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광야에 피어난 불꽃 요르단Jordan①Dead Sea사해,Baptism Site예수 세례터

트래비 | 트래비 | 입력 2016.07.15 10:01



페트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2km에 이르는 협곡 사이를 통과한다

페트라, 사해, 아카바, 와디럼…. 
잡히지 않는 아름다움을 마주할 때마다 벅찬 숨을 내쉬었다. 미끈대는 소금바다와 붉은 모래의 감촉, 잿빛 바람에 묻혀 오던 베두인의 체취, 때마다 울려 퍼지던 굴곡진 아잔*소리와 사멸한 도시의 거대한 침묵. 모세의 기적처럼 놀라운 희열이, 요르단 왕국이, 순간마다 스며들었다.

*아잔adhān | 이슬람교에서 예배시간을 알리는 육성

암만 다운타운에서 마주한 예쁜 계단 길, 알고 보니 어느 카페에서 꾸민 것이었다

●요르단을 만난다는 것은

“괜찮겠어?”요르단에 간다고 했을 때 주위 반응은 한결같았다. 요르단과 페트라Petra를 동의어로 각인시키며 고조된 여행자가 그 염려의 이유를 알아채는 데는 몇 번의 눈 껌뻑일 시간이 필요했다.

중동, 아라비아 반도의 북서쪽에 자리한 한반도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땅. 요르단은 왼쪽으로 이스라엘, 위쪽은 시리아, 오른쪽은 이라크, 아래로 사우디아라비아를 국경으로 접하고 있는, 지도만 보더라도 참 난해한 나라다. 페트라를 잠시 제쳐두고, 지난해 IS에 대한 보복으로 군복을 입고서 직접 공습을 진두지휘했던 압둘라2세 요르단 국왕이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터키 제국이 몰락한 후 트랜스요르단으로 출발,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입헌군주국이 된 게 1946년. 아무리 아랍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유대관계를 강조하는 중동지역이라 해도 알다시피 경계를 둘러싼 정치·경제·사회 상황은 복잡하다. 

중동 평화협상과 친親서방 아랍 국가들간 탁월한 중재자 역할을 해 온 요르단 또한 인접국으로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피할 길이 없다. 게다가 세 차례의 중동-이스라엘 전쟁 때 요르단으로 이주한 수백만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걸프전 때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이주한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최근 시리아 난민들까지 합하면 난민의 규모는 엄청나다. 1948년 45만명에 불과했던 인구가 지금은 약 680만명이다. 그들이 일으키는 변화는 분명 불안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요르단 정부의 포용력으로 양질의 국가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은 이 나라에 대한 호기심을 새로 추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대해 아는 거라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였다는 것 외, 심지어 구약과 신약 시대의 무대라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이슬람 왕조들과 십자군 시대의 유적들은 차치하고라도 성서에 등장하는 지명 가운데 96곳이 요르단에 있는 데도 말이다. 상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여정, 요르단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아찔한 현기증마저 일었다. 

뫼벤픽 리조트에서 바라본 사해. 건너편은 이스라엘 땅이다

사해 주변 바위는 소금으로 뒤덮여 있다 

●Dead Sea 사해
죽은 바다의 힘

 차는 사해死海를 향해 달렸다. 좌로도 우로도 삭막한 광야다. 광야. 요르단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텅 비고 아득한 들에는 이따금 양떼가 지나가고 유목민의 허름한 텐트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 잡고 있다.

특급 호텔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사해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은 바다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해수면 아래 400m에 자리한다. 길이 75km, 폭 6~16km. 북부지역은 깊이가 400m에 달하고 남부지역은 5m 정도다. 물이 흘러들기만 하고 빠져나갈 곳 없이 증발되다 보니 염도가 높아 생물이 살 수 없다. 염도가 약 5%인 보통 바다와 달리 사해의 염도는 33%가 넘는다. 대신 많은 유기물이 피부와 신경통에 좋다고 해서 물과 진흙으로 만든 미용 제품은 기념품 일 순위다.

사해는 또한 천연자원의 보고다. 마그네슘과 칼슘염 등 화공 약품과 의약품의 원료로 쓰이는 화학물질이 수억 톤씩 매장돼 있다. 그런 사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그저 소금밭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이 댐을 건설하고 사해로 유입되는 요단강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라 가이드 압둘라는 말했지만, 어찌 그뿐일까. 온난화로 지표면은 건조해지고 물줄기는 말라 가는 것을.

호텔에 짐을 풀고 해변으로 나갔다. 수영을 못하는 사람에게 사해는 더할 나위 없다. 부력이 높아 저절로 뜬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곤란하다. 해변 앞 경고문에는 입수 전 주의사항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얼굴은 담그지 말고, 배영자세로 수영하고, 다이빙 하지 말고, 멀리 나가지 말고…’, 결국 ‘상처가 있으면 들어가지 마라’는 항목에 다다라 입수는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몸을 뒤집은 채 사해를 둥둥 떠다녔다. 손으로 움켜쥔 바닷물은 기름처럼 미끈대고 심하게 끈적인다. 괜한 아쉬움에 돌에 붙은 소금 한 덩이를 떼어내 혀에 대보고는 컥컥대며 내뱉는데, 누군가 입을 헹구라고 민물을 건네준다.

“왜 수영 안하죠? 걱정 말아요. 그냥 뜨는 걸요. 내가 당신을 치유해 줄게요.” 빨간 모자를 쓴 안내요원은 진흙까지 건네며 예수의 기적이라도 행할 것처럼 ‘치유Healing’란 단어를 되풀이했다. 그런 그에게 사해를 보고 흥분해 뛰어오다 무릎이 까졌다는 말까지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요단강가의 세례요한교회. 강물이 이곳까지 흘러들어오지만 지금은 많이 말라 있다. 초기 기독교 당시 세례터로 사용된 곳으로 지금도 교회로부터 연결된 계단으로 내려가 침례의식을 행한다

이스라엘 쪽 세례터에서 한 신자가 침례에 앞서 기도를 하고 있다

맞은편 이스라엘에서 치러지는 세례의식을 요르단 세례터의 여행자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Baptism Site 예수 세례터
요단강 위를 흐르는 것들

요르단에는 성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곳곳에 있다. 중요한 곳 중 하나가 요단강이다. 특히 성지순례를 하는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요단강에 들른다. 예수가 세례를 받았다는 신약성서의 기록 때문이다. 4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적 생애를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또 하나의 자연적인 국경을 이루는 요단강은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에서 시작해 사해로 흘러든다. 251km에 이르는 강의 서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동쪽이 골란고원과 요르단이다. 

요단강 폭은 불과 5m도 되지 않아 보였다. 그 지점을 사이에 두고 요르단과 이스라엘 정부는 각각 세례터를 만들었다. 요르단 쪽 세례터는 ‘알마그타스’, 웨스트뱅크 즉 이스라엘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 세례터는 ‘까스르 엘 야후드’다. 1994년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평화협정 전까지 이 일대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요르단이 알마그타스를 개방한 것은 2002년, 이스라엘은 주변의 지뢰를 제거하고 2011년이 되어서야 세례터를 완전히 개방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은 장소라면 그 강이 다를 리 없을 텐데 유네스코는 지난해 요르단 세례터만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부분은 기독교 내부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됐든 오늘날 성지순례 코스의 대부분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짜여지는 만큼 순례자 대부분은 이스라엘 세례터로 몰린다. 도착 때에도 건너편에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로 보이는 이들이 연신 강에 온몸을 담그며 세례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반면 요르단 쪽에서는 여행자 몇몇이 제방에 앉아 그 광경을 신기한 듯 바라보기만 했다. 동쪽인지 서쪽인지 혹은 예수가 요르단의 알마그타스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그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다.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이천년 전 예수가 요단강에 왔었다는 사실이다.

흙이 씻겨 내려와 누렇게 변한 요단강을 뒤로하는데, 가이드 압둘라가 강물을 손에 적셔 머리에 뿌리며 알 수 없는 아랍어로 기도를 해준다. “나는 무슬림이에요. 하지만 요단강에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이 오는 것을 보면 이 강물은 분명 성스러운 것이죠.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요단강은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입니다. 당신과 당신 가정에 축복이 있기를!” 

뫼벤픽 리조트에서 바라본 사해

 

글·사진 Travie writer 이세미  에디터 고서령 기자 취재협조 에티하드항공 www.etihad.com, 요르단관광청 www.mota.gov.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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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오바마의 휴양지 - 태평양 산호초 섬 '테티아로아'

매일경제 | 정유진 | 입력 2017.03.30 17:28




미국의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Obama)가 태평양의 산호초 섬 테티아로아(Tetiaroa)에 자서전을 쓰기 위해 머무르고 있다.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테티아로아는 13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민트빛 바다와 하얀 백사장, 산호초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테티아로아 섬은 배우 ‘말론 브랜도’가 타히티에서 영화촬영이 계기가 되어 1965년에 테티아로아 섬 전체를 ‘말론 브랜도’섬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그의 자식들이 섬 전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리조트 ‘The Brando’가 지어졌다.

말론 브랜도는 이 섬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일반 휴양지의 편의시설이 아닌 친환경 호텔을 지어 운영했으며, 그는 테티아로아 섬 야자수에 자신의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겼을 만큼 섬에 대한 애착이 컸다.

산호초 섬은 사람의 왕래가 덜해 지금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다. 바다가 깊지 않아 걸어서 인근 섬으로 갈 수 있다. 생태적으로도 보존이 잘 된 테티아로아 섬은 바닷새들이 많이 쉬어 가서 ‘새들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바닷새 보호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다른 지역보다 맑고 깨끗해서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카누 등 해양 레포츠를 즐기기에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편, 오바마는 이곳에서 쓰일 자서전 인세 일부를 자선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오바마가 테티아로아에서 즐기고 있을 테티아로아의 자연경관에 관심이 가는 또하나의 이유이다.

[MK 스타일 에디터 정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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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곳과 여행하고 싶은 곳, 그 사이 어딘가 쿠바

[세계일주 인문기행 - 여덟 번째 편지] 음악과 바다, 낭만과 혁명의 나라 쿠바

오마이뉴스 | 정수현 | 입력 2017.03.31 11:07




[오마이뉴스정수현 기자]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었던 작은 어촌마을 꼬히마르의 포구
ⓒ 정수현
쿠바는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를 닮았다

꼬히마르라는 바닷가 마을에 살던 노인 산티아고. 84일 동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만난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상어 떼의 습격. 드넓은 바다의 한가운데에서 노인이 가진 것은 고작 몽둥이와 노. 고독한 싸움 끝에 마침내 5일만에 항구로 귀환. 남은 것은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간 청새치의 앙상한 흔적 뿐.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입니다.

아바나 인근 꼬히마르에서 앉아 노인이 떠났다가 돌아왔을 바다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지금의 쿠바는 소설 속 주인공 산티아고를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쿠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수십년이 지난 낡은 건물과 올드카
ⓒ 정수현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 쿠바 관광의 핵심 요소

쿠바는 매우 역설적인 나라입니다.

먼저 우리의 인식에서 그렇습니다.

냉전시기에 쿠바는 빨간 나라였습니다. 북한과 사회주의 형제국가로서 우리에게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냉전시대 이후에도 우리의 최대 우방 미국이 지목한 '악의 축'이었기에 공식적으로 가까이 하기엔 먼 나라였습니다. 

한편으로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쿠바는 로망이었습니다. 카리브해와 멕시코만으로 둘러싸인 에메랄드빛 바다, 살사, 시가, 럼, 이국적인 풍경과 순박한 사람들. 미국과 쿠바가 다시 수교를 맺게 되면서 쿠바여행을 꿈꾸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쿠바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 의미는 자본주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밀려오면 여행의 낭만적 요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여행지 쿠바의 상황이 또한 역설적입니다.

쿠바의 상징과도 같은 풍경으로 여겨지는 올드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낡은 건물, 이동과 농경의 수단으로 쓰이는 마차, …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의 봉쇄정책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 흔적이지만, 그것이 쿠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볼 거리가 되었습니다.

관광업은 쿠바경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입니다. 그리고 관광수입의 상당 부분에 기여하는 인물이 쿠바인은 아니지만 쿠바를 사랑했던 체 게바라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혁명광장과 산따끌라라의 기념관에서 마주하는 혁명영웅 체 게바라에 대한 쿠바인들의 존경심과 사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사회주의혁명에 투신했던 저항의 아이콘 게바라가 이제는 매우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상품화 되어버린 현실은 아이러니 했습니다. 

헤밍웨이는 20년을 쿠바에서 지내며 '노인과 바다'를 비롯한 명작을 남겼습니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호텔, 집, 카페, 바, 해변에는 그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늘 북적였습니다. 적성국가 미국의 대문호가 벌어주는 달러 역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이자 독립혁명가였던 호세 마르티의 동상. 쿠바의 정신은 사회과학적인 이론 보다 시적인 정서에 가까웠습니다.
ⓒ 정수현
저항과 전염병으로 원주민이 거의 사라진 쿠바

쿠바의 역사에서도 콜럼버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상륙하여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을 했다면, 그것은 곧 착취와 학살의 다른 표현이 됩니다. 지금 쿠바에는 원주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절반은 저항하다가 절반은 전염병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노예들이 채웠습니다. 스페인 식민지배와 흑백혼혈이 지금의 쿠바를 구성하는 인구와 문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쿠바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동상은 피델 카스트로도 체 게바라도 아닌 호세 마르티입니다. 19세기 후반 스페인과의 독립투쟁에서 구심점이 되었던 그는 민족주의 혁명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글에 그치지 않고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했던 호세 마르티는 1895년 전장에서 시처럼 전사했습니다. 어디에 가나 들을 수 있어 쿠바의 아리랑으로 불리기도 하는 유명한 노래 '관따나메라'는 그의 시에서 가사를 따왔습니다. 

2016년 3월 쿠바를 방문했던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이 쿠바에 던진 화해의 메시지로 인용한 시 '하얀 장미'도 다름 아닌 호세 마르티의 작품입니다. 쿠바인들의 정신과 정서는 맑스도 레닌도, 피델도 게바라도 아닌 호세 마르티에 닿아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내부의 독립의지는 치열했지만 쿠바의 독립을 결정적으로 가능하게 한 요인은 외부에 있었습니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며 쿠바도 독립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부의 힘이 작용한 독립은 또 다른 종속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쿠바도 그랬습니다.

미군정 기간을 거쳐 외관상으로는 독립을 했지만, 미국이 정치적으로 언제든지 개입할 수 있는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고, 쿠바의 경제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사탕수수 농장과 제당소, 토지 등이 모두 미국자본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친미정권의 독재자들은 마피아와 손잡고 이익을 나누어 가지며 아바나를 미국 향락문화의 배설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달라진 것 없는 민중의 피폐한 삶, 꺾여버린 민족적 자존심은 필연적으로 혁명을 잉태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1956년 12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등 무장 게릴라 82명이 승선한 요트 '그란마'호가 쿠바의 동남부에 도착합니다.

게릴라군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을 거점으로 투쟁하며, 뉴욕타임스 등의 미디어를 활용하여 국내외적인 여론을 우호적으로 장악해갑니다. 마침내 독재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로 도망치고 1959년 1월 게릴라군이 아바나에 입성하며 쿠바혁명이 일단락됩니다.

 아바나 혁명광장 전경. 쿠바혁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체 게바라와 씨엔푸에고스의 이미지가 건물 외벽을 철제구조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 정수현
초기 카스트로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쿠바혁명이 처음부터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띤 것은 아니었습니다. 혁명 초기 카스트로의 성향은 민족주의적인 면이 많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턱 밑에서 친미정권을 뒤엎어 버린 이 혁명에 미국은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나오게 되고, 이것은 쿠바가 생존을 위해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으로 급속하게 기울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국교단절, 혁명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피그만 침공과 실패,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가 벌어진 쿠바 미사일 위기, 미국의 대(對)쿠바 봉쇄조치, CIA가 수없이 시도한 카스트로 암살기도 등 냉전기간 내내 쿠바와 미국은 극한으로 대치합니다.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그들의 방식을 수용하지 않는 쿠바를 혹독하게 다루었습니다. '악의 축'이 필요했던 미국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요 수출품인 설탕을 좋은 가격에 쳐주고, 원유를 값싸게 공급해주던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에 쿠바 경제는 큰 타격을 받습니다. 미국의 으름장 앞에 거의 모든 국가들이 등을 돌려 국제적인 외톨이가 되었기에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이 위기 앞에서 쿠바는 소련식 개혁개방이 아닌 중국식의 점진적인 개혁개방의 길을 선택합니다. 국영농장의 개혁, 자영업 허용, 관광업 진흥, 의료인력의 해외수출 등 경제적인 조치 뿐만 아니라 입법부를 강화하고 의원선출에 직접선거를 도입하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합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던 쿠바는 나름의 방식으로 다시 버티어냈습니다.

 민박 개념의 숙소 '까사'에 비치된 여행 정보북. 한국인 여행자들이 본인의 여행담과 체험정보를 오프라인 형식의 기록을 통해 교류합니다. 예전 대학교의 과방과 동아리방에 존재하던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 정수현
여행자가 마주하는 쿠바는 생경하면서도 매력적인 나라임에 틀림 없습니다.

당신이 쿠바를 방문한다면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이 제한된 환경에서 휴대폰 배터리가 천천히 닳아감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여다 보던 시간에 무엇을 해야할까 잠시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무용지물이 된 공중전화부스 앞에선 사람들을 보며 옛 추억을 더듬을 수도 있습니다. 

아바나에 처음 도착한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서 유명해진 소위 3대까사(까사는 정부에서 공식 인가를 받은 일종의 민박) 소파에 비치된 정보북을 뒤적거리며 여행정보를 수집하고, 또 자신의 경험을 볼펜으로 꾹꾹 눌러 기록하여 뒷사람에게 남기며 시간의 여백을 둔 소통방식을 체험할 수도 있습니다. 

쿠바의 명동이라고 불리는 오비스뽀 거리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라이브 음악연주와 그 리듬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자유로운 몸놀림, 그리고 무엇보다 섬나라 쿠바를 둘러싼 아름다운 바다를 당신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없었다면 쿠바는 달랐을까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있다 보니 그곳을 지나칠 때, 여행하기 좋은 곳과 살고 싶은 곳에 대해서 종종 생각합니다. 쿠바는 어떤 나라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혁명이 '여행하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면, 분명 쿠바혁명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시장경제의 빠른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의 습성을 감안해서 생각하더라도 비효율적인 시스템, 공공서비스에서 경험하는 경직된 관료문화가 존재합니다. 혁명 이후 몇 차례 있었던 대규모 탈주는 경제적인 배고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의 문제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대규모로 사람이 떠나야 했던 곳이 행복한 공간은 아니었을 터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충분히 인정합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봉쇄가 없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문맹퇴치와 높은 교육수준, 세계적인 의료기술과 의료시스템, 자급자족에 가까운 농업 등은 어려운 외부환경 속에서도 혁명이 목표한 사회적 가치들을 이룩한 성과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육과 의료, 국민소득을 종합하는 인간개발지수에서 중남미 국가 중 5위(2008년 기준)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쿠바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그래서 쿠바혁명 60년의 세월은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어부 산티아고를 닮았습니다. 성공이라 하기에는 허전하고, 실패라고 하기에는 모진 풍파를 견디어 낸 의지가 경이롭기 때문입니다.

 작은 바닷가 마을 쁠라야 히론의 석양. 섬나라 쿠바는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아름다운 바다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 정수현
"혁명은 계승됨으로써만 완성되는 것이며, 역사는 새로 써짐으로써만 실천적 뜻을 얻는 것입니다."

언젠가 당신이 했던 이 말을 쿠바에 들려주고 싶습니다.

인류사의 모든 혁명이 그랬습니다.  혁명 초창기의 이상은 현실 앞에서 시련을 겪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고 화석화되었습니다. 정치적인 독립과 경제적인 자립, 사회적인 평등을 꿈꾸었던 쿠바의 혁명도 여느 혁명처럼 그러한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쿠바에 머물며 그들의 혁명이 많이 늙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혁명 조차 추억으로 소비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으로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이전보다 쿠바가 더 넓은 세계를 마주할 것임은 확실해 보입니다. 물론 개방을 통한 변화가 꼭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봉쇄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맞이했던 어려움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점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쿠바의 미래가 희망적일 것이라 믿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에 정체성과 자립의 뿌리를 두고 있고, 거인에 맞서 60년을 싸워 낸 의지를 가진 쿠바인들이기에 혁명의 이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비스뽀 거리의 악사들이 옛 노래를 새로운 느낌으로 멋지게 연주하듯이 그렇게 '살고 싶은 나라'를 멋지게 만들어 내기를 바랍니다. 쿠바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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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

[박윤정의 웰컴 투 발트3국] 발트해의 진주.. 흥미로운 중세체험에 하루가 짧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

세계일보 | 이귀전 | 입력 2017.03.30 15:36




탈린 시청광장에서 이어진 비루거리에서는 중세 복장을 한 가이드가 눈길을 끈다. 영화에서나 볼 듯한 중세 복장으로 진지하고 큰 목소리로 설명을 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linn)의 아침은 여느 곳보다도 여유로워 보였다. 지난밤 북으로 달리던 자동차가 어둠이 내려앉은 발트해의 진주, 탈린에 도착했다. 발트해 깊숙이 자리 잡은 탈린은 핀란드만을 사이에 두고 헬싱키를 마주보고 있는 항구도시다. 북유럽 최고의 관광도시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발트 3국의 남쪽 끝, 리투아니아에서 시작된 이번 여행은 라트비아를 거쳐 이곳, 탈린에서 마무리된다.
탈린 톰페아 언덕의 알렉산데르 네프스키 교회는 러시아가 에스토니아를 지배하던 19세기에 세워졌다.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탈린은 현재 에스토니아 수도이자 최고의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주변 강대국에 의해 오랫동안 수탈당하고 지배받던 곳이다. 1219년 덴마크를 시작으로 독일, 스웨덴, 제정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확장될 때마다 풍요로운 평야지대인 에스토니아를 침략해 지배해 왔다. 1991년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고서야 이 같은 침략은 멈췄다. 현재는 오랜 피지배의 유물들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면서 중세와 현대가 공존하는 문화유적지로 각광받고 있다.

신시가지에는 현대적인 건물과 고급스러운 호텔, 최신 유행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과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서 있으며, 구시가지인 올드타운은 13~15세기 한자(Hansa)동맹 당시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실제로 고딕 첨탑과 자갈길, 매혹적인 건축물을 보면 북유럽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도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숙소에 들어가자 가족단위 여행객으로 북적거렸다.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에서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해 최종 숙소는 온천호텔로 잡았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톰페아성(Toompea Castle)이 보이는 호텔은 북유럽 최고의 휴양지답게 현대적 건물에 가족단위 여행객으로 북적거렸다. 따뜻한 아침햇살이 비치는 식당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들의 노래처럼 반갑게 귀를 적신다. 북유럽 혈통의 유달리 체격이 큰 직원들은 위압적인 덩치와 달리 환한 표정으로 반겨준다. 
탈린 톰페아성으로 향하는 길은 겨울바람으로 가득하다. 두터운 털코트를 두른 시민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지나쳐 간다.
호텔에서 500m 내에 올드타운과 알렉산데르 네프스키 교회, 톰페아 언덕 등 주요 문화유적들이 위치해 있다. 여행의 피로를 털어내고 늦은 아침을 먹은 후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올드타운은 고지대와 저지대의 두 지역으로 나뉜다. 호텔에서 가까운 톰페아 언덕의 고지대에는 톰베아성이 있고, 그 밑으로 비루문에 이르는 저지대가 형성돼 있다. 고지대는 탈린의 지배세력들이 사용하던 건물들이 남아 있고 저지대에는 13세기경부터 발전한 발트해 무역을 이끌었던 무역상들의 건물이 밀집해 있다.
탈린의 톰페아성 위로 에스토니아의 삼색기가 펄럭인다. 제정러시아 시절 지배의 상징이던 이 건물은 에스토니아의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톰페아성으로 향하는 길은 겨울바람으로 가득했다. 두터운 털코트를 두른 시민들이 분주한 걸음으로 지나쳐간다. 언덕길로 올라서니 톰페아성 위로 에스토니아의 삼색기가 펄럭인다. 제정러시아 시절, 탈린 지배의 상징이던 이 건물이 현재는 민의를 전달하는 에스토니아의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에스토니아인들은 자신들의 독립과 자유의 상징인 삼색기를 보며, 스스로 쟁취한 독립과 공화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1219년 덴마크인들이 탈린에 진출한 이후 세워진 톰 성당.
고지대에 위치한 ‘성모 마리아 루터회 톰성당’은 1219년 덴마크인들이 이곳에 진출한 이후 세워졌다. 오래된 건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잘 보존된 이 성당에는 탈린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기념물들이 전시돼 있다. 톰페아 언덕의 전망대에서는 탈린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45m에 불과한 낮은 언덕이지만 주변지대가 워낙 낮아 중세의 구시가지와 현대적 도시, 그리고 발트해까지 아름다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탈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르네상스 건물 블랙헤드 길드의 집.
벽돌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와 저지대로 접어드니 탈린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르네상스 건물, 블랙헤드 길드의 집이 보인다. 중세의 골목길은 곧이어 삼형제의 건물과 세자매의 건물로 이어진다. 15세기에 지어진 세자매의 건물은 뾰족하게 솟은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중세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들은 현재 호텔로 개조돼 사용되고 있다. 고색창연한 길은 시청광장으로 이어진다. 광장 앞 구시청사는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청이라고 한다. 고딕 양식으로 보존된 유일한 건물은 13세기 건설되기 시작해 1404년에 완성돼 역사가 700년이 넘는다. 여전히 도시의 대표적 건물로 자리 잡으면서 시청광장도 구시가지의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탈린 중세의 골목길에 있는 삼형제의 건물.
15세기에 지어진 세자매의 건물. 뾰족하게 솟은 세 개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중세시대 양식을 잘 보여주는 이 건물들은 현재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름에는 옥외 카페로 가득하고, 축제와 야외 콘서트, 박람회 등이 열린다. 겨울에는 우뚝 솟은 가문비나무를 중심으로 마법의 크리스마스 시장으로 변모한다. 1441년 이곳에 세워진 가문비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의 효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난 뒤여서 아름다운 트리를 볼 수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탈린 비루거리에는 중세시대 복장을 입고 손님의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보인다. 중세를 테마로 하는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시청광장에서 이어진 비루거리에서는 중세 복장을 한 가이드가 눈길을 끈다. 영화에서나 볼 듯한 중세 복장으로 진지하고 큰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거리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중세시대 복장을 하고 손님을 이끄는 사람들도 보인다. 중세를 테마로 하는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가게를 방문해 이것저것 보고 싶었지만 시간을 너무 지체할 것 같아 내일 다시 둘러보기로 하고 거리 끝까지 걸었다.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탈린의 명물이라는 흑설탕에 볶은 아몬드다. 중세식 마차 위에서 중세시대 복장을 한 판매원이 시식을 권한다. 달콤하고 고소한 맛에 이끌려 한 봉지를 샀다.
13세기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니콜라스 교회는 중세시대 무역상인들의 헌금으로 조성됐다. 러시아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했다.
저지대의 남쪽과 동쪽으로 도시 벽을 따라 달리는 방어 경로가 있다. 이 거리에는 수많은 갤러리, 수공예 워크숍, 카페 및 엔터테인먼트 장소들이 들어서 있다. 중세의 역사 속에 있는 듯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아름다운 소품과 역사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탈린 구시가지 여행의 출발점인 비루문. 감시탑으로 쓰였을 쌍둥이 탑이 양 옆으로 솟아 지나가는 관광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탈린의 ‘부엌을 들여다보아라’ 성탑. 탈린에서 높은 지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남의 집 부엌이 보였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구시가지 여행의 출발점이라는 비루문에 도착했다. 언덕에서부터 내려온 나에게는 마지막 코스다. 구시가지로 들어서는 6개의 대문 중 하나인 비루문은 감시탑으로 쓰였을 쌍둥이 탑이 양 옆으로 솟아 지나가는 관광객을 내려다보고 있다.
탈린의 재미있는 식당 안내판.
길을 돌아 다시 구시가지로 들어서, 조금 전 지나쳐 왔던 재미있는 중세 분위기의 식당을 찾았다. 중세를 테마로 한 레스토랑에는 촛불을 조명으로 그 시대의 복장을 한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낯선 모습의 관광객에게 신이 난 듯 메뉴를 설명한다. 중세의 음식은 현대인에게도 풍요로운 저녁식사를 선사한다. 중세의 역사 속에서 하루를 보내다 보니 탈린은 신비스럽고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왔다.

여행가·민트투어 대표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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