 군사분계선도 없다. 수직으로 층이 난 적벽이 고샅길 정겨운 담장처럼 이어진다.

고랑포구에서 잠시 배를 댄다. 고랑포구는 임진강 하류에서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붉은 암벽이 천혜의 방패 역할을 하니, 강을 건너려는 자는 반드시 이곳을 통하게 마련이다. 북한군 전차부대가 개성에서 문산으로 직진하지 않고 이곳으로 건너왔다. 고랑포구 옆에 있는 호로고루성은 백제가 쌓고 고구려가 개축한 성으로 후에 신라와 당나라군의 격전장이 되기도 했다. 호로고루성에 오르니 시야가 탁 트인다. 고랑포구를 차지한 것은 무성한 잡초와 백사장이다. 전쟁 전 이곳에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번성하던 한 도시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위엔 적막한 긴장만이 감돌고 있다.

고랑포를 떠나 임진나루에 도착한다. 임진나루는 굴욕의 역사를 숨기고 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피란길을 떠난다. 선조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고 한다. 야반도주하는 왕의 길을 밝히기 위해 임진강 남쪽 언덕에 있는 승정을 헐어 불을 피웠다. 그것이 화석정이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던 이이가 관직을 물러나 제자들과 여생을 보낸 장소라고 알려진 곳이다. 선조가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였다면 수모와 굴욕의 피란길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화석정을 불태워 피란의 불을 밝힌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임진각 철교를 지나 하구 쪽으로 성큼 내달린다. 강의 왼편으로는 문산의 아파트 단지이고 강의 오른편으론 장단습지다. 철조망 사이로 고라니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민통선 안의 너르게 펼쳐진 갈대 숲에선 독수리들이 월동을 한다. 검은 도포를 둘러쓴 독수리들이 전봇대마다 앉은 모습은 괴기스럽지만 신비롭기도 하다.

지난달 25일 낙하나루 주변의 임진강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물결이 높았다. 낙하나루는 임진강에서 어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최하류다. 동력선을 사용할 수 없어 노 젓는 배를 이용해 고기를 잡아야 한다. 취재진의 요청을 받은 어부는 배를 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로통제선이 저 앞이라며 뱃머리를 돌렸다.
낙하나루에서 고깃배를 빌려 탄다. 임진강에서는 황복과 참게잡이가 유명하다. 장어 실치를 잡아 양식장에 넘기는 것도 쏠쏠하다. 이곳의 고깃배는 모터를 달지 않고 직접 노를 젓는 배다. 얼마간 노를 젓던 어부가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한다. 손가락을 들어 저 앞이 어로통제선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저 강물일 뿐인데, 또다시 앞을 가로막는다. 이제 배를 돌려 다시 낙하나루로 돌아가야 한다. 사람은 여기서 멈춰서야 하지만 강은 군사분계선을 품은 채 하류로 흘러간다. 임진강은 한강과 만나 더 큰 물줄기로 돌다가 바다로 흘러들 것이다.

천운영·소설가

특별취재팀 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 국방부·육군본부, 국군 1·9·25·28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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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분단현장을 가다]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③ 철원 ‘철의 삼각지 [중앙일보]

2010.04.06 01:53 입력 / 2010.04.06 11:36 수정

열흘 새 24회 뺏기고 뺏은 백마고지
역전의 팔순 노병에겐 아직 전투 중

평상시 교통의 요지는 전시엔 전략의 요충지가 된다. 전선도 결국 길을 따라 번지기 때문이다. 경원선이 지나고 금강산 전기철도가 시작되는 철원이 그랬다. 격전을 치른 백마고지(395m)도 분단의 상징으로 철원평야에 솟아 있다. 지난달 15일 GOP의 벙커에서 바라본 DMZ는 이곳에서 전사한 수만 명의 고통과 절규를 잊은 채 잠자고 있는 듯 고요했다. [철원=김태성 기자]

강원도 철원군 관지리 노동당사가 탄흔을 안고 폐허로 서 있다. 노동당사는 철원 땅이 해방과 분단을 거치며 어떤 유전을 겪었는지 한눈에 보여준다. 38선 이북 지역인 철원·평강·김화·포천 일대는 인공 치하 5년 동안 이 노동당사의 관할 아래 있었다. 노동당사는 과거 인구 3만의 번화한 철원 시가지, 즉 구철원의 남쪽 관문이었다. 이제 민간인 출입통제소가 그 앞에 서 있다.

북한이 1946년에 지어 한국전쟁 전까지 사용한 노동당사 건물. [철원=김태성 기자]
대학생 때 김주영의 단편 ‘쇠둘레를 찾아서’를 읽고 철원을 찾았다. 쇠둘레는 구철원의 옛 이름으로 소설 속 인물들은 전쟁 전 기억을 갖고 철원을 찾아 헤매다가 종내에는 신철원과 구철원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구철원 일대는 전쟁 후 오랫동안 민간인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는 금단의 땅이었다. 1988년 안보관광지로 민간에게 개방되자 이곳을 고향으로 둔 실향민들이 많이 찾았고, 그들은 소설의 주인공처럼 기억의 미로에 빠져버렸다. 옛 시가지는 흔적이 없었다. 금융조합, 농산물검사소, 얼음창고와 제사(製絲)공장의 잔해가 드문드문 풀숲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역무원 80명이 근무한 경원선 철원역사도 터만 남아 있었다. 나 역시도 물어 물어 찾으면 쇠락한 읍 거리쯤은 만나리라 생각했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옛 철원은 실향민의 기억 속에나 존재할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땅이었다.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 회장. [철원=김태성 기자]
철원 가는 길에 동행한 백마고지참전전우회 박명호(80) 회장은 마지막 시가지 모습을 군인의 눈으로 목도했다.

“기와집 천지였는데 전쟁 중에 기둥을 빼다 땔감으로 썼지. 연료 보급이 원활하지 않았으니까. 그도 없어지니 철도 전신주와 침목을 걷어다가 땠어. 철원은 그렇게 사라진 거야.”

그러고 보면 성북동에 자리한 이태준의 고택 ‘수연산방(壽硯山房)’이 철원 기와집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지 모르겠다.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1930년대 초 철원 고향집을 뜯어다가 복원한 기와집이다. 전란 전에 옮기지 않았다면 그 집마저도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겨울을 건너온 철원평야가 봄비에 깨어나고 있다. 철원평야는 대부분 DMZ와 민통선 이북에 들어 있다. DMZ 10㎞ 이내의 통제보호구역 토지가 새만금의 1.2배에 달한다. 민통선을 아침저녁으로 들며 농사짓는 영농인들이 7000명에 이른다. 이제 곧 농민들이 들어 토지를 경작할 것이다. 빈 들에는 한창 북상 채비에 바쁜 재두루미와 쇠기러기들만이 인기척에도 아랑곳없이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두루미는 서너 마리씩 가족 단위로 찬 하늘을 날아오는 철새다. 철원평야가 생명의 땅, 평화의 땅이라는 걸 알리는 영물 같다.

비가 멎고 황사가 씻긴 평화전망대에서 북을 바라본다. 멀리 평강고원이 몽골의 초원처럼 펼쳐진다. 마식령산맥도 지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밀려나 있다. 문득 몇 겹의 시간 속에 놓인 듯 마음이 맥맥해진다. 궁예의 도성 터는 DMZ 풀숲에 숨어 가물가물하고, 북방에서 불어오는 칼바람만이 요요하다. 궁예와 그 군사들이 거침없이 군마를 몰았을 것이다. 중부 준령들 틈에 너른 들을 가진 세 고을 철원·김화·평강을 일러 ‘철의 삼각지’라 했다. 철원·김화는 사라지고, 평강은 낙타고지 뒤에 숨은 이북 땅이 되었다. 이 드넓은 평야를 남북 어느 쪽도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백마고지 전적기념관 앞에 세워진 위령비. [철원=김태성 기자]
서편 DMZ에 자리 잡은 백마고지. 이 유명한 고지가 고작 해발 395m다. 이를 두고 중공군 4만5000과 국군 2만이 열흘간 스물네 번이나 주인을 바꿔가며 격전을 치렀다. 피아간 27만여 발의 포탄을 쏟아붓고 백병전이 치열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국군 3500여 명, 중공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세계 전사에서도 유례 없는 격전.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전의 유구한 상징이 되었다. 전쟁에 대해서는 한 치의 치욕도 용납할 것 같지 않은 박명호 회장도 “한마디로 끔찍한 전쟁이었다”고 어깨를 떤다.

“고지를 탈환하고 보고를 한단 말이야. ‘정원 178, 사망 80, 후송 71, 현재원 27!’ 신병으로 보충 병력을 채우는데 처음에는 무슨 짐승들처럼 얼이 빠져서 몰려다녀. 하루 투입되고 전사한 병사가 수두룩했지. 그러나 전투가 거듭되면 악이 생겨. 그것을 뭐라 해야 할까. 죽어도 괜찮다는 이상한 심리상태에 빠져서 싸웠지.”

그는 백마고지를 가리키며 무의식적으로 너덧 번이나 흙이 붉은 능선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저 회색빛 낮은 능선일 뿐이었다. 붉은 능선 또한 미로에 빠진 기억일 테다. 이런 가혹한 전투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상징이 된 전사(戰史)는 드높으나 간결하다. 기록은 이 비참한 전투의 실상을 다 말해주지 않는다. 눈앞에서 전우들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어떻게 매일 전선에 다시 설 수 있었을까.

백마고지에서 살아남은 전우들이 이제 500명 남짓 생존해 있다. 노병들은 백마고지가 건너다 보이는 대마리 언덕에 위령비를 세우고 매년 서너 번씩 찾는다. 생존과 승리를 자축하기 위한 발걸음이 아니다. 곁에서 죽어간 전우들뿐 아니라 중공군까지 애도하기 위해서다. 그런 회원들이 매년 이삼십 명씩 유명을 달리하고 있다. 이제 삼사 년이면 노병들의 증언도 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3월 15일 저녁, 박명호 회장은 철원 동송읍에 사는 옛 전우를 저녁자리에 불러냈다. 정해영(81세) 할아버지. 3급 상이군인이다. 그에게도 전쟁의 기억이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손부터 내저었다. 그런 그가 술기운을 빌려 비로소 깊은 기억을 길어낸다. 부여가 고향인 그는 아내와 딸을 두고 참전했다. 9사단 30연대 기관총 사수로 백마고지 탈환 후 저격능선 전투에서 포탄 파편에 중상을 입고 18개월 만에 전역했다. 고향에 돌아가 누워서도 60년을 전장의 악몽으로 뒤숭숭했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살다 보니 전장 부근으로 돌아와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전쟁 후 얻은 아들과 함께 목장을 일구러 왔다가 철원에 터를 잡았다.

“전장에서 하루 넘어가는 게 십 년 같았지. 우리한테는 제대라는 게 없었어. 여기서는 죽거나 부상당해 나가는 길밖에 없었지. 뒤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도 사라져. 그런데 그런 끔찍한 전쟁이라도 인생은 못 당해. 저 땅처럼 말이야.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가잖나.”

그리고 정 할아버지는 평생 달고 살던 전쟁의 악몽을 근래에 꾸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박(朴)의 전쟁이고, 정(鄭)의 전쟁이다. 저녁이 내린 길로 노인이 등을 보이고 사라졌다. 철새들이 하룻밤 묵을 둥지를 찾아 부산하다.

전성태·소설가

◆소설가 전성태=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1994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지금까지 세 권의 소설집(『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과 장편소설 한 권(『여자 이발사』)을 냈다. 작품 수가 많지 않지만 참신한 소재, 진정성 어린 글쓰기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라져가는 농촌 공동체의 실상을 다룬 『매향』은 김유정·이문구식 해학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다. 『여자 이발사』는 일제 시대 조선 남자와 결혼해 해방 직후 서울 청계천변에 정착한 한 일본인 여성 이발사의 인생 유전을 다룬 소설이다. 지난해 나온 소설집 『늑대』는 주로 몽골 여행 경험을 다룬 것이다. 이 소설집으로 채만식문학상·이무영문학상 등을 받았다.


관광객·전쟁물자 날랐던 금강산열차

철원·김화·평강 ‘철의 삼각지’ 통과
전쟁 통에 뜯겨나간 철길 흔적만


백마고지는 ‘철의 삼각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철의 삼각지(Iron Triangle Zone)는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밴 플리트 장군이 작전 수행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만든 용어다. 철원·평강·김화 등 3개 군(郡)을 아우르는 삼각형 지역의 지형이 북으로 갈수록 해발이 높아져 미군과 한국군이 공격은 물론 방어에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삼각지 안의 철원평야는 김일성이 애지중지했던 곡창지대이면서 전차가 기동할 수 있는 핵심 길목이었다. 그 때문에 이를 차지하기 위해 김일성 고지, 오성산, 아이스크림 고지 등 일대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백마고지 전투도 그런 격전지 중 하나였다.

교통 요지이다 보니 철의 삼각지에는 자연스럽게 철로가 놓였다. 경성과 원산을 연결했던 경원선, 철원에서 갈라져 금강산으로 이어졌던 금강산전기철도가 모두 이 지역을 통과했다. 금강산전기철도는 흔적만 남아 있다. 일제 말기와 한국전쟁 막바지 철 공급이 달리자 필요에 따라 철로를 뜯어다 썼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철원군 정연리 철교 정도다.

민통선 안에 있는 철원군 양지리 양지마을에서는 철도를 이용했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산 김옥순(69) 할머니는 “어렸을 때 금강산전기철도를 타고 철원읍에 영화 보러 간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철도는 일본 회사인 철춘(鐵春)철도주식회사가 1921∼26년 철원에서 창도까지 60여㎞ 구간을 1차로 완공했다. 창도는 지금은 북한 땅이다. 이곳에 풍부한 유화철을 철원까지 실어 나른 후 경원선을 이용해 흥남제련소로 수송하려는 목적이었다. 철도는 1926∼31년 창도~내금강 구간 50㎞가 추가되면서 금강산 관광열차로 인기를 끌었다.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116.6㎞를 네 시간에 달렸다. 요금은 쌀 한 가마 값인 7원56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철원역사문화연구소 김영규 소장은 “한국전 직전 북한군이 전기철도로 화포·탱크를 실어 날랐다고 증언하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철도는 한국전쟁의 목격자인 셈이다. 철원에서 시작하는 28개 역 중 여덟 번째인 유곡역이 남한 최북단역, 다음 금곡역부터는 DMZ이거나 북한 땅에 포함돼 있다.

특별취재팀 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 국방부·육군본부, 국군 5사단·6사단·15사단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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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② 백령도 [중앙일보]

2010.03.23 01:45 입력 / 2010.03.24 09:29 수정

남쪽 벌컨포 북쪽 해안포 서로의 총구가 교차하는 긴장의 섬

DMZ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병사들은 야간 경계 근무에 들어간다. 2009년 11월 19일 저녁 무렵 해병대 병사들이 백령도 서북쪽 해안 철책 근무에 투입되고 있다.
남한에서 갈 수 있는 최북서쪽의 섬 백령도. 역사적으로 오랜 유배지의 땅이었고, 중국을 오가는 뱃사람들의 땅이었고, 서구 침략의 한 경유지이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동키부대와 같은 유격대가 탄생했고 해병대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해전이 일어나고 포성 소리가 오가는 긴장의 땅이다.

6·25 땐 치열한 전장이었고
지금도 해전이 벌어지는 섬


설핏 잠이 들었다. 잠이 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파고였다. 잠결에 여인의 흐느낌 같은 소리를 들은 듯했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림 같기도 하고 노인의 길쌈 소리 같기도 했다. 눈을 뜨면 소복을 입은 여인의 뒤태가, 길쌈하는 노인네의 웅크린 등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백령도는 여인의 섬이 아니다. 백령도는 지극히 남성적인 섬이다. 두무진의 기암괴석은 힘이 넘치면서 장대하고, 섬을 휘감고 도는 물살은 포악하기까지 하니 백령도는 그야말로 남성적인 섬이다. 그런데도 나는 백령도로 가는 배 안에서 여인들의 환영을 꿈결인 듯 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중순, 배는 용기포 부두에 다다랐다. 흰 새의 날개를 닮았다 하여 백령의 이름을 가졌으니 용기포는 수면을 차고 오르는 새의 발에 해당한다.

용기포 부두를 뒤로하고 심청각으로 향했다. 북쪽 땅과는 불과 17㎞. 북쪽의 해안포가 배치되어 있다는 동굴진지는 육안으로도 가늠할 수 있었다. 남쪽의 벌컨포와 레이더가 그쪽을 향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서로의 총구가 교차하는 바다 한가운데 허상의 선이 있다.

철조망도 없고 초소가 딸려 있는 건 아니지만 첨예한 대립과 극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선이다. 북방한계선(NLL)이 저 선이고, 북쪽이 주장하는 해상경계선이 저보다 한참 남쪽에 위치하니 일촉즉발의 상황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 선을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는 건 그야말로 철새들과 중국 어선뿐이다. 때마침 중국 어선이 그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 서쪽으로 유유히 가고 있었다.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 바다에 인당수가 있다.

심청을 태운 남경상인의 배가 지날 때 저 바다는 어룡이 싸우는 듯 벽력이 일어난 듯 들끓었다지. 뱃전을 잡고 기절하여 엎드린 심청을 뱃사람들이 둥둥 북을 울리며 재촉했다지. 심청은 그래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한 점 낙화가 되었다지. 무정한 뱃사람들은 술 한 잔씩 담배 한 대씩 먹고 그곳을 떠났다지. 흰 소복이 펄럭이기라도 한 듯 눈앞이 뿌예지는 기분이었다.

백령도 북쪽 바다에 인당수가 있다면 남쪽 바다에는 연봉바위가 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위에서 보면 연꽃 모양 같다고 해서 연봉바위라 부른다. 여기 사람들은 연봉바위가 심청을 태운 연꽃이 상륙한 곳이라 믿고 있었다.



저 너머가 내가 태어난 장연
칠순 할머니의 60년 망향가


백령도에 꽃처럼 닿은 사람들은 전설 속의 심청만은 아니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이 상륙한 이후 1·4 후퇴로 서울이 함락될 때도 백령도는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니 황해도를 비롯한 서쪽 지역의 피란민들이 백령도 일대로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자라 일곱 살 때 백령도로 흘러든 이순녀(70·사진) 할머니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소녀는 일가친척들과 함께 배를 탔다. 부모님은 고향 땅에 남았다. 포성이 울리고 불꽃이 번쩍이는 동안에도 두려움보다는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혼령기가 된 소녀는 고향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대청도·연평도·인천으로 떠돌다가 결국 고향땅이 지척으로 보이는 백령도에 정착했다. 그 소녀가 지금은 칠순의 할머니가 되었다. 그나마 고향의 기억을 공유하던 할아버지는 몸져 누웠고 육지로 떠난 자식들은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하루 아홉 시간 공공근로사업에 나가서 받는 돈이 수입의 전부. 병들고 고된 삶이지만 끝끝내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죽기 전에 고향땅 한번 밟아 보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 할머니는 연봉바위가 바라다 보이는 전망대 근처에서 해당화를 심고 있었다. 찬 돌바닥에 주저앉아 자꾸만 먼 바다로 시선을 돌리던 할머니의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곳이 고향 땅에서 젤로 가까운 걸, 안 그나? 저 너머가 바로 내가 태어난 장연이다, 아나?”

얼결에 잡은 그녀의 손은 그녀의 삶처럼 거칠고 뻣뻣했다.

전쟁 당시 백령도는 몰려든 피란민들로 포화상태였고 일대 혼란을 이루었다. 피란민 중 청년들의 대다수는 유격대나 해병에 자원했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빨리 전쟁을 끝내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유격대가 일명 동키부대다. 동키부대는 억세고 충실하며 참을성 있고 싸움을 잘하는 당나귀의 천성과 연결시킨 미군의 명명이었다.

동키부대는 한국전쟁 기간 중 3만2000여 명의 대원이 참전해 백령도는 물론이고 서해 연안도서를 책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동키부대는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로 명명된 것인 데다 참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던 동키부대원들은 국가 유공자로 선발되지 못했다. 백령도 진촌리 일대에는 레오파드 기지 예하의 동키부대가 사용했던 막사와 우물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여전히 전쟁 중인 분단의 바다
모든 섬들이 조용히 떠 있다


진촌에서 만난 서병순(78) 할아버지는 해병대에 입대해 두 달 훈련 만에 서부전선으로 투입되어 열흘도 못 되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뭔가 뜨거운 게 쑥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 몸에 박힌 게 파편인 줄이나 알았나.”

할아버지는 부상 당시의 상황을 기억해 내며 허리에 남은 상처를 보여주었다. 함께 해병대에 입대했던 여남은 명의 동네 청년들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둘뿐이었다니 부상은 당했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도 다행이었다.

백령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거나 고향을 지척에 두고 싶은 실향민이다. 혹은 도시를 헤매고 헤매다 섬으로 숨어든 이들도 있었다. 섬은 어쩌면 그 자체가 긴장인지도 모른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모든 섬들은 조용히 긴장을 유지하며 떠 있다. 백령도는 그야말로 긴장의 섬이다.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긴장 그 자체다. 지금 백령도를 긴장케 하는 것은 여전히 전시 중인 한반도의 분단 상황일 것이다. 다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향하는 길, 뱃길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천운영 소설가

◆소설가 천운영=연재를 맡은 소설가 천운영(39·사진)씨는 문신사(文身師)의 세계를 다룬 단편 ‘바늘’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꼼꼼한 취재와 탄탄한 글쓰기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다. 소설집 『명랑』 『그녀의 눈물 사용법』, 장편소설 『잘가라, 서커스』 등을 냈다. 현재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소재로 한 장편 ‘생강’을 창비의 문학 블로그 ‘창문(blog.changbi.com/lit)’에 연재 중이다. 1971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취재=협조 국방부·육군본부 해병대 사령부

백령도는 인천보다 평양 가까운 서해 최북단 섬

인천시 옹진군 백령도는 북위 37도 52분에 위치한 서해 최북단의 섬이다. 인천에서보다 평양에서 더 가깝다. 북한 땅 장산곶까지 17㎞, 장산곶 앞바다의 월내도까지는 불과 13㎞ 거리다. 취재진이 백령도를 찾은 것은 대청해전 발생 9일째인 지난해 11월 18일이었다. 백령도에 주둔 중인 해병대 관계자는 “남한에서 국지전이 발생한다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의 하나”라고 말한다.

6·25 때만 해도 백령도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인민군 1개 대대가 서쪽 연화리 해안으로 상륙해 섬을 장악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철수한 뒤 내내 국군이 점령했다. 양측 간 교전도 없었다. 백령도가 전략적으로 급부상한 것은 1973년 북한이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을 부정하면서부터다.

NLL은 53년 8월 31일 유엔군이 아군 함정·항공기 등의 북방 활동 한계로 삼기 위해 설정했다. 수십 년간 유지되며 국제법상 유효한 남북한 간 해상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일종의 영토 개념이다. 그러나 북한은 제1 연평해전(99년)과 제2 연평해전(2002년) 등을 일으켜 NLL 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NLL의 턱밑에 위치해 있는 만큼 긴장도가 클 수밖에 없다. 주민 수는 5000명. 주민의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어업 인구는 6% 정도다. 남한에서 여덟째로 큰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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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멈춘 ‘펀치볼’에서 6·25를 만나다 [중앙일보]

2010.03.16 02:16 입력 / 2010.03.16 06:40 수정

베를리너판 1년 기획 - DMZ를 가다(1부)
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가칠봉 정상에서 바라본 펀치볼. 펀치볼은 강원도 양구에 있는 해안분지로 6·25 때 격전지였다. [김태성 기자]
전쟁은 몸에 새겨진다. 한 세대가 저물고 또 한 세대가 갔다. 내 몸은 전쟁의 기억을 모른다. 그런데도 전장에 가듯이 몸이 굳는다. 궁금하다. 세월을 얼마나 물려야 전쟁의 상처는 온전히 치유될 수 있을까. 첫길을 떠나며 이런 짐스러운 마음과도 저항하고 싶다. 마음은 홀홀하고 몸은 가벼웠으면 한다. 사실 그런 저항감은 나이 마흔에 이르기까지 늘 마음 한구석에 있다.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살 수 있지 않은가. 그게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휴전선이 눈앞에서 멀고 전쟁의 기억은 더더욱 멀다.

전쟁은 나에게 항상 종전이었다. 6·25는 1953년 여름에 끝난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지대는 전쟁의 현장이다. 최전방 초소 건너편 능선이 북방한계선이다. 능선과 고지를 따라 남북방 한계선 철책이 드리워져 가까운 곳은 750m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대치한다. 비극의 전장 펀치볼은 끝나지 않은 전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전쟁은 몸에만 새겨진 전쟁이 아니다. 대지에도 새겨졌다. 전쟁과 분단은 유전자처럼 세대를 거듭해 내면화됐다. 전쟁은 망각과 기억을 동시에 요구한다. 아이러니한 전쟁이다. 이것이 휴전이고, 한국전쟁의 특수성이다. 그러므로 이 발걸음에 얹히는 짐을 덜어내려는 저항도 부질없는 짓이다. 이 여행은 때로 노병들과 더불어 60년 저쪽에 가 닿아야 할 것이다. 그들이 전하는 전쟁을 받아 적을 생각이다. 긴장과 대치 속에서 생명과 희망도 찾을 것이다.

양구 가는 길에 눈이 내린다. 양구는 높고 깊은 중동부전선 최전방이다. 3월의 눈은 이 산악지방에서 대수롭지 않다. 내금강으로 드는 31번 비포장 국도가 풀려서 질척일 뿐 양구에는 아직 봄소식이 이르다. 4월 말까지 해발 1000m 넘는 준령 고지마다 적설이 남아 있다. 이곳 장병들은 양구에는 계절이 셋이라고 말한다. 빙하기와 겨울, 그리고 여름이다. 봄·가을은 흔적이 없다. 양구는 전쟁의 기억을 두껍게 덮고 있다.

태백관측소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끊긴 31번 국도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고지. 관측소가 위치한 능선을 따라 남방한계선상에 3중 철책이 드리워져 있다. 철책 너머로는 비무장지대다. DMZ 북방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에 태극기와 유엔기가 펄럭이는 우리 측 GP가 전진해 있다. 그 건너 능선은 북방한계선이다. 아군 GP 아래 골짜기에 오래전 누군가 흘린 손수건처럼 길 한 자락이 놓여 있다. 31번 국도는 북녘 땅 하청송·중청송을 지나 금강산으로 이어질 테지만 이제는 누구도 걸어갈 수 없다. 금강산까지 36㎞, 찻길로 40분. 옛 양구 학생들은 그 길을 걸어 금강산으로 소풍을 갔다고 한다. 디뎌보지 않고는 길은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철책에 막힌 풍경은 그저 그림 같은 평면이다.

1953년 맺은 휴전협정은 한국어·중국어·영어로 된 문서에 각각 서명되었다. 김일성, 펑더화이(彭德懷), 마크 웨인 클라크가 서명하였다. 클라크 장군은 파커 만년필을 치우며 “나는 이 순간이 기쁘지 않다”고 했다. 평화도 승리도 없는 휴전이었다. 서명자들이 돌아간 후 전선에 남은 소총수가 여든 살이 되었다.

휴전선 그늘 아래, 동면 팔랑2리(八郞里) 한동규 할아버지. 황해도 신계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사지(四肢)에 네 발의 총상을 입은 상이군인이다. 그는 전쟁 중 미 10군단 첩보요원으로 군번도 없이 사선을 넘나들다가 종전 후 정식 군번을 받고 18년을 직업군인으로 복무했다. 공교롭게도 전쟁 중 총상을 입은 양구에서 그는 군복을 벗었고, 부대 앞에 구멍가게를 내고 주저앉았다. 전쟁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부상으로 끝마디가 꺾여 굳은 새끼손가락을 들고 열정적이었다. 여러 전투를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꿈에 대해 묻자 시무룩해졌다.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했으나 그쪽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다. “이제야 뭘… 내 세대에서 내가 조상이 되어 사라져갈 뿐이지.” 그의 목소리는 신음처럼 들린다. 60년을 격하고 클라크 장군의 독백에 답하는 한 노병의 대답 같기도 하다.

전선이 휴전선 일대로 고착될 무렵 양구는 최대 격전장이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되자 양측은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일진일퇴했다. 그해 여름에서 가을까지 피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무명고지 전투 등에서 피아간 2만5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31번 국도는 민통선을 넘자 조브장하니 옛길의 정취를 풍긴다. 사스래나무, 갈매나무, 물푸레나무 같은 떨기나무들이 맨몸으로 적나라하다. 박수근 화백의 ‘나목(裸木)’들은 이 고향 산야에서 얻은 기억이리라. 이제 이 길은 부식 나르는 군용트럭과 그리고 멧돼지와 산양과 고라니만 다니는 길이다. 길은 사태리 계곡을 거슬러 비무장지대로 스며든다.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 가칠봉(加七峯·1242m)에 오른다. 금강산도 이 가칠봉을 더해야 비로소 일만이천봉이다. 북방한계선 너머로 매봉·첨봉·운봉·문필봉·처녀봉·쌍봉하는 금강산 자락들이 보인다. 기러기 떼가 소리 없이 하늘을 접으며 넘어간다. 등을 돌리면 산릉에 둘러싸인 드넓은 고원분지가 펼쳐진다. 전쟁 때 미군들에게 얻은 지명 ‘펀치볼(Punch Bowl)’로 더 자주 불리는 해안분지(亥安盆地) 마을이다. 분지 전체가 1개 면(面)으로 여의도의 여섯 배에 달한다. 민통선 내에 존재하는 민간 거주 지역으로는 가장 크다. 순식간에 분지 전체가 눈보라와 운무 속으로 사라진다. 꿈결에 보았다는 무릉도원을 떠올릴 만한 장관이다. 분단은 언어마저 간섭한다. 그 눈 시린 대지를 마냥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양구가 고향인 문하승(81) 할아버지.
펀치볼은 분단과 냉전의 지층과 같다. 전쟁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 같은 이 별천지는 그러나 전쟁의 무덤이 되었다. 해방 후 인공치하에 들었다가 전쟁 후 수복되었다. 전쟁 중 남은 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인민군을 따라 이북으로 소개되고, 극히 일부는 남쪽으로 피란했다. 펀치볼은 수복지구로서 54년까지 미군이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으로부터 관할권을 넘겨받은 정부는 56년 대북 선전촌으로 키우기 위해 펀치볼에 개척민을 이주시켰다. 땅을 맘껏 개간해 먹고 살라는 소리에 각지에서 개척민 150가구가 고개를 넘어왔다. 문하승(81세) 할아버지도 그 이주민 대열에 끼어 펀치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향이었다. 식솔 거느린 농부였던 그는 인민군 징발을 피해 숨어살다가 전쟁 중 국군이 되어 탈향해 6년 만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들은 흔적이 없었다. 이웃들은 이북으로 넘어가버렸고, 손수 일군 전답은 풀과 나무 무성한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고향을 잃어버렸다. 이주민 20여 가구가 그와 같은 원주민들이었다. 고향에서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이들 중 많은 주민이 술로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등졌다.

이주민들의 처지도 나을 게 없었다. 제 땅 한 뙈기 가질 일념으로 불발탄과 지뢰가 지천인 땅을 맨손으로 일구었으나 원주민들과 땅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가 빼앗겼다. 개간지마저 정부에서 국유화해 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아직도 이들은 정부를 상대로 힘겨운 토지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 비극의 땅으로 함박눈이 자우룩이 뒤덮어왔다.

◆DMZ(Demilitarized Zone)=비무장지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탄생. 길이 155마일(248㎞). 협정 체결 당시 전선(戰線)을 군사분계선(MDL·Military Dividing Line)으로 정하고 여기서 남북으로 각각 2㎞씩 후퇴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를 DMZ로 지정했다. 이 때문에 남·북방한계선 간의 거리는 4㎞여야 하나 남북 모두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 짧은 곳은 1.2㎞가 되는 지역도 있다.

글=소설가 전성태
사진=김태성 기자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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