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BORN TO WIN)

                                                                               -윌리암 맥도날드

                                                   제 9 과

                                      본문 : 누가복음 23:32, 39-43

                                       

                                 최후의 순간에 얻은 생명

                           (Getting Life At The Last Minute)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양편에 있던 두 강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주전 약 7백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로 예언한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리라" (사 53;12)고 하는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그 당시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른 군중들과 더불어 예수님 곁에 달렸던 두 강도들 또한 예수님을 향하여 조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그 심한 고통 중에서도 이 두 강도들이 아무 죄없이 곁에서 죽어가는 예수님을 향해 조롱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참 기이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조롱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주장하는 대로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제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아니면 하나님이 와서 당신을 구원하게 하라.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

   그런데 잠시 후, 한 행악 자는 그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돌이켜 보며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동료 죄수를 꾸짖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는 이제 곧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덴데,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 두렵지도 않느냐?"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너와 나는 우리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을 받고 있지만, 이 사람은 결코 아무 죄가 없다."

   그리고 그는 주 예수께 얼굴을 돌이켜, 이처럼 간구했습니다. "주님, 당신이 왕으로 임하실때, 나를 기억하소서." 죽어가는 사람이 역시 지금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참회하는 강도를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말하는 것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하신 일의 첫 번째 열매는 한 강도의 영혼을 구원해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곁에서 죽어가는 한 강도를 구원해 주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시고, 또한 그를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이제 다시 이 이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중한 교훈들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How To take Sides With God)


   첫 번째 교훈은, 인간은 모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강도는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고, 그 죄 값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정말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거룩하신 분)을 향하여 담대하게 조롱과 저주를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사람은 자신의 말로서 자신의 죄를 드러낸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18)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 하도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이러한 악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만일 어느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회개한 강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완전히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주님 앞에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죄악 중에 살아온 자신으로부터 돌아섰고, 그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 역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이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 이르러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천하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들의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행 17:30-31).

   그러나, 단지 회개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님을 나의 주님(Lord)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이는 그분을 나의 삶에 주인(Master)으로 모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어가던 강도는 자신의 곁에 달리신 그분을 자신의 주(Lord)와 구주(Saviour)로 믿었고, 또한 그분께 자신의 분명한 믿음(faith)을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롬 10:9).

   회개한 강도의 믿음은 그의 놀라운 고백(confession)을 통하여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 당신의 왕국에 이르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놀라운 믿음을 보게 됩니다. 그 강도는 죽어가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느 날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에수님께 장차 그의 은혜 가운데서 자신을 기억해 주실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이 강도는 구주께 대한 참으로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분명한 교훈은, 우리는 자기의 선행을 통하여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의 선행에 의해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이 강도에게는 결코 구원의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는, 오직 악한 행실들로 가득찬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가 마지막에 자신을 돌이켜 선한 일을 하기 원한다 했을지라도 그의 손과 발은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음으로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거듭거듭 우리 인간은 자신의 어떠한 선행에 의해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참고 : 에베소서 2:8-9 ; 디도서 3:5). 우리 인간의 의(義)는 하나님 앞에 다만 헌 누더기와 같을 뿐이라고 성경은 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이사야 64:6).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이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believe)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6:28-29). 이것이 우리 모두가 모든 것을 믿음으로 시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한 행위는 우리가 구원함을 받은 이후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즉 선행은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선행은 열매이지, 그 뿌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선행은 우리가 구원 받음으로써 마땅히 드러내야 할 열매입니다(에베소서 2;10).

   죽어가던 강도의 구원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우리는 침례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강도에게 있어서 침례를 받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침례를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침례에 의하여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강도 역시 가능했다면 마땅히 침례를 받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침례는 구원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침례는 구원 받은 자가 자신의 믿음을 증거하는 고백이며, 순종의 행위입니다.


   구원은 어떤 이상한 감정이 따르는 가? (Is Salvation A Strange Feeling?)


   다음으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감정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될 때 감정적으로 행복한 느낌이나 혹은 어떤 신비스러운 체험을 해야만 자신들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아주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잇습니다. 만일 당신이 구원받은 강도에게 "당신은 구원받은 느낌이 있었느냐?" 고 묻는 다면 아마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오직 큰 고통을 느낀 것이 나의 모든 전부" 라고 대답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자신이 구원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이 구원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도 동일한 원리입니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은, 오늘 날의 우리들은 직접적인 예수님의 음성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 곧 성경을 통해서 직접 우리들에게 그는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은 구원함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참고 요 5:24 ; 롬 10:13). 이와 같은 사실은, 구원은 감정적인 즐거운 느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The Bible)을 통하여 확신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참고구절 - 요한1서 5:13).

   다음으로, 믿는 자들은 그들이 죽은 후 곧 바로 그리스도에게로 올라가 그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3 말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Today)-최선의 시간에(the best time)

   나와 함께(With Me)-최선의 동반자와 함께(the best company)

   낙원 안에(In Paradise)-최선의 장소에(the best place)


   우리 그리스도인은 진정으로 이와 같은 것 모두를 얻은 자들입니다.

   다음으로,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두 사람의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절망하지 않을 구원함을 얻었고

   오직 그 한 사람만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구원함을 얻게 되었다.


   예수님의 곁에 있던 자들 중에 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가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지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십자가의 어느 편 강도에 속한 자입니까?

   또 한 가지 교훈은, 한 사람은 그 자신의 최후의 순간에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강도는 영원한 세계를 향한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강도처럼 자신의 구원을 최후의 순간까지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 자신의 최후 순간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영접할 시간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 이로다" (고후 6:2).

    (Now is the accepted time, behold, now is the day of salvation).


   이제 이 이야기를 통한 마지막 교훈입니다!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 중에도 멸망 당하는 자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왼편에 달려있던 다른 강도도 예수님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그는 가장 먼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침례(유아세례도 포함)를 받았고, 교회에 참석했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성가대나 주일하교 교사 혹은 교회의 제직의 직분 등)에 참여 하였지만, 그러할지라도, 만일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는 여전히 잃어버려진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불행하게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자들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 7;22-23).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누가13:26-2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엄숙한 경고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강도 중 한 사람은, 자신의 구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구원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다른 강도는 자신의 최후 순간에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의 믿음을 잘 요약한 유명한 찬송의 일부입니다.


   임마누엘 보좌에서 흐르는 보혈 샘,

   이 샘에 모든 죄인들 죄 씻음 받도다.

   죄 씻음 받도다. 죄 씻음 받도다.

   이 샘에 모든 죄인들 죄 씻음 받도다.


   저 죽어가던 강도도 이 샘에 씻었네.

   저 강도 같은 이 몸도 죄 씻음 받았네.

   죄 씻음 받았네. 죄 씻음 받았네.

   저 강도 같은 이 몸도 죄 씻음 받았네.

Posted by 행복자
,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생명 없는 허수아비 신자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기독교와 비기독교와의 확실한 차이가 무엇인가?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가?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의 약자(略字)이다(요한일서 2:25).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가? 생명이 아닌가? 눈이 있어 길을 다니나 참된 길이 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요, 세상 만물을 보고 있으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알지못하던 살았다 하나 죽은 자가 아니었던가? 이와 같이 죽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오늘의 기독교인이 생명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는 진정 슬픈 것이다.

   누구보다도 필자는 생명 없는 종교인 생활을 17년이나 하였던바 이 일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다. 서두의 제목을 보면 허수아비 신자들을 제시하였다. 허수아비는 모양은 틀림없이 사람이라서 논 가운데 세워두면 참새가 처음에는 속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 생명 없는 것이 드러나면 그 때는 생명 있는 참새를 속이지 못한다.

   오늘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자의 모양은 가졌으나 생명이 없으므로 사단의 조롱거리요 장난감으로 전락하여 사단에게 평생 농락당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 지옥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달을 터이니 그 절망이 어떠하겠는가?

   여기서는 사단에게 농락당하는 생명 없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생명 없는 종교인들의 첫 번째 모습은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명 없는 신자들은 생명이 없으므로 성경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혹 깨닫는다 할지라도 더듬는 수준이니 그 답답함이 얼마나 하겠는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는 구원의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동네의 선배 목사님에게 가서 " 나 구원 받았다" 고 간증하였다. 그는 신앙경험이 아주 적었으므로 그가 당연히 구원 받았으리라 생각하고 간증하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기가 막힌 말이었다. 함부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시한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2절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 성도는 교회 출석 경력이 많지 아니하므로 어리둥절하여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여 다시 그 말씀을 살펴보니 믿는 성도들의 상급에 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가 영적인 아이라도 깨닫는 것을 목사님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생명 없는 죽은 신자는 지도자건 평신도건 소경일 뿐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이므로 성경이 깨달아지지 아니하므로 고통 당하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열심인 신자들이 여호와 증인을 비롯한 드러난 이단들에게 미혹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의 무지에서 오며, 생명 없는 죽은 신자이기에 오는 것이다.

   생명 없는 거짓 신자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하면서 쭉정이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쭉정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열심 없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그러할까? 그러면 기독교의 열심 있는 신자들은 여기에 해당 없는가? 정말 그러할까? 아니다. 분명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차이다. 알곡과 쭉정이는 생명의 차이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쭉정이는 죽은 곡식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대단한 열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킨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생명 없는 쭉정이일 수 있다.

   말씀 부분에 관해 더 생각해 보자! 필자가 여호와 증인에 관해 언급하였거니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유치하고 억지인가는 거듭난 생명 있는 신자라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니와 성경은 너무도 명확한 증거들을 말하고 있다. 생명은 성경을 깨닫는 능력인 것이다.

   전도하면서 성경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는 신자들을 만나 왜 그토록 성경을 모르냐고 물으면 "우리가 전문가도 아닐 뿐 아니라 바빠서 언제 성경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다. 영생을 얻으면 살았으므로 자연히 성경이 깨달아진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요 당연한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당연한 것이다.

   생명 없는 신자의 두 번째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난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두려워하여 순종하는 것은 거듭난 자의 당연한 변화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고, 사도들은 자기 시대를 다 보내고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직 지금은 그분들에 의해서 남겨진 성경과 성경을 깨닫게하는 성령님이 역사하실 뿐이다. 현대의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고는 결코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 사실이 그러한데 현실은 어떠한가? 성경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지할 뿐 아니라 알아도 순종치 아니한다.

   필자는 어떤 경우에 성경의 진실한 가르침을 말하면 그들은 자기 교회의 체제를 이야기하거나 목사님의 가르침이 제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만든 제도나 사람의 가르침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보다는 귀동냥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얻어들은 지식이 전부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고백도 그러하다. 자세히 말씀으로 개인 교제를 하고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자기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자신은 주일날이나 수요일 예배시간에 간단한 설교 듣고 집에 오면 그만이었다고 고백한다. 말씀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는 것이 생명있는 자의 기쁨이다. 그러나 생명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높이되 심지어 말씀의 내용과 반하는 이야기에도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따라가는 실정이다!

   제도를 이야기하였거니와 생명 없는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도와 조직이 필요할 뿐이다. 무슨 뜻인가? 생명 없는 마네킹을 생각해보자! 마네킹 10개를 세워놓고 아무리 말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이리저리 옮겨놓으면 움직이는 피동적인 물체일 뿐이다. 그러나 생명 있는 사람을 세워두고 있으면 자신의 분별력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제목처럼 허수아비는 생명이 없으므로 언제든지 거기에 머물 뿐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이므로 성경을 읽고 깨닫고 존경하고 순종하고자 한다.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주님 앞에 죄송하며 스스로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생명이요 생명의 활동이다. 오늘날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종교인들을 모아놓고 조직을 만들어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운영을 해나가면 다 교회인줄 아는가? 참된 교회는 거듭난 생명체들이 모여 조직과 규칙이 없어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름다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어 나아간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생명 있는 자들의 특징은 성경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양심에서부터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산사람이 꼬집으면 통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무슨 통증이 있겠는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들으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며 사람의 말을 주의 종의 말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숭배하는 오늘의 현실은 기독교에 사람 우상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증거인 것이다.

   세 번째로 생명 있는 자는 생명의 근원을 안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피에 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으므로 구약이 지시하는 동물들의 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진들은 부지런히 속죄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사는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지 못했다. 히브리서에는 이와 같은 구속의 진리가 분명하게 다루어져 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브리서 10: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사 죄인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는데 이것이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의 피가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필자가 교파를 초월하여 누구를 만나든지 생명의 근원되는 피의 공로를 사랑하는가를 살펴보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피의 능력을 알고 전하고 사랑하며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떤 집사님을 만나서 대화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보고자한다. 필자는 "거듭난 경험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당연히 거듭났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거듭났느냐" 고 물으니 "예수님을 믿으니 거듭났지 않는냐?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니 당연히 구원 받았으며 거듭났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거듭남에는 증거가 있지 않겠는가?" 하니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증거가 필요하느냐"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덧봍이기를 자기도 처음에는 교회에 나가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잘 믿지 못하였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마음속에 주님을 틀림없이 믿으니 구원 받았다고 주장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아니한 것을 생명 있는 자는 이미 알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영혼의 생명은 십자가의 피에 있다. 거듭난 사람들이 피를 사랑하고 피를 전파하고 피를 노래하는 그 감격을 아는가? 바울은 이 일에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 여러 곳에서 외치고 있다. 피의 가치를!(로마서 3:25, 에베소서 1:7, 골로새서 1:20, 히브리서 9:11~22 등). 그는 단정코 외치기를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브리서 9:22)고 하였다.

   거듭난 경험 있는 어떤 찬송가 저자는 피의 속죄가 맘속에 증거가 된다고 찬송하고 있다 (찬송가 186장 5절). 그리고 184장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피를 증거하고 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 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 얼마나 놀라운 찬송인가! 이외에도 수많은 찬송들이 피의 공로를 증거하고 있다. 교회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시인들이 십자가의 피 공로를 노래하였다. 그렇다. 거듭난 생명은 피의 가치를 안다. 거듭났다고 말하거나, 구원을 주장하거나, 영생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가치를 양심과 인격으로 깨닫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깨끗하게 씻음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그 책은 생명 있는 자들의 이름만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은 생명체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의 뜻도 "에클레시아"라고 하여 "불러낸 무리"라는 뜻이다. 생명 있는 자들이 따로 모여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신성한 모임인 것이다. 만약 이글을 읽는 독자 중에 생명의 활동이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대의 영원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생명 없는 허수아비 신자, 쭉정이 신자가 아닌지 자신의 구원 문제를 냉정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생명 없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Posted by 행복자
,

초대장

믿음,신앙 2015. 11. 3. 13:04

                초 대 장


대영제국(大英帝國)의 빅토리아 여왕이 민정시찰을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흐린 날씨와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왕은 여행을 중지하고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목동이 와서 여왕의 행차를 안전하게 안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목동은 여러 해 동안 양떼를 치면서 짙은 안개 속에서도 익숙하게 양들을 인도해 온 소년 이었습니다.

마침내 여왕의 행렬이 목동의 안내로 목적지까지 다다랐을 때, 목동은 황급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느닷없이 목동의 집에 왕명을 받은 신하가 찾아와서 한 통의 편지를 전했습니다. 여왕이 목동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목동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뜯었습니다. 거기에는 짤막한 초청의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내게로 오라(Come to me).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Just Come as You are).

   지금 오라(Come Now)."


목동의 뒷 이야기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의 진수를 깊이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쉽게 이 목동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지금 사랑의 하나님은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에게 보내신 편지를 읽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죄를 용납하실 수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초청하십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깨끗하게, 눈과 같이 깨끗하게 씻어주시겠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모든 구속을 이루어 놓고 당신을 부르시는 사랑의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그렇습니다. 이제 나오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을 움직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초대의 자리에 나오십시오.그러면 쉼을 얻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지금이 예수님을 믿을 때입니다. 지금이 구원받을 때입니다. 지금 오십시오,


                                                                                                                                                   - 전도출판사 -

Posted by 행복자
,

복음말씀

 

                     거듭남(Born Again)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처음 태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 하늘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두 번째 출생)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첫 번째 생일은 1951년입니다. 저는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요9:34)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는 하나님에 관해서나 영원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지도 못하였고 또 관심도 없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유아 세례를 받앗고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으로 알고 지내왔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오락실등의 의심스러운 장소에 가는 일은 허락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일 학교와 교회의 집회에 자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소년이 되었을 때, 저는 간추린 교리문답서를 공부하였고, 11살이 되었을 때에는 형 해롤드와 저는 교회 집회에 참석해보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하여 저희는 먼저 집사님들과 만나야 했고, 집사님들은 우리형제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 해롤드는 그분들의 질문에 대답을 아주 잘하였고 저는 그 대답에 그대로 동의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우리 형제는 교회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져, 만찬 예배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천국을 향해 순조로운 항해를 하는 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에, 형 해롤드는 복음에 관한 어느 소책자를 읽는 중에 그 자신이 여전히 길을 잃어버린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해롤드는 그 때로부터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었고 자신이 지은 죄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의 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아 지워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일이 있고난 바로 직후에 해롤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순하게 모이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그들과 성경말씀으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형은 집으로 다시 돌아오자마자 그와 같은 유형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이 곳에서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서 약 18km 떨어진 곳의 작은 읍 소재지에 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하나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날부터 형 해롤드는 조금도 힘들어 하지않고, 변치 않는 단호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서, 매 주일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그 곳 모임에 있는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18km나 떨어져 있는 곳까지,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해롤드의 모습은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부모님에게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린 우리 형제들은 각자의 자전거를 타고 갔지만 부모님들은 한 사람의 자리 밖에 없는 경마차에 두 분이 타고 그곳 모임의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나의 눈이 크게 떠지기 시작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매 주일이 지나면서 우리 형제의 주일학교 교사이신 미스 반데카르 선생님은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말씀을 우리의 어린 마음 속에다 천공기로 강력하게 구멍을 뚫어서 그 속에다 집어넣어 주는 것처럼 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잃어버린 죄인이며, 그래서 저 아래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은 죄들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이 모든 죄로 인하여 저와 하나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인이라 하더라도 죄인은 결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의 존전에서 결코 거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대한 진리가 완전히 소화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로마서 6장 23절 말씀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웠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죽음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 이 둘은(원)죄의 결과였습니다. 즉 죄의 삯에 대한 값이 지불되어야 하는데, 내가 지은 죄 하나하나 모두에 대하여 값이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이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장 위대한것을 예비해놓으셨습니다. 곧 제2위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모든 사람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한 댓가로 예비해놓으셨습니다. 미스 반데카르 선생님은 히브리서 9장 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하는 말씀을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우리 마음 판에 잘박힌 못을 박아 놓은 것처럼 그렇게 강하게 잘 박아 놓으셨는지요!  그래서 우리는 크고 흰 백보좌 심판이 마치 지금 현재 우리 앞에 펼쳐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생애에서 지금 이곳에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형제들 모두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시는 법정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만하고, 결국 우리는 지옥 불 못 속에 던져져서(계20:10-15),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얼마나 두려워하며 떨었었는지요!

 

   그렇게 3년의 두려움 속에 사는 불행한 세월을 보낸 후, 어느 주일날에 시카고로부터 세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와서 우리의 조그만 모임을 방문하였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주의 죽으심과 그 안에 있는 주님을 기억하는 만찬 예배가 끝난 직후에 "그리스인 토니'라고 알려진 방문자 중에 한 사람이 제게 조용히 다가와서 제게 구원받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즉각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구원받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분은 사이즈가 비교적 큰 성경책을 펼치더니 잃어버린 상태에 관한 많은 성경구절을 찾아서 저를 위해 읽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사실을 믿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즉각 "물론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이분은 저로 하여금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 복음 3장 16절 본문에서 세상이 나오면 세상이라는 말 대신에 그곳에 제 이름을 대신 넣어서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에므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만약 에므리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를 믿기만 하면 에므리는 멸망치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

   저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죽으셨고 저의 모든 죄를 위해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은 모든 죄들의 유죄성과 타고난 원죄가 고스란히 저에게 그대로 있는 그 곳에서 저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하나님을 영접하였으니 하나님은 결코 제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영접하였으니 저는 이미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두 번째 탄생 즉, 영적인 탄생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유죄에 대한 책임을 지시고 정당한 값의 죄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물로서 저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이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에게 어떻게 쏟아 부으셨으며, 저를 인도하사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로 믿게 하셨는가에 관한 나의 경험과 나의 간증입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지난 모든 세월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제게 신실하신분이신가를 증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저를 모든 어려운일 가운데서도 넉넉히 지켜주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입증해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EMMAUS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