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사 호주군 부인 60년만에 `남편곁으로` [연합]

2010.04.13 07:06 입력

14일 부산유엔공원서 남편 묘위에 유해 뿌려져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호주군 장교의 부인이 60년만에 부산유엔기념공원에 잠든 남편 곁에 안긴다.

13일 부산유엔기념공원관리처에 따르면 14일 오후 2시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서 영연방국가(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의 6,25 참전용사와 유가족 209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린다.

이날 추모식에 이어 전쟁이 남긴 아픔과 안타까운 사연, 반세기를 넘는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의식'이 진행된다.

34살의 나이에 호주군 대위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10월 3일 전사한 케네스 존 휴머스톤씨의 부인으로 지난해 숨진 낸시 휴머스톤씨 유해가 남편 묘 위에 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날 의식은 낸시씨가 지난해 호주에서 숨지기 전에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남편과 함께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낸시씨는 생전 머나먼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남편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은 유엔기념공원관리처에 이같은 뜻을 전했고 관리처측은 참전용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이를 수용했다.

낸시씨의 유해는 6.25전쟁 호주군 참전용사로 영연방국가 추모식에 참가하는 휴머스톤씨의 친구에 의해 뿌려지게 된다.

11개국 2천300명에 이르는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를 모신 유엔기념공원에는 현재 3명의 참전용사 부인이 남편과 합장돼 있다.

박은정 유엔기념공원 홍보과장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참전해 전사했고 결혼을 한 전사자의 경우도 부인이 재혼을 하는 경우도 있어 부부가 합장을 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면서 "사랑하던 남편을 잃고 평생 그리워하다 숨진 부인이 합장을 원할 경우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말했다.

박 과장은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한 미국 전사자의 부인도 생을 마감하고 남편과 합장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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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AE 원전 임원진, 한국어 공부 삼매경 [연합]

2010.04.13 06:41 입력

UAE 원자력공사, 주 1회 꼴 한국어 수업

"안녕..하십니까. 저는 함마디..입니다."

아랍에미리트(UAE) 첫 원전사업을 주관하는 UAE 원자력공사(ENEC)의 모하메드 알-함마디 최고경영자(CEO)는 얼마 전부터 한국 기업인들을 만나면 한국어로 인사를 하곤 한다.

흰색 아랍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외국인 CEO가 능통한 수준은 아니지만 한국말을 구사하는데 것에 대부분의 한국 기업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함마디 CEO는 지난해 12월 한국 컨소시엄의 UAE 원전 수주가 확정되자 지난 2월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데 강사를 소개시켜 줄 수 있느냐"고 주 UAE 한국대사관에 의뢰했고, 대사관 측은 양국 우호 협력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흔쾌히 대사관의 영사 1명을 한국어 강사로 소개시켜 줬다.

아랍어로 진행되는 한국어 수업은 주 1회 꼴로 ENEC 본사에서 이뤄지며 함마디를 포함한 임원진 3∼4명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까지 5회 가량 수업이 진행됐는데 자음과 모음 읽기 과정이 끝나 이제 얼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 회사 임원진은 UAE의 첫 원전 사업을 주관하며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상황이지만 웬만하면 한국어 수업 시간은 꼭 지키려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한국을 10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함마디 CEO는 한국어 공부 외에 한국의 예절, 문화 등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수업 중에도 한국의 인사법이라든가, 비즈니스 문화에 대해 자주 질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용칠 주 UAE 대사는 "함마디 CEO는 영어에 능통해 한국 기업인들과의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음에도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프로젝트 파트너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함마디 CEO는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아부다비에 상주하고 있는 한국전력 임직원들과 더욱 친밀한 방식으로 교감을 나누고 싶어 한국어를 공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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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간 봉준호의 ‘마더’

2010.04.12 11:00 입력 / 2010.04.12 11:50 수정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2010년 벽두에 샹젤리제 거리를 비롯한 파리 주요 지역에 봉준호 감독의 ‘마더’의 개봉을 알리는 대형 포스터가 일제히 붙었다. 파리에서 김혜자씨의 낯익은 모습을 만나는 것이 신선하고 새로웠다. 올해 들어서만 한국영화 4편이 연이어 개봉관에 올려지고 있다. 1월에는 파리시에서 후원하는 포럼데이마주의 영화축제에서 한국영화 특집을 주관하며, 한류 세미나까지 개최했다. 며칠 전 프랑스 최장수 문화부 장관을 지낸 자크 랑 하원의원은 전수일 감독의 ‘히말라야’에 대한 칭찬을 그치질 않아 정작 영화를 보지 못한 필자를 당황스럽게 했다.

사실 한국 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높은 관심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최근 2~3년 사이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의 한국어 강좌에는 신청 첫날부터 등록 희망자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강의실이 부족해 수십 명을 돌려보내야 할 정도다. 한 리셉션에서 마주친 외교관은 한국어 등록을 위해 오전 7시부터 줄을 섰던 기억을 얘기하며 한국어를 더 배우고 싶지만, 새벽에 줄을 서는 게 자신 없어 엄두를 못 내고 있다고 했다. 2000년대 초 30~40개에 머물던 한식당 수도 급격히 증가했다. 현재 100여 개 식당이 성업 중이다. 이들 중에는 한인 밀집지역에서 벗어나 현지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곳들도 많다.

프랑스의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일본·중국·베트남 등 아시아의 한류와 질적인 차이가 있다. 아시아가 ‘스타 중심의 뜨거운 열기’라면 유럽은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차분하지만 지속적인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봉준호·박찬욱·김지운·김기덕 등과 같은 영화감독이나 소설가 황석영은 꾸준한 매니어층을 형성하고 있다. 아직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대규모 흥행몰이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감독들의 작가정신에 매료돼 다음 작품을 기대하는 매니어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을 찾고, 한국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며 한류의 근원을 만들고 있다. 2009년 하반기부터 파리를 비롯한 보르도·낭트·루앙 등 주요 도시 20여 개 중·고등학교에서 ‘한국어·한국문화’를 정규수업 내용에 넣은 것은 우연히 된 일이 아닌 것이다.

5월 말, 파리와 제2의 도시 리옹에선 한식 행사도 개최된다. 요리연구가 임지호씨가 프랑스의 유명 요리사와 ‘세계 요리’로서의 한식을 선보일 예정이다. 6월 초 알사스 스트라스부르에서 개최되는 현대음악축제 주제도 한국이다. 전자음악과 살풀이, 사물과 클래식 현대음악, 한국 힙합그룹 공연 등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모습이 소개된다. 한류 축제 한마당은 프랑스 정·관계, 경제계, 스포츠, 문화계 등 각 분야 지도급 인사들을 한국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주는 튼튼한 고리가 된다.

프랑스의 한류는 스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소란함보다 한국 예술인들의 작가정신을 통해 한국 문화의 수준을 가늠해본 뒤, ‘문화 한국’ 브랜드를 다른 나라에 확산시켜주는 토양이 되고 있다. 한국의 문화가 에펠탑이나 만리장성과 같은 눈에 띄는 문화적 상징은 아니더라도, 투철한 작가정신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유럽인과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음을 파리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자리를 같이한 문명 비평가 기 소르망은 “한국은 우수한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세계 속에 문화 한국의 인식을 심어주지 못해, 국가경쟁력이 평가절하되고 있다”며 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프랑스 내에는 3000여 개의 크고 작은 극장 무대와 700여 개에 이르는 각종 문화축제가 있다. 세계 각국 문화계의 새로운 시도와 창작물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통로다. 물론 프랑스 무대에서 호평 받고, 세계적 명성을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 문화예술인들이 프랑스 무대에 새로운 작품으로 끊임없이 도전해, 유럽과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박흥신 주프랑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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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희망로드 대장정’] [6·25 60주년 기획… 지원 절실한 6·25 원조국·최빈국 10개국을 가다] [1] 14년간 내전 겪은 라이베리아

입력 : 2010.04.12 05:47

거리마다 배설물 넘쳐… 450원짜리 藥 못먹어 애들 실명 위기
60년前엔 아프리카 자원부국, 6·25때 생고무10t 원조하기도
1990년 내전 이후 성장 멈춰… 首都조차도 전기 대부분 끊겨

조선일보는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전쟁의 아픔과 가난의 고통에 신음하는 지구촌 국가들을 돌아보고 이들에게 희망을 전달하는 ‘2010 희망로드 대장정’시리즈를 시작한다. 본지는 올 1년간 어린이재단과 공동으로 하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6·25전쟁 때 우리를 도왔던 나라와 지원이 절실한 나라 등 10개국을 찾아 실상을 알릴 예정이다. 첫 번째 나라로 아프리카 서부, 대서양과 맞닿아 있는 라이베리아를 찾았다.

지난 3일(현지시각) 찾은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는 우리나라 재개발 지역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했다. 40~50년 된 건물들은 대부분 녹이 슬어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1990~2003년 내전(內戰) 때 폭격 맞아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린 건물들이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폐허 같은 도시에서 전기도 없이 살고 있었다. '저 정도면 사람이 살 수 있겠다' 싶어 가보면 미국대사관이거나 법원 같은 관공서였다.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쳤고,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봤다. 자동차는 신호등 없는 도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했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힘겹게 비켜가고 있었다.

몬로비아의 해변에 가니 서아프리카 최대 빈민가 '웨스트 포인트(west point)'가 5㎞나 펼쳐졌다. 미국 육군사관학교 이름을 닮은 지명과 어울리지 않게 거리는 온통 배설물로 뒤덮여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각종 피부병과 질병이 창궐하고 있었다. 노란색 바닷가 모래사장은 바로 주민들 화장실이었다. 주민 아사투 모하메드(Mohammed·10)양은 "화장실은 따로 없고 누구나 여기서 볼일을 봐서 나도 여기서 본다"면서 "온몸이 간지럽고 따가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주민 30만명의 배설물과 여기에 모여든 파리떼, 버려진 쓰레기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뛰놀고, 파도가 배설물을 쓸어간 바닷물로 음식을 씻고,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도 다시 그곳에 버렸다.

녹슨 철근과 나무 판자로 만든 가건물에 상하수도 시설도 없는 라이베리아 최대 빈민가‘웨스트 포인트(west point)’. 배설물과 쓰레기로 뒤덮인 거리를 아이들이 맨발로 걷고 있다. / 라이베리아=김시현 기자

이틀 뒤인 5일 몬로비아에서 자동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보미지역의 '라이베리아 시각장애인 센터'에서 치료 중인 80여명의 시각장애인을 만났다. 이들은 모두 오염된 강에 사는 흑파리(black fly) 기생충을 통해 감염되는 사상충증(river blindness)으로 시력을 잃었다. 열대지역에서 발생하는 이 병은 1년에 4알(450원)의 약을 15년 동안 먹으면 실명을 예방할 수 있다. 이 센터의 수모 잘라(Jallah) 소장은 "1990년에 내전이 발발한 이후 사상충증 약 공급이 끊겨 실명한 사람들이 우리 지역에만 수백명 있다"면서 "사람들은 폭격과 전쟁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오염된 물과 흑파리 때문에 병을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들은 눈에 총격을 당한 흔적은 없었고 백내장에 걸린 것처럼 눈동자가 흐릿했다. 서서히 실명한 쿠퍼(Cooper·41)씨 부부는 아이를 낳았을 때엔 아이 얼굴을 전혀 볼 수 없게 됐다. 부인 크루보수모(Krubosumo·50)씨는 "어느 날부터 시력이 나빠졌지만 약을 먹은 적은 없다"면서 "아이 얼굴이 매우 예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베리아는 60년 전 6·25전쟁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생고무 10t을 원조했을 정도로 경제사정이 괜찮았다. 철광석과 다이아몬드, 고무, 커피 등 자원이 풍부해 그땐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였다. 현재 수도 몬로비아의 도로·건물·철도 등 도시기반 시설들은 대부분 50년 전에 세워진 것들이다. 당시에는 매우 발전된 수준을 자랑했다. 그러나 14년간의 내전을 겪으면서 도시는 파괴됐고 성장을 멈췄다. 라이베리아인들은 '시간이 멈춘 도시'에서 열악한 위생으로 고통받으며 살고 있었다. 라이베리아에서 25년간 거주한 교민 조영호(60)씨는 "내전이 시작된 1990년 이전엔 지금보다 훨씬 살기가 좋았다"면서 "지금은 공무원이 부패해 세금이 걷히지 않고, 사람들은 외국 구호단체에 의지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종종 보이는 UN군 지프와 각종 국제구호단체의 차량들은 사진으로만 봤던 6·25 당시 못살았던 우리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공동기획 : 조선일보사, 어린이재단

어린이재단 홈페이지 www.childfund.or.kr
문의 : 1588-1940
어린이재단 후원 : 기업은행 035-043647-04-087 (예금주:어린이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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