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성공 비결 알려주세요” 개도국들 한국에 잇단 러브콜 [중앙일보]

2010.03.31 02:41 입력 / 2010.03.31 03:20 수정

산업연구원 이항구 기계산업팀장은 이달 18일 콜롬비아 수도인 보고타를 방문했다. 그는 콜롬비아 대통령이 주재하는 경쟁력위원회 연례회의에 참석했다. 경제개발 로드맵을 짜고 있는 콜롬비아 경쟁력위원회가 “한국이 자동차부품 산업을 어떻게 육성했는지 알고 싶다”며 한국 정부에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있는 콜롬비아는 9개 국가기반 산업에 자동차부품을 포함시키고, 자동차 산업 육성에 주력하고 있다. 이 팀장은 이 자리에서 ▶연구개발(R&D) 투자 확대 ▶연구인력 양성 ▶부품산업지원센터 설치 등을 제안하고 돌아왔다.

중남미·아시아·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을 벤치마킹 모델로 삼고, 성공 노하우 배우기에 나서고 있다. 이들 국가가 한국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신흥국 중 거의 유일하게 완성차 산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요타 리콜 사태 이후 일본 자동차의 품질 신화가 흔들리면서 상대적으로 한국의 자동차 산업이 부각되고 있다.


◆"기술 이전 받기 원한다”=콜롬비아에는 자동차 부품업체가 150여 개 있을 뿐 완성차 업체는 없다. 카밀로 이나스 안굴로 콜롬비아 자동차부품공업조합 회장은 “부품 산업과 완성차 업체가 균형 있게 발전한 한국은 콜롬비아가 따르고 싶은 모델”이라며 “한국의 대형 부품회사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경쟁력위원회에 참석한 멕시코부품공업협회 아구스틴 리오스 마텐세 회장은 “도요타 리콜 사태 이후 중남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6월 멕시코에서 열리는 국제 세미나에 한국 전문가가 와서 발전 사례를 발표해 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지난해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자동차산업 육성에 관한 컨설팅을 받았다. 한남대 현영석(경영학과) 교수 등으로 이뤄진 컨설팅단은 카자흐스탄을 세 차례 방문해 발전 로드맵을 제시했다. 지난주에는 카자흐스탄 이세케세프 산업통상부 장관이 방한해 한국 자동차업체와의 협력사업을 논의했다. 한국국제협력단은 지난해 알제리 산업 육성 방안을 짜면서 자동차 부품산업에 대한 조언을 했다.

산업연구원 관계자는 “베트남·캄보디아·말레이시아에서 자동차부품 클러스터 조성이 가능한지를 검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자동차 업체들은 동남아시아와 중남미에 반제품 상태로 수출하는 이른바 ‘KD(Knock-down)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인도네시아·브라질·중국 등 전 세계 15개국에서 연간 10만여 대를 KD 방식으로 생산·판매하고 있다. GM대우와 쌍용차도 베트남·우즈베키스탄 등에서 KD사업을 벌이고 있다.

◆자동차 산업 경쟁력=한국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한 것도 외국 기업으로부터의 기술 이전을 통해서였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도 처음에는 포드의 모델을 조립해 팔았다. 40여 년 만에 한국은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으로 성장했다. 2007년 산업기술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 자동차 산업의 수준은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국 빅3와 비교해 품질은 차이가 없고, 생산설비는 95% 수준, 생산기술 90%, 디자인 85% 정도로 평가된다. 황순하 자동차평론가는 “한국 기업은 발전모델을 다른 나라 사정에 맞춰 현지화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며 “개도국과의 산업 협력은 비용 절감과 시장 창출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이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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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요르단 원전 1기 이상 맡게 될 것` [중앙일보]

2010.03.30 19:43 입력

요르단 원자력위원장 밝혀 … 내년 3월께 사업자 선정
연구용 원자로는 원자력연·대우건설 컨소시엄과 계약

한국이 1500억원 규모의 연구용 원자로를 중동 요르단에 수출하는 계약이 마침내 성사됐다. 한국원자력연구원과 대우건설로 구성된 한국 컨소시엄은 이 나라 수도 암만의 총리공관에서 요르단원자력위원회(JAEC)와 연구용 원자로(JRTR) 건설사업 계약을 30일 했다고 밝혔다. 계약식에는 한국 쪽에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양명승 한국원자력연구원장, 서종욱 대우건설 사장이, 요르단 쪽에선 사미르 리파이 총리, 칼리드 토칸 요르단원자력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번 계약 덕분에 요르단이 발주한 상용 원자력 발전 수주에도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칼리드 토칸 위원장은 계약에 앞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한국이 요르단 상용 원전 건설 사업에서 적어도 한 기 이상의 건설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요르단은 현재 2013년에 착공해 2020년 완공한다는 목표로 두 기의 상용 원전을 발주한 상태다. 현재 이 사업에는 한국과 러시아·캐나다·프랑스가 경쟁에 뛰어든 상태다. 사업자 선정은 내년 3월께다.

이번 연구용 원자로 수출은 지난해 12월 말 아랍에미리트(UAE)에 상용 원전 수출 계약을 한 데 이어 두 번째로, 원자력시스템 일괄 수출을 하는 조건이다. 한국이 1959년 미국에서 처음 연구용 원자로를 들여온 이후 50년 만에 독자 기술로 수출에 나선 것이다. 한국 컨소시엄은 아르헨티나·러시아·중국 등과 치열하게 경합해 지난 1월 10일 최종 낙찰자로 선정됐다. 그 뒤 수차례의 협상 끝에 계약을 성사시켰다.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는 암만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이르비드의 요르단과학기술대학교(JUST)에 건설된다. 한국 컨소시엄은 원자로를 6월 착공해 2014년 7월 공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시운전을 거쳐 2015년 2월 부속 시설 등 모든 시설을 완공해 요르단에 넘겨주게 된다. 한국 측은 원자로 준공 이후에도 운영요원 교육과 안전관리를 맡는다.

안 장관은 “요르단 연구용 원자로는 설계에서 제작·건설·운영에 이르기까지 우리 기술로 이뤄진다. 한국 원자력 기술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국제 연구용 원자로 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연구용 원자로는 암 치료 등에 사용하는 방사성동위원소를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중성자를 이용한 각종 실험을 할 수 있다. 원자력의 원리를 알 수 있는 교육에 활용할 수도 있다. 한국은 그동안 연구용 원자로 설계와 건설에서뿐만 아니라 활용기술에서도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수출이 이뤄지지 못해 내수용이란 소리를 들었는데, 이번 수출로 그런 지적을 털 수 있게 됐다.

칼리드 토칸 위원장은 “우리나라에 짓는 한국의 연구용 원자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걸작이 될 것”이라고 치하했다. 와지 오와이스 요르단 과학기술대학 총장은 “요르단 원자로가 향후 중동지역 수출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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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원 들고 사진사로 출발 … 28년 만에 볼보 삼킨 저상 [중앙일보]

2010.03.30 02:44 입력 / 2010.03.30 03:56 수정

리수푸 중국 지리자동차그룹 회장

중국 지리(吉利)자동차의 리수푸(李書福) 회장. 그는 28일 2조원(18억 달러)에 볼보 자동차를 인수하는 계약을 했다. [예테보리 신화통신=연합뉴스]
“길이 있는 곳에 중국산 자동차가 달리도록(有路就有中國車) 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미국 포드로부터 볼보의 지분 100%를 통째로 인수한 리수푸(李書福·47) 지리(吉利)자동차그룹 회장의 꿈에는 한계가 없다. 지리자동차그룹의 홈페이지 초기 화면에도 이를 담은 영문 구호(Let’s Geely cars go to the whole world)가 내걸려 있다.

궁핍한 산촌인 중국 저장(浙江)성 타이저우(台州)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상인 기질을 보였다. 명·청 시대를 주름잡았던 진상(晋商)과 후이상(徽商)에 이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권을 쥐락펴락하는 저상(浙商: 저장 상인)의 피를 물려 받은 것이다. 저상의 후예답게 그도 “하늘 아래 못 할 비즈니스가 없다”며 19세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120위안(약 2만원)을 종잣돈 삼아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기사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업 수완이 좋아 금세 1000위안을 모은 뒤 사진관을 차렸다. 이어 1년 만에 쓰레기를 수거해 폐기물 속에서 금속을 분리해 파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진을 현상하면서 약품 처리만 잘 하면 폐기물도 얼마든지 돈이 될 수 있다고 착안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86년 그는 자신이 개발한 기술로 냉장고 부품 공장을 차렸다. 이때 ‘저장성 모범노동자’로 뽑히기도 했다. 냉장고 부품 공장장을 비롯해 오랜 기간 생산 현장에서 일해 온 그는 뒤늦게 기계공학 석사 학위를 땄다. 마침내 95년 저장성 항저우(杭州)에 지금의 지리자동차를 창업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자동차 산업은 어려웠다. 국유 자동차 기업은 효율성이 떨어졌고 이 틈을 비집고 외자 기업들이 속속 중국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그는 ‘외국차가 중국을 누비는 것이 아니라 중국차가 세계를 누비도록 하겠다’는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의욕에 넘쳤던 그는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배추를 팔 듯 자동차를 팔겠다”고 말해 ‘자동차 미치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런 도전을 통해 그는 창업 15년 만에 지리를 연간 30만 대 생산 능력을 갖춘 중국 10대 토종 자동차 업체로 키웠다. 그의 재산은 중국 재계 서열 25위다.

그는 2008년 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자금 사정이 악화된 포드로부터 볼보를 인수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2009년 4월 마침내 포드가 중국 기업에 볼보 매각 신호를 보냈다. 같은 토종업체인 치루이(奇瑞)와 둥펑(東風) 등이 경합했지만 그해 12월 지리가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겨우 15년 된 중국 기업이 80년 역사의 스웨덴 볼보를 통째로 삼키자 ‘뱀이 코끼리를 삼켰다’는 표현도 나왔다.

그는 민간 기업인지만 막후 정치력도 상당하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위원으로 중국 중앙정치 무대에도 넓은 인맥을 지니고 있다. 저장성 당서기를 5년간 역임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스웨덴 국빈 방문에 동행해 볼보 인수 계약을 최종적으로 성사시킨 것도 이런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번 인수 계약으로 그는 베이징(北京)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해 볼보 모델을 생산할 방침이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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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꿈>(끝)에티오피아 한국전참전용사들
<아프리카의 꿈> ⑫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들
(아디스아바바=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1992년 결성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회(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 회장 멜레세 테세마 씨는 한국이 "폐허에서 일어선 기적"을 이뤘다고 말했고 " 일마 벨라츄 부회장은 "파괴와 절망의 나라가 위대한 나라 돼 기쁘다"고 밝혔다. 멜레세 회장이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있는 참전기념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한국 보훈처와 춘천시가 2006년 건립했다. 2010.3.28
kjw@yna.co.kr

용사회장 테세마 씨 "폐허에서 일어선 기적 부러워"
`각뉴 부대' 활약 다룬 책 내년 한국서 출판

(아디스아바바=연합뉴스) 강진욱 기자 =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는 1951년 4월 왕실 근위대인 `각뉴(KAGNEW)' 부대 1천300명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인 1956년 3월까지 5차례에 걸쳐 6천37명을 파병했다. 이들은 중동부전선 화천과 양구, 철원 등지에서 싸웠다.

이들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약 900명 가량은 이미 80∼90대 노인이 됐다. 1991년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인 1992년 `한국전참전용사회(Ethiopian Korean War Veterans Association)'가 결성됐다.

22일 아디스아바바 시내 한국국제협력단(KOICA) 사무소에서 송인엽 소장의 소개로 한국전참전용사회 멜레세 테세마(Melesse Tessema.78) 회장과 일마 벨라츄(Yilma Belachew.79) 부회장을 만났다.

송 소장은 각뉴 부대의 혁혁한 전과를 다룬 그리스 종군 기자의 책 `각뉴'를 우리말로 번역해 내달 한국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이 책에는 "과거에는 각뉴, 오늘날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이 있어 에티오피아와 한국 간 우의가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에티오피아 대통령의 글이 들어 있다.

테세마 회장과 벨라츄 부회장은 모두 각뉴부대 2진(1952년)으로, 테세마 회장은 4중대 2소대장이었고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을 탔으며 벨라츄 부회장은 중기중대 75mm 포 소대장으로 화랑무공훈장과 미국 동성무공훈장을 수상했다.

참전 당시 상황을 묻자 테세마 회장은 "1∼5진 모두 미국에서 대형 군함을 보냈고 에티오피아에서 출발한 배는 그리스와 태국, 필리핀을 거쳐가며 군인들을 태워 3주 걸려 부산항에 입항했다"면서 "약간의 적응 훈련을 거쳐 곧 바로 전선에 투입됐다"고 말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 그는 "각뉴 부대원 모두 최정예병답게 용맹하게 싸웠다"면서 "253번 싸워 모두 이겼다. 123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지만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시에는 우리(에티오피아)가 훨씬 잘 살았고 한국 사람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우리(각뉴부대원)보다 키가 작았다"면서 "한국이 기적적으로 발전하는 동안 에티오피아는 후퇴를 거듭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벨라츄 부회장은 "한국은 파괴와 절망의 나라였으나 지금은 위대한 나라가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귀국 후 각뉴 부대원들은 거국적 환영을 받았다.

귀국 후의 생활을 묻자 테세마 회장은 "1972년 대령 진급 뒤 육군 핵심 여단장으로 복무했고 1974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소령 주도로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 퇴역 당한 뒤 사기업과 비정부기구(NGO)에서 근무했다"고 밝혔다.

벨라츄 부회장은 "1957년 대위로 진급했고 1960년 서방파 군엘리트 그룹이 주도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 실패한 뒤 3년간 투옥 후 1963년 출옥했고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마지막으로 포도주 공장 매니저로 1987년 퇴직했다"고 말했다.

1960년 쿠데타는 왜 일어났고 왜 가담했느냐고 묻자 벨라츄 부회장은 "당시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부자들과 로열패밀리들에 반감을 가진 유럽파 젊은 군인들이 더 나은 정부를 갖기 위한 변화를 꾀했다"고 밝혔다.

그는 "쿠데타의 리더는 멩기스투 장군으로 그의 형이 존 F.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과 동문수학했다"고 설명했다. 테세마 회장은 쿠데타 직전인 1959년 7월부터 2년 반 동안 내전 중인 콩고에 가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와 무관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온 테세마 회장은 황제 보디가드를 거쳐 대대장으로 진급한 뒤 승승장구, 1974년 대령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1960년 쿠데타 주역과 다른 인물)이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 탱크여단장에 임명됐다.

강제 퇴역 당한 뒤 민간인으로서의 생활을 묻자 테세마 회장은 "밤이 되면 늘 집으로 누군가가 찾아와 근황을 묻는 등 감시를 받았지만 사회 활동에는 지장을 받지 않았고 물질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1991년 멜레스 제나위 현 총리가 이끄는 쿠데타로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져 이듬해 한국전참전용사회가 결성됐고 벨라츄 부회장은 1995년과 1997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에티오피아는 현재 모든 실권을 총리가 갖고 있으며 대통령은 명예직이다.

테세마 회장은 아들 딸 각각 세 명씩 여섯 자녀를 뒀고 아들들은 모두 엔지니어로 성장해 하나는 카타르에서 국제기구에 소속돼 일하고 있으며 딸 하나는 대법원 판사와 결혼했고 다른 두 딸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벨라츄 부회장의 외아들은 국제기구에서, 딸 하나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다른 딸 하나는 영국에서 살고 있다면서 "손자 다섯을 둬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전용사회 회원들은 지금도 여전히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후에는 테세메 회장과 함께 아디스아바바 북쪽 아핀초 베르 파크(Afincho Ber Park)에 있는 참전기념비를 방문했다. 시내 중심가에서 차로 약 20여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2006년 2월. 당시 한국 보훈처와 춘천시가 예산을 지원해 아디스아바바 시 당국과 함께 건립했다.

기념비 중간에는 에티오피아라고 쓴 큰 현판이, 상단에는 사자 동상이 올라앉아 있다. 기념비 좌우 양측에는 에티오피아 국기와 태극기를 단 깃대와 분수대가 있고 분수대 바닥에도 각각 에티오피아 국기와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기념비 앞에는 한국전에 참가했다 산화한 에티오피아 장병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122개가 원형으로 도열해 있다.

테세마 회장은 부상당한 한국 병사를 들쳐 업고 뛰어가다 적의 폭격으로 함께 산화해 한국에 함께 묻혔다는 멜레세 제리훈의 비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기념관과 기념비를 관리하고 있는 아스랄르카 가브라마리암 알라모(80) 씨 역시 참전용사회 회원으로, 스무살 때인 1951년부터 약 2년 간 한국에 머물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키가 18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그는 귀국한 뒤에도 계속 군대에 남아 1986년 예편할 때까지 26년 간 군인으로 일했다 한다.

1974년 혁명 당시 알라모 씨는 약 10년 간 현재 에리트레아가 된 지역에 파견돼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선 뒤 한국전에 참전했던 이들이 모두 군대에서 쫒겨난 것은 아니었다.

테세마 회장은 "한국은 여전히 분단 상태"라는 지적에 "우리가 한국에 간 것은 남한만 도우러 간 것이 아니고 코리아의 자유와 통일을 위해 싸운 것"이라면서 "각뉴 부대원들이 한국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도 짓고 이들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싸움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므로 협상하고 설득해 합의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국제사회가 이를 도와야 하고 우리도 도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북한이 초청하면 북한에 가 통일을 위해 이야기 하겠다"고 덧붙였다.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청하자 테세마 회장은 "코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우리를 후세가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한국이 우리 용사들을 계속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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