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를 가다] 군 협조 받아 155마일 현장 기록…격전지 돌아보며 ‘생명의 미래’ 찾아 [중앙일보]

2010.03.16 02:02 입력 / 2010.03.16 06:40 수정

‘DMZ를 가다’ 시리즈 어떻게‘DMZ를 가다’ 시리즈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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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1953년 7월 포성을 끝낸 것은 종전(終戰)협정이 아닌 정전(停戰)협정이었다. 충돌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비무장지대(DMZ)가 오히려 남북 화력이 집중된 중무장지대(HMZ·Heavily Militarized Zone)가 됐다. 팽팽한 긴장 속에 두 세대의 세월을 건너 뛴 공간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전쟁 발발 60년을 맞아 ‘DMZ를 가다’를 연재한다. 전쟁의 상처와 함께 간직돼온 문화·역사 현장을 소개하는 시리즈 1부에 이어 생태 보고(寶庫)를 탐사한 시리즈 2부를 연중기획으로 보도한다. 참전용사·실향민 등 전쟁 체험 세대를 만나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전한다. 세계적인 생태환경 보전지역으로 자리 잡은 생명의 공간을 동영상·사진 등으로 다양하게 보여준다.

DMZ에는 이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최전방 군부대 관측소가 잇따라 안보관광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은 앞다퉈 ‘특구’를 지정하며 생태·경제 개발에 나선다. 이런 변화의 현장을 빠뜨리지 않고 찾는다. 군의 협조를 받아 서해안 최북단 백령도부터 강원도 북쪽 끝 717관측소까지 155마일 휴전선을 샅샅이 뒤졌다.

시리즈 1부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연재는 젊은 남녀 소설가 전성태(41)·천운영(39)씨가 맡았다. 번갈아 가며 일주일에 한 차례씩 집필한다. 시리즈 2부 ‘생명의 공간으로’는 환경전문기자와 환경단체가 함께 준비한다.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동영상=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국방부육군본부21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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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를 가다] 전쟁과 분단의 상흔 ‘펀치볼’ [중앙일보]

2010.03.16 02:07 입력 / 2010.03.16 06:41 수정

2㎞ 거리 두고 북한과 대치…40일간 주인 6차례 바뀌어

강원도 양구의 가칠봉(1242m)은 동부전선 최전방이다. 불과 2㎞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 가칠봉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안면은 해발 고도가 400∼500m에 이른다. 가칠봉·도솔산·대암산 등 높이 1100m가 넘는 산들이 면 지역 전체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다. 전형적인 분지 지형이다. 덕분에 한국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화채그릇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펀치볼은 별명을 안긴 바로 그 지형적 특성 때문에 전화(戰禍)를 피해 가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교착 상태에 접어들어 슬슬 휴전 얘기가 나오던 1951년 여름, 펀치볼 일대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잇따라 벌어진다. 전선(戰線)이 휴전선으로 확정되기 전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남북한이 치열하게 싸운 탓이다. 자연히 펀치볼을 둘러싼 봉우리들은 격전의 현장이 됐다. 도설산 전투,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그것들이다.

가칠봉 전투는 국군 5사단이 가칠봉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 27사단을 물리친 전투다. 5사단은 포병 대대의 지원을 받아 27사단을 쉽게 격퇴했다고 전사(戰史)는 전한다. 하지만 북한군은 끈질지게 저항했고, 칼 같은 능선으로만 이뤄진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무려 40여 일 공방전을 벌인다. 주인이 6번이나 바뀌었다. 자연히 막대한 인명 피해가 났다. 인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까지 시야를 넓히면 피해는 더 커진다. 51년 여름에서 가을 사이 모두 2만50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양구 인근 DMZ에는 양구 출신 화가 박수근(1914∼65)의 그림이 담긴 항아리가 묻힌 것으로 알려졌다. 박수근의 부인 김복순(79년 작고)씨가 52년 월남하다 도저히 가지고 갈 수 없자 파묻은 것이다.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동영상=이병구 기자
취재 협조=국방부 육군본부 21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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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60년, 전후세대의 155마일 기행 ⑤ 임진강 전투와 영국군 [중앙일보]

2010.04.19 00:06 입력 / 2010.04.19 09:22 수정

[DMZ·분단현장을 가다] 꼭 이맘때였지 … 사흘간 중공군 막으며 대대원 622명 잃었어

지난 12일, 특별한 외국손님 200여 명이 한국을 찾았다.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영연방 4개국에서 참전한 80명의 병사와 그 가족들이다. 6·25전쟁기념사업회가 전쟁 60년을 맞아 초청했다. 이들은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청춘이 묻힌 전장을 둘러봤다. 긴 여행을 감당할 만한 분들만 참여했을 텐데도 휠체어와 지팡이, 혹은 가족의 부축을 받는 노병들이 많았다.


영국군 참전용사 키스 테일러가 17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영국군 전적비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먼저 간 동료들을 향해 경례를 하고 있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해 주변에선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이곳에 다시 서니 동료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듯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다”며 소회를 밝혔다. 한국전쟁엔 34만여 명의 유엔군이 참전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다.
17일 파주 적성면 설마리 영국군 전적비에서 만난 토머스 클러프(80) 할아버지는 시간을 거슬러 부산항에 닿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포병으로 참전했다.

“유서를 쓰고 배에서 내렸다. 여학생들이 환영을 나와 사과 한 알씩을 안기는데 전쟁에 지친 그 불안하고 안쓰러운 얼굴들을 잊을 수 없었다.”

전쟁 당시 영국군은 8만7000여 명이 참전해 1078명이 전사하고 2674명이 부상했다. 영국 지상군 2개 여단(27·29여단)은 서부전선에서 정주 전투, 박천 전투, 적성 전투, 가평 전투 등을 치렀다. 그중 1951년 4월 중공군의 제1차 춘계공세를 맞아 파주 적성 일대에서 22일부터 25일까지 영국군 29여단이 치른 임진강 방어전투는 최대 격전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 63군 3개 사단에 포위된 가운데 영국군은 일곱 배나 많은 적과 사흘 밤을 싸우며 방어선을 지켰다. 특히 마지막까지 고립된 채 235고지에서 전투를 치른 29여단 글로스터 대대는 750명의 병력 중 622명(전사·포로·행방불명 포함)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 전투를 가장 총체적이고 드라마틱하게 복원해 기록한 영국인 앤드루 새먼(42)은 그의 저서 『마지막 한 발(To the Last Round)』에서 임진강 전투를 스파르타 병사들이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 싸우다 전멸한 ‘테르모필레 전투’에 비유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보다 한국전이 더 끔찍했다고, 한국에서의 전투가 독일군을 상대로 한 전투보다 더 나빴다는 여러 영국군들의 증언을 전한다.

15일, 영국군 전쟁영웅 데릭 키니(79) 할아버지는 임진강 일대를 그의 두 외손자와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새먼도 함께해 노병이 기억을 되살리는 일을 거들었다. 아무래도 낯선 이국땅 전장에 투입된 병사들은 자신이 치른 전투는 기억할지 몰라도 당시 전장을 개괄해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새먼은 꼼꼼한 고증을 통해 키니의 전쟁을 되짚어 주었고, 키니는 상기된 얼굴로 손자들에게 60년 전 기억을 전했다.

키니는 스무 살 나던 1951년 29여단 퓨질리어스 연대 소속 보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의 형이 사리원에서 전사한 소식을 듣고 자원한 길이었다. 임진강 전투 마지막 날인 4월 25일 의정부 방향으로 퇴각하는 과정에서 그는 중공군에 생포되었다. 그는 2년4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고 1953년 8월 포로교환 때 판문점에서 풀려났다. 포로생활 동안 두 번의 탈출을 감행했는데 그는 첫 번째 탈출을 했다가 붙잡힌 지역으로 손자들을 이끌었다. 그의 여정은 연천군 비룡대교 부근 임진강에서 파주시 적성면 장현리를 거쳐 양주시 남면 안말로 이어졌다. 놀랍게도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의 모든 발자취가 또렷이 되살아난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어제 일도 가물가물할 때가 많은데 고지의 지형, 안개와 연기에 휩싸인 마을의 풍광, 최초로 목격한 중공군의 주검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의 외손자 데릭(18)은 미국 애리조나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한국전쟁을 늘 듣고 자랐다.

“먼 나라의 작고 낙후한 시골마을들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할아버지를 따라 와서 한국의 현대적인 모습을 보고 놀랐다.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 그러나 휴전선을 돌아보며 외국인으로서 (분단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만큼 한국을 많이 알고 싶다.”

1951년 4월 22일 꼭 이맘때였다. 글로스터 대대가 지키는 적성면 설마리 235고지는 임진강에서 피어오른 안개로 섬처럼 떠올랐다. 병력이 70배나 많은 중공군에게 포위된 영국군 대대에게는 방어선을 사수하라는 명령만 있고 후퇴하라는 명령은 없었다. 지원군도 올 수 없었다. 당시 후방에서 이들을 지원하던 영국군 45포병연대 통역관 최덕순(82세) 할아버지는 포병진지가 있던 문산 독점말 들판에 서서 “중공군이 눈앞까지 밀고 왔는데도 후퇴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흘 동안 대포마다 1000여 발을 쏘았다. 이 전투 동안 영국 포병이 쏜 2만3000여 발의 포탄은 포클랜드 전투에서 쏜 포탄의 두 배였다. 포병 진지도 짙은 안개를 타고 잠입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글로스터 대대를 전방에 두고 후퇴했다. 글로스터 부대의 종군신부 셈 데이비스는 결전에 임박한 235고지의 운명을 기록으로 남겼다.

‘홀로 남겨진 대대는 악몽과도 같은 달빛 아래서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시간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다. 이 조용하고 따사로운 오후가 영원히 계속되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다!’

하루분 탄약으로 사흘 밤을 버텨낸 부대원들에게 드디어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각자 알아서 철수하라는 명령이었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빈 소총을 부수었다. 나팔수는 제 나팔이 중공군의 전리품이 되는 게 싫어 한 발 남은 수류탄과 함께 참호에 던져 파괴했다. 그들은 부상병을 데려갈 수 없었다. 군의관과 데이비스 신부는 그들과 남았다.

베레모 비슷한 모양의 녹색 군모(軍帽)를 착용한 필립 아네츠(79) 할아버지는 적성산을 바라보는 눈길이 유독 촉촉했다.

“탈출 순간을 잊을 수 없다. 11번 루트로 후퇴를 했는데 언덕 위에 있는 미군 기관총 병사를 발견하고 비로소 살아났다고 실감했다. 여기에 와서 보니 내 숨소리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가 33년 동안 보일러공과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은퇴했다. 한국 전쟁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 문제를 풀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와서 비로소 알았다. 한국이 이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되어 후회 없다.”

글로스터 부대원 해리 혹스워스(81) 할아버지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는 옛 전우들을 둘러보며 “확실한 것은 아마도 이번이 우리에게 마지막 한국 여행이라는 사실이고, 이제 우리는 전쟁의 고통을 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노병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인 노병의 얼굴은 얼떨떨해 보였다. 아마도 그는 60년 전 부산항에서 사과를 내밀던 그 여학생들 대신 이 해맑은 아이들을 기억에 담아갈지 모른다.

전성태·소설가

◆특별취재팀=취재 신준봉 기자, 사진 김태성 기자, 동영상 이병구 기자 inform@joongang.co.kr
취재 협조=국방부·육군본부, 주한영국대사관



유엔군 참전 규모 16개국서 전투병 파병 … 지상군 병력 34만1000명

영국군 참전용사 데릭 키니(가운데)가 15일 경기도 파주시 장현리 전투현장을 방문해 외손자 피터(오른쪽)와 데릭에게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군사전문가들은 한국전쟁이 시작 단계부터 ‘국제적 내전(international civil war)’이었다고 평가한다. 남북한 간 내전처럼 보이지만 미·소 냉전에 따른 38선 분단으로 이미 불씨를 안고 있었고, 북한의 작전계획이나 무기 편제 등이 사실상 소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됐다. 2차 대전 후 일반화된 전쟁 유형이다. 미·소 냉전 대립 이후 첫 ‘열전(熱戰)’이기도 했다. 유엔 입장에서는 집단안전보장조약에 의해 유엔군을 파병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 미국이 건국 이후 개입한 200여 차례 국제 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첫 번째 전쟁이기도 했다. 

유엔의 개입은 신속했다. 1950년 6월 26일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유엔 회원국들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삼가도록 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28일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다시 열어 한국이 북한의 무력 침공을 격퇴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가결했다.

국방부에 따르면 참전 유엔군 규모는 휴전협정 직후인 53년 7월 31일 최대치에 이르렀다. 이날 기준으로 지상군 병력 수만 34만1000명이었다.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국가는 역시 미국이다. 30만2000명이었다. 아프리카의 빈국(貧國) 에티오피아도 1개 보병대대 1200명을 파병했다.

◆파병 16개국=미국·영국·호주·네덜란드·캐나다·뉴질랜드·프랑스·필리핀·터키·태국·그리스·남아프리카공화국·벨기에·룩셈부르크·콜롬비아·에티오피아

◆의료 지원 5개국=스웨덴·인도·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

◆물자 지원 국가=아르헨티나·볼리비아·브라질·칠레·코스타리카·쿠바·에콰도르·엘살바도르·아이슬란드·이스라엘·레바논·리베리아·멕시코·니카라과·파키스탄·파나마·파라과이·페루·우루과이·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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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대규모 자연재해 잇따르는 원인은?

  • 연합뉴스

입력 : 2010.04.17 16:13

“세계화.상호의존 확대로 피해 커져.. 착시현상”

아이티, 칠레, 중국 칭하이(靑海)성 지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브라질 폭우...

올해 들어 대규모 인적, 물적 피해를 동반한 지구촌의 대형 자연재해들이다.

지난 1월 발생한 아이티 지진은 23만명의 사망자를 낳았으며 곧이어 지난 2월 발생한 칠레 지진으로는 약 500명이 숨졌다.

지난 14일에는 중국 칭하이성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1천여명이 숨졌으며 브라질에서는 지난 5일부터 계속된 폭우와 산사태로 약 250명이 사망했다.

최근 발생한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 폭발은 별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유럽 항공산업에 막대한 물적 피해를 초래했다.

얼핏 보면 자연재해가 강도도 커지고 발생 빈도도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인간 문명의 발달로 똑같은 자연재해에도 피해 규모가 막대해짐으로 인한 착시 현상이지 자연의 변화 때문은 아니라고 시사 주간 타임 인터넷판이 16일 분석했다.

아이티 지진의 경우 23만명의 사망자를 낳아 대재앙으로 부를 만하지만 강도 면에서는 규모 7.0으로 그리 강한 지진은 아니었다.

이 지진이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것은 지진의 강도보다는 지진이 발생한 포르토프랭스가 인구 밀집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도 마찬가지다.

화산재로 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항공 운항이 대거 중단되면서 전 세계 항공산업의 손실 규모가 하루 2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지만 화산 폭발이 항공교통이 없었던 과거에 발생했다면 그 피해는 아이슬란드 일부 주민들에 국한됐을 것이다.

이는 세계화되고 상호의존도가 높아진 지구촌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자연재해도 발생 시점이나 위치에 따라서는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타임은 강조했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음은 통계상으로도 잘 드러난다.

재난역학센터(CRED)에 따르면 대규모 피해를 불러 대재난으로 분류되는 자연재해는 1980년대 이래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 적십자사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피해는 6천290억달러로 1985년에 비해 5배로 증가했다.

이 또한 자연재해가 더 강해지거나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피해가 커진 것이라고 타임은 분석했다.

경제와 기술의 발전은 자연재해가 초래하는 피해 규모를 줄이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지난 2월 발생한 칠레 지진은 규모 8.8로 아이티 지진보다 강했지만 인명 피해가 훨씬 적었던 것은 지진이 인구 밀집지역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칠레가 지진 대비 면에서 아이티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1783년 발생한 아이슬란드 라키 화산 폭발도 당시에는 기근을 초래해 아이슬란드 인구의 25%와 가축의 절반이 줄었지만 지금 발생한다면 항공산업의 경제적 피해를 낳더라도 인명 피해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타임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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