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몽학선생 아래서 착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여!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5).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고자 기록되었다(디모데후서 3:15, 요한복음 20:31). 만약 성경을 읽고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성경의 주제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는 마땅히 성경을 다시 읽되 구원의 길을 알고자 하는 목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의 총체적 내용이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구원을 이루는 부분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중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몽학선생도 구원받기에 이르는 한 단계를 말하고 있다.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우쳐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율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몽학선생은 구원자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의 간계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몽학선생, 즉 율법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이러한 부분을 깨우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구원을 증거하는 성경의 단계를 4단계로 압축 정리함으로 중간 단계에서 마치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 중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필자가 구원의 단계를 편의상 4단계로 나눈 것임을 밝혀둔다.
구도자가 구원받기 위하여 넘어야 할 제 1단계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있다. 불신자가 구원을 받으려면 우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심을 발견하는 과정이 필수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가지 초능력적인 기적이나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기도응답으로 자신의 실존을 증거하신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 1단계, 즉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믿게 된 것만으로 구원받은 증거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비한 경험, 기도응답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아주 지혜롭고 영리하여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강한지 도대체 구원의 진리를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자기의 경험만 꼭 붙잡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명히 믿으나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제 2단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발견한 사람은 곧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나의 근본은 무엇인가? 타락한 죄인 아닌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며 양심의 악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인 것이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도서 7:20).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으며, 아담을 통하여 인간 세계에 들어온 죄가 어떻게 번창하여 나갔는가 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인간과 죄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어느 인간이나 죄와 싸워서 완전히 승리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선 믿음의 조상이요 우리 신앙의 표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조상 대대로 살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새생활을 시작하는 일이 작은 일이겠는가? 이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요 죽음을 무릅쓴 새로운 도전이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간증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아브라함도 두 번이나 인간을 무서워하며 자기의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속임으로 하나님과 아내에게 죄를 지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그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는 죄인이었던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로마서 4:2).
다윗을 보라.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다. 그같이 선정을 베푼 왕이 역사 이래로 없었다. 참으로 다윗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표상 중 한 인물로서 성경은 다윗의 훌륭한 인격과 신앙심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다윗도 몇 번의 실수가 있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우리아의 아내를 불법으로 취한 사건이 바로 그 실수 중 하나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또한 그 죄를 회피하여 보려는 간사한 꾀에 빠져서 결국은 악한 방법으로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믿음이 있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갑자기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성경은 다윗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죄인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혹자는 "노아에 관해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다(창세기 6:9). 물론 성경에 기록된 이와 같은 말씀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더욱 자세히 보라. 창세기 6장 9절에 이 말씀이 나오는데 이말씀 전에 8절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이 먼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은혜가 무엇인가? 불쌍한 처지, 좋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동정이 아닌가? 또한 노아는 술취해서 벌거벗고 누우므로 실수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던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 하나님은 인생을 부패하고 썩은 정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단언하셨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야만 한다. 그대가 죄인인 것을... .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심장으로 깨달았다면 그 단계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2단계만 깨닫고 구원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2단계를 깨닫고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여 예배당에 가서 울고불고 탄식하는 것을 마치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죄인인 것을 깨달은 것은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깨달은 것과 같다. 그가 '물'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마태복음 1:21).
이제 제 3단계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죄인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죄값이 멸망의 지옥인 것을 알아야 한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잘못됨을 깨닫고 두려워하고 있지만 지옥의 형벌과 연결시켜 깨닫고 있는 면은 매우 빈약하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죄인이 저주의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 필자를 놀라게 한다.
왜 그런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복신앙의 흐름에 잡혀 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복을 가르치지만 지옥의 끔찍한 상황은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 결과라고 필자는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나 지옥에 대해서 약간 들은 것,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듣고 깨달아 본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10명중 8,9명이 "없다"고 답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슬프고 탄식할 일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17)는 말씀이 아닌가?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여 보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이 아닌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멸망의 지옥을 증거하려 함이 아닌가? 그리고 멸망의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는 죄인을 그곳에서 건지려함이 아닌가? 그런데, 집사, 장로 직분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지옥에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없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양떼들은 지옥과 천국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 교회 교인은 다 천국 가겠거니..." 착각하고 안일한 생활을 즐기는 목사님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기독교의 상황은 사랑 많으신 주님이 아니더라도 양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릴만하다.
멸망의 지옥을 우리는 마가복음 9장 4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지옥의 끔찍한 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옥은 영원히 불타는 곳이다. 세상의 어떤 불도 지옥 불보다 뜨겁고 무서운 불은 없다.
(2) 지옥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모든 소망이 사라진 곳이다. 성경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요한계시록 20:10). 거기에는 후회와 탄식과 눈물과 원망과 저주만 가득할 뿐이다(마태복음 13:42).
(3)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인격을 완전히 무시당한 채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역사상 가장 극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곳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지옥에 "던지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던지운다'는 뜻은 속된 말로 "쳐 넣는다"는 뜻이다(마가복음 9:45). 얼마나 절망적인 말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또한 '던지운다'는 뜻은 강제로 쳐 넣는다는 뜻 아닌가? 이토록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지옥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영혼의 문제를 지금 당장 검토하여 보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를 깨닫고 구원을 받으므로 영원한 지옥을 면하게 되기를 바란다. 멸망의 지옥과 거기에 가게 되는 원인인 죄 문제를 깨달았다면 비로소 구원받을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제 4단계, 즉 구원받는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죄 문제에 대해 논할 때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도 죄를 정복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예외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신분상 죄를 정복한 분이시다. 아담의 피를 받지 아니한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 되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의탁하사 이 땅에 오심을 말한다.
둘째로, 도덕적으로 죄를 정복하신 분이시다. 복음서를 보라.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언행 중에서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의 유혹을 완전하게 정복하셨다.
셋째, 능력으로 죄를 정복하셨다.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 값으로 죽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셨으나 3일만에 당당히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 즉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넷째, 예수님은 실제로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죄와 싸워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생들의 죄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하셨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짊어지고 가셔서 무덤에 묻어버리셨다.
당신의 모든 죄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무덤에 묻힐 때 다 묻어버리시고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것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몸으로 묻히신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묻어둔 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입증되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나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
오 그대여! 그대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대의 모든 죄가 그대의 어깨에서 다 사라졌으니(주님이 대신 담당하셨으니) 그대를 지옥가게 하는 모든 죄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대가 제 3단계까지 다 깨달았다 할지라도 만약 이 속죄, 곧 영원한 속죄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죄에서 해방 받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몽학 선생 아래 있는 것이요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옛날 몽학선생은 어린아이를 성년이 될 때까지 잘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년이 되는 과정까지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3단계까지는 몽학선생의 관점이지 구원은 아닌 것이다.
모든 죄의 완전 속죄를 믿음으로 그대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이 되었다면 그대는 몽학선생에서 이미 벗어나 구원에 이른 것이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