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서 올해도 노오란 산수유꽃이 지리산 자락에서 그 고운 자태를 드러내며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봄의 전령사인 산수유 꽃과 함께 약동하는 새봄의 정취를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가 있다. 매년 3월 봄에 열리는 구례 산수유 축제이다. 오는 18일부터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 라는 주제로 ‘구례 산수유 꽃 축제’가 열린다. 산수유 열매는 루비보다 붉은 빛으로 수확한 열매는 건조시켜 술과 차 한약 재료 등으로 사용하는데, 신맛이 날수록 우량품으로 여긴다. 산수유 열매는 간과 신장을 보호하고 몸을 단단하게 하는 효능을 갖고있다. 매년 산수유꽃이 필 무렵에는 지리산자락에서 고로쇠약수 또한 채취가 한창이므로 이 즈음에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다녀간다. 산수유꽃 축제에서는 산수유 꽃으로 만든 차, 술, 음식 등을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공연, 체험 행사, 불꽃 놀이 등이 펼쳐져 지리산의 자연과 봄 꽃을 보며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숙소가 있는 계북면에서 새벽 산책을 마치고 숙소에서 여유 있게 커피도 마셨습니다. 오전 9시쯤 되니 햇살이 따뜻해서 내렸던 눈도 많이 녹았습니다. 장수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지인과 오미자 농사를 짓는 지인, 이렇게 셋이서 육십령고개에서 남덕유산 할미봉까지 다녀올 계획으로 육십령 휴게소로 달려갑니다.
육십령 고개 휴게소의 넓은 주차장에는 두어 대의 차만 주차되어 있습니다.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장계면이 시원하게 보입니다. 충령탑 옆의 등산로를 오릅니다. 흰 눈이 쌓인 계단을 오를 때 마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납니다. 능선길을 따라 할미봉으로 향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갑니다.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발목을 덮습니다. 내리막 길은 매우 미끄럽습니다.
등산 장비도 잘 준비하지 않아 오르면서 자꾸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고개를 두 개쯤 넘었을 때 일행 중 한 명이 "갈수록 오르막 경사가 심해지는데, 산행을 하는 것이 어렵겠다"고 말을 합니다. 아쉽지만 안전을 위해 하산을 시작합니다.
▲ 육십령 고개에서 바라본 장수군 풍경
ⓒ 이홍로
▲ 할미봉을 오르는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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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 예전 채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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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십령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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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의 발원지 뜬봉샘
산행을 포기하고 내려오면서 보니 함양군 서상면쪽에 채석장 터가 보이는데 채석 후 관리를 잘하여 보기에 좋습니다. 같이 가 보기로 하고 채석장으로 걸어 갑니다. 길 옆에는 대형 오리 농장이 있습니다. 채석장에 올라가 보니 작은 연못도 있습니다. 파란 하늘에 독특한 모양의 채석장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채석장에는 벚나무, 느티나무 등을 심어 놓았는데 토지가 척박하여 잘 자라지 못하고 죽은 나무들도 보입니다.
육십령 휴게소에 내려 오니 점심 때입니다. 이곳 휴게소의 돈가스가 맛있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우리 셋은 휴게소에 들려 돈가스를 먹었는데 부드러운 돈가스가 정말 맛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에 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뜬봉샘은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에 있습니다. 주차장에는 뜬봉샘생태공원이 있고 금강사랑 물 체험관이 있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뜬봉샘 주변 생태 환경을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 곳에서 뜬봉샘까지는 30분 정도 걸었습니다. 오르는 길은 계단과 오솔길이 반복되는데 여름에는 땀 좀 흘리며 가야 될 것 같습니다.
▲ 금강 발원지 뜬봉샘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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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 발원지 뜬봉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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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분리 공소
ⓒ 이홍로
▲ 수분리 공소
ⓒ 이홍로
▲ 수분리 공소
ⓒ 이홍로
타루비, 그 아름다운 모습
뜬봉샘생태마을에는 또 다른 명소가 있습니다. 장수 천주교회 수분 공소가 그 것입니다.
이 건물은 병인박해(1866년) 이후 외지에서 피난 온 천주교 신자들의 교우촌이 형성된 수분리에서 신앙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정면 3간, 측면 6간 규모로 내부는 두개의 열주에 의해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전형적인 바실리카식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1920년대 한옥 성당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 안내판 인용 -
장석마을 옆 산기슭에 서 있는 이 비는 장수 현감과 생사를 함께 한 어느 관리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조선 순조 2년에 세운 것이다. 어느날 현감이 말을 타고 이 부근을 지날 때, 마침 주변에 있던 꿩이 말 소리에 놀라 하늘로 날았고, 이에 말도 놀라 현감과 함께 절벽 옆 연못에 빠저 죽었다고 한다. 그러자 수령을 수행하던 관리는 자신이 말을 잘 다루지 못하여 현감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바위에 통탄의 눈물을 흘린다는 뜻의 '타루'라는 글자를 새기고 꿩과 말을 그린 다음 물속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 안내표지 인용 -
과연 바위 절벽에는 생동감이 넘치는 말과 날아가는 꿩의 모습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 타루비 옆 바위에 새겨진 말과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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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덕유산 서봉으로 가는 등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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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봉으로 가는 계곡 풍경
ⓒ 이홍로
▲ 서봉으로 가는 등산로 옆 계곡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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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봉으로 오르다가 만난 상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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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지대에서 등산로를 찾지 못해 산행을 포기하다
7일 백두대간 육십령, 뜬봉샘, 타루비를 둘러 보며 즐거운 여행을 하였습니다.
8일 아침에는 남덕유산 서봉에 다녀오기로 하고 아침 9시에 숙소를 나섰습니다. 간밤에도 눈이 살짝 내렸습니다. 동네 뒷산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계곡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발목까지 눈이 올라 옵니다. 3월이지만 계곡은 아직 한겨울입니다. 바위 사이로 흐르던 물이 얼어 아름다운 조각품을 만들었습니다.
산죽 사이로 난 길을 기분 좋게 올라 갑니다. 2시간 정도 올라 갔는데 앞은 너덜지대입니다. 이 곳은 등산로가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우린 이번에도 서봉까지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하산하였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눈이 쌓일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등산 장비를 잘 챙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서봉까지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눈쌓인 숲과 아름다운 계곡을 바라 본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주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이재언씨와 함께 충도를 방문했다. 충도는 완도에서 동북쪽으로 30㎞ 해상에 위치하며, 부근에는 평일도, 금당도, 비견도, 신도, 허우도 등이 있다. 행정구역은 완도지만 생활권은 고흥 녹동이다.
평일도에서 북동쪽으로 1.2㎞ 지점에 있는 섬은 동경 127°13′, 북위 34°13′에 위치하며 면적 1.20㎢, 해안선 길이 9.0㎞의 작은 섬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간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조선 효종 때 고흥에 살던 경주 최씨 최시덕 일가가 뗏목을 타고 유랑하다가 이 섬에 정착한 이후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당산에서 내려다 본 충도 마을 모습
ⓒ 오문수
▲ 동네 내력을 이야기하는 노인들. 한 때는 앞바다를 주름잡았을 노인들도 시간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자식들이 보내주는 용돈과 국가에서 주는 연금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 오문수
섬 명칭 유래가 재미있다. 각종 벌레가 많이 서식하여 '충(蟲)' 혹은 '(?)'자를 지명에 사용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섬 모습이 '충(忠)'자를 닮았다고 하여 충도(忠島)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 충도에서 2.7㎞ 떨어져 마주하고 있는 섬의 이름이 조도(鳥道, 현재의 신도)인 관계로, 새에 잡아먹히는 형국이라 하여 '충(忠)'자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질은 주로 산성화산암류와 화강암류로 형성되어 있다. 북쪽은 기복이 비교적 큰 산지(최고 높이 219m)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쪽은 경사가 완만한 구릉성산지로 되어 있다. 해안은 암석해안을 이루는데, 북쪽을 제외한 해안에는 깊은 만입(灣入)이 형성되어 있다. 1월 평균기온은 1.9℃, 8월 평균기온은 25.1℃, 연강수량은 1282㎜이다.
동·서쪽에 만이 돌출하였고 서쪽의 충도만을 중심으로 취락이 발달하였다. 내륙 쪽은 산지가 많으며 중앙과 남부에 펼쳐진 저지대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농산물로는 쌀·보리·고구마가 생산되며 주변 수역에서는 고등어·전갱이·갈치·새우·도미·방어 등을 어획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최고의 수출용 김 생산지로 높은 소득을 올렸고, 최근에는 미역, 다시마, 톳, 전복 등의 양식을 하고 있다.
▲ 마을 가운데 있는 효자 효부상 모습이 이채로웠다
ⓒ 오문수
▲ 한 아주머니가 바다에서 채취한 미역을 담장에 말리고 있다
ⓒ 오문수
학교가 있었던 자리에는 경로당, 마을회관, 보건진료소, 어린이놀이터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최상층부에 학교 건물 비슷한 게 보여 마을 노인들에게 물으니 당산이라고 한다.
노인 한 분은 "5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신들린 나무예요. 마을 사람 하나가 그 나무를 건드렸다가 죽다 살아났어요"라고 일화를 말해줬다. 70세대 140여명의 주민이 사는 충도이장 이태승(59세)씨는 젊은이들이 들어오는 섬이라고 한다.
"한 때 김 생산량이 전국 최고에 달한 섬입니다. 요즘은 미역, 전복, 다시마를 주로 하죠. 젊은 사람들이 해먹고 살기 좋아서 그런지 젊은이들이 들어옵니다. 제 나이 아래로 20명 정도 되니까요."
마을을 돌아보고 선창가로 나가니 외국인 여성 두 명이 작업을 마치고 들어온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에서 3일 전에 왔다는 여성들은 한국말과 영어를 거의 못했다. 선장인 이태빈(44세)씨와 만나 외국인 여성을 고용하게 된 사연을 들었다.
▲ 다시마 양식장에서 일하고 돌아온 러시아 여인들에게 카메라 앵글을 맞추자 멋지게 폼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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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마 양식장에서 일을 마치고 방금 선창가에 오른 러시아 출신 여인들, 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에서 왔다고 한다. 먹고 자고 일당 8만원이란다
ⓒ 오문수
"두 여성은 미역과 전복 다시마 양식장에서 일해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일당 8만원을 줍니다. 한국인들은 똑같이 먹고 자면서 일당 8만원을 준다고 해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저도 도시에서 가구 판매업을 하다 고향으로 들어왔는데 도시보다 벌이가 낫죠. 요사이 도시경기가 나쁘고 사업이 안 되니까 귀촌하겠다며 문의하는 사람이 10명 정도 됩니다."
전국을 돌아다녀 보면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섬을 돌아다녀 보면 일할 사람이 없어 애 태우는 경우를 본다. 이들이 먹고 자고 살 만큼의 돈도 벌 수 있는 섬을 활용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망상일까?
상처, 슬픔, 저주.... 이런 이미지 때문에 소록도는 가보고 싶지만 왠지 꺼려지는 곳이다. “좋은 경치를 보는 감동은 며칠이면 끝나지만, 사람에게 감동을 받으면 인생이 바뀌죠. 절망의 땅 소록도는 그래서 아름다운 곳입니다. 천형을 이겨낸 환자들, 그들과 함께한 사람들로 인해 소록도는 감동의 땅이자 힐링의 섬입니다.” 김연준 소록도성당 주임신부는 오스트리아 태생 두 간호사 이야기로 소록도를 소개했다.
녹동항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자리잡은 소록도성당. 고흥=최흥수기자소록도의 천사 혹은 영웅, 마리안느(안경)과 마가렛.마리안느와 마가렛이 40여년 동안 거주했던 숙소.두 사람이 머무는 동안 사용한 오븐.별다른 장식 없는 소박한 침실.
소록도에서 각각 43년과 39년간 간호사로 근무한 마리안느(83)와 마가렛(82)은 김 신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나이팅게일과 슈바이처는 쨉도 되지 않는” 위인이다. 1960년대까지 한센병 환자를 대하는 한국 의료진은 멀찍이 떨어져서 증상을 물어보고, 처치도 스스로 하도록 지시했다. 두 사람은 달랐다. 아침마다 숟가락을 쥘 수 없는 환자에게 밥을 떠먹이고, 환자와 마주앉아 환부를 무릎에 얹어 냄새를 맡고, 맨손으로 짓무른 상처에 약을 발랐다. 때로는 환자들을 숙소로 초대해 함께 식사도 했다. 한센인 거주지역과 의료ㆍ종교인 거주지역이 철조망으로 분리돼 있을 때였다.
한국을 떠나는 과정도 아름다웠다. 소록도 주민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섬을 나간 후 편지를 한 통 보냈는데, 혹시라도 미리 알려질까 봐 녹동이 아니라 광주에서 부쳤다. ‘우리는 43년 동안 여러분과 재미있게 생활했고, 베풀어준 사랑에 감사를 느낀다. 이제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고, 부담이 되기 싫어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마리안느는 당시 대장암 투병 중이었다. 평소 두 사람을 수녀님으로 불렀던 주민들은 그들이 당연히 고국의 수녀원에서 편히 여생을 보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 수녀가 아니라 간호사였다. 소록도에서 근무하면서 어떤 보상도 받지 않은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지급하는 최저 연금이 전부였다. 마리안느와 치매를 앓고 있는 마가렛은 현재 인스부르크의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김 신부는 또 “두 분은 바퀴벌레와 기자를 가장 무서워했다”며, 언론사에서 취재를 온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자취를 감췄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기록이 하나도 없는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 광주대교구가 고흥군의 지원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소록도의 두 천사를 그린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다음달 개봉한다.
일제강점기 한센인 인권유린의 상징물이 된 감금실.소록도 100년의 아픈 역사를 전시하고 있는 소록도 자료관.수탄장에서 소록도 병원에 이르는 해안 산책로. 뒤로 녹동항에서 연결되는 소록도대교가 보인다.녹동항에서 본 소록도대교 일몰.
아기 사슴을 닮은 소록도는 해안선 14km, 여의도 1.5배 정도의 작은 섬이다. 2009년 소록대교로 연결하기 전까지, 고흥반도 끝자락 녹동항과 채 1km가 못 되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100년 가까이 한센인들을 강제로 격리 수용한 딴 세상이었다. 지금의 소록도는 울창한 송림과 깨끗한 백사장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환자들이 손수 가꾼 중앙공원도 볼거리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개방하고, 주차장에 차를 댄 후 걸어서만 둘러 볼 수 있다.
주차장을 기준으로 왼쪽은 국립소록도병원과 중앙공원, 오른쪽은 소록도 해수욕장과 소록도성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이 거주했던 ‘직원지대’와 한센인이 거주했던 ‘병사(病舍)지대’ 두 구역은 1960년대까지 철조망으로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병사지대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감염을 우려해 직원지대의 미감(未感)시설로 옮겼는데,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만날 수 있었다. 그것도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서로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었다. 주차장에서 병원으로 이동하는 초입 솔숲이 아름다운 이곳은 그래서 탄식의 장소, ‘수탄장(愁嘆場)’으로 부른다.
수탄장에서 국립소록도병원까지 500m 해안산책로는 평화롭기 그지없는데, 병원 뒤 감금실과 검시실은 관람객을 숙연하게 한다. 일제의 인권탄압 상징물인 감금실은 일본인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감금과 체벌이 횡행하던 곳으로, 요양소 운영방식에 저항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는 목적으로 이용됐다. 환자들은 사후에도 검시의 수난을 당했다. 이 때문에 소록도 한센인들은 발병과 함께 가족과 생이별, 해부, 화장이라는 ‘3번의 죽음’을 당했다고 말한다.
뒤편의 중앙공원 역시 1940년 환자들의 눈물과 땀으로 완공했다. 완도와 득량도에서 운반한 기암괴석과 일본과 대만에서 들여와 심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아픈 역사의 증거물들이다.
주차장 오른편 직원지대 끝자락에는 소록도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소록대교 너머 녹동항이 바라보이는 언덕이다. 야외 정원과 십자가의 길 등이 꾸며진 이곳에서는 가족, 개인, 단체의 피정이 가능하다. 피정은 성당과 수도원에서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천주교 의식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거처하던 집은 주차장에서 성당으로 가는 길에 자리잡고 있다. 2005년 그들이 돌아간 후 폐허처럼 방치된 것을 광주대교구에서 관리권을 넘겨받아 정비했다. 별다른 장식 없는 소박한 침실과 거실도 그렇고, 부엌 한 켠에 40여 년 손때 묻은 낡은 오븐이 이들의 검소함을 되돌아보게 한다. 저마다의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사는 방문객들도 소록도의 아픔과 치유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큰 위로를 얻는다. 한번쯤은 소록도를 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