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람을 따르는 신자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로마서 3:4)


   우리는 앞에서 주님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위대한 신앙인들이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끔찍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는 왜 이와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알려면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사단의 끔찍한 전략에 의한 역사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창세 이래로 한번도 변경되지 않고 진행되어오고 있으므로 성경을 조금만 세밀하게 연구하면 즉시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대대로 사단에게 속고 있다.

그렇다면 사단의 탁월한 전략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부추기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높이는 일이다. 간단한 이 전략이 놀랍게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을 지옥에 데려가는데 성공하였고 기독교를 3류 종교로 타락시켜 비참한 모습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사람이 창시자가 아니다.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서 기독교를 시작하셨고 그의 아들, 즉 사람이 아닌 신께서 만드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상 종교들은 사단이 인간 중에 명철한 사람을 택하여 자기 능력을 입혀주어 종교 창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위력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지옥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영계(靈界)의 이와 같은 실상을 인간들이 한번만이라도 상상한다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가능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실로 안타까운 일은 사단이 기독교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실상이다. 기독교인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신앙심이 좋고 실력이 있고 외모가 나아보이면 곧잘 사단의 목표가 된다. 일단 사단은 자기의 목표를 정하고 나면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그를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자로 세운다. 성공하게 하고 남보다 다른 장점이 드러나게 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게 한다. 그는 명성을 얻으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에 이른다.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게 된다. 그리하여 특별한 사람으로, 특별한 지도자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는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지배하는 지배자로 나타나도 사람들은 당연시 여기는 것이다. 이단은 이렇게 나타나며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받은 종이라고 자기를 선전하기에 이른다. 주변에서 그렇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러분 주변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현상은 기독교에 만연하고 있는 모습이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되시다." 사람은 다 거짓되다. 다른 사람보다 나아도 나은 것이 아니며 특별하여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단은 사람을 높여서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님에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목하게 한다. 이렇게 하여 사람 우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람 우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선량한 양들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마태복음 23장에서 경고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시니 곧 그리스도니라"(마태복음 23:8~10).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에는 선생이 없는 것인가? 지도자도 없는 것인가? 아비도 필요 없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교회에는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하며 교회를 인도하는 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비의 마음으로 자녀를 돌아보는 바울과 같은 지도자가 교회 안에 많아야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그들이 선생으로 호칭 받으며 군림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지도자라 칭함 받으며 양들을 늑탈할 것을 막고자 한 뜻이다. 아비라 하여 양들과 격차를 두고 교회 안에 계급을 만들어내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오직 예수뿐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디모데전서 2:5).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날 기독교의 목사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일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다. 인간이 교회를 조직적이고 합리적으로 잘 운영한다는 미명아래 인간의 생각대로 만들어낸 제도일 뿐 우리의 왕 되시는 주님은 이 일을 인정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정코 외칠 수 있는 불변의 진리이다. 교회는 유기체요 생명체이다. 교회는 가족이다.

   첫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은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이 일에 사울왕은 합당한 본이다. 그는 전쟁에 승리한 후에 여호와 하나님께만 영광과 존귀를 돌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사무엘상 15:12). 이 일로 말미암아 주님은 슬퍼하시고 사울의 왕조를 철회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자신의 명예와 기쁨을 위하여 당연히 죽이라고 하였던 적국의 왕 아각을 죽이지 않았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슬퍼하시고 사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역사에서 기념비를 세울만한 인물들이 많았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기억하여 그들 중심으로 교파를 만들어 오늘날 수많은 교단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결단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다. 사단은 이일을 주도하여 성공했고 그러므로 사울을 떠난 하나님이 오늘의 기독교를 떠난 것이다. 슬픈 일이다. 생각하여 보자. 루터, 칼빈,웨슬러, 무디 등 얼마나 많은 존경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는가. 그러나 그들을 오늘날 교파의 우두머리로 추앙하는 일은 결단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다.

   둘째로, 사람을 높이는 사단의 전략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시니 복음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이다. 구원받는 역사가 점점 사라지다가 결국 오늘날은 구원을 말하는 것조차 이단시하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어떤 교파에서 만든 이단 분별에 관한 책을 본적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는 "당신은 구원받았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이단이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다. 사도들이 구원을 외쳤고 구원을 받으라 하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이 성경말씀이 아닌가(사도행전 2:40, 4:12, 16:31, 에베소서 2:8, 유다서 3절 등).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구원을 강조하면 이단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라는 뜻인데 도대체 구원을 강조하지 말라는 오늘의 가르침이 사단의 가르침이 아닌가? 구원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 예수 이름을 우리 언어에서 지우라는 뜻이 아닌가?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기독교인들이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과 다른 기독교, 성경과 다른 당신의 교회는 잘못된 교회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이라도 바치고자 하는 순전한 신자, 성자 같은 신자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 잘못된 교회는 속히 떠나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이 떠나고 성령의 역사가 떠난 교회는 사람이 만든 조직으로 운영되고 거듭난 적 없는 교인들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나님도 말씀도 성령도 없다. 기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가 아니요 생명 그 자체인데 결국 사단의 전략에 의해서 종교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사람의 말이 교회 안에서 힘을 얻으며 교회를 운영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있지 않은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 그러나 분명히 알것은 성경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나 그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약에 오늘의 기독교가 바른길로 가려한다면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제도를 성경 안에서 찾고, 헌법은 성경으로, 지도자는 예수님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교회를 향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이 교회의 주인이 될 것이며 성령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 살아날 것이다. 또한 십자가의 복음은 죄인을 구원할 것이며 거듭난 성도들로 교회당이 채워져서 교회는 사도행전의 기쁨을 회복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큰 예배당을 짓는데 교회의 모든 목적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큰 건물보다 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해야 할 것이며 많은 숫자보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끝으로 결론을 내리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모든 기독교인을 다 지옥 자식으로 정죄하려 함이 아니다. 다만 필자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가 성경을 기준하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이 지옥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여 섭섭해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적인가 살피며 자신의 영혼의 문제도 겸손하게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옥에 가는 사람 모두 불쌍하지만 그 중에 더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종교생활하다 지옥에 가는 사람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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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신자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가? 이 말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외치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나가서 전도하고, 예배당에서 찬송하고, 직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희생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기가 막힐 이 일이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대통령을 아는 것과 대통령이 국민 개인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만난적이 없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삶이다. 기막히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데 있다. 왜 그런 문제가 왔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면서도 그가 아버지의 말씀은 전혀 순종하지 않고 순종할 의사도 없다면 그가 아버지를 믿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그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좇아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도하면서 기독교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범적인 신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곱게 순종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은 자기주장이나 교파의 주장이나 목사님들의 가르침만 외치면서 분명한 성경말씀을 보여주어도 말씀을 거부했다. 성경말씀을 순종해야지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된다는 필자의 말에, 성경이 그럴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서두의 말씀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않는다"고 탄식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에 없는 교파의 전통을 지적하며 말하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도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대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의사가 있는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를 따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축복받기 위하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나의 건강, 나의 행복, 나의 출세, 나, 나, 나!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그대를 꾸미는 액세서리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신앙의 동기나 과정을 물어보면 하나 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이 기복신앙은 무속신앙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속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속신앙의 본질은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어떤 신을 숭상하는 것이다. 돌이나 나무나 바다나 산에 많은 신을 만들어 숭상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른다. 무속신앙을 만들어낸 사단이 기독교도 샤머니즘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복을 주셔서가 아니고, 기도를 들어 주셔서가 아니고, 병을 고쳐주셔서가 아니다. 이것은 마귀도 흉내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서부터 믿음생활의 출발이 있다.

   신앙이 근본주의에 잡혀 있지 않고 현실주의에 잡혀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말씀에 두어야 한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크게 책망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이 있고, 절기가 있었다. 절기마다 절차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율법을 따라서 생활하며 그렇게 훈련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제사장들도 지도자들도 따르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사람들을 보기가 역겨워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말라기 1장).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놓은 옷을 입혀 목사님들을 제사장처럼 꾸미고, 성가대를 만들고, 예배당을 성전처럼 특별히 만들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의식이 진행되지만 진정 주님이 거기에 함께 계신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 주의를 부르짖고 종교개혁을 하여 기독교가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제사장이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목사님을 새로운 제사장으로 성직자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인가? 실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말라기서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흠 없는 깨끗한 양으로 제사 드릴 것을 레위기에서 명하셨거늘 그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렸다고 말하고 있다(말라기 2:13) 그들은 성전에서 통곡하고 울므로 회개하는 척, 경건한 척, 진실한 척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어찌 그리 똑같이 닮았는가. 왜 예배당만 가면 울고 기도만 시작하면 통곡하는가? 그들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은 나타내지 아니하면서 통곡과 탄식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경우에 따라서 울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또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과 탄식으로 우는 것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 "항상 기 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였지 "항상 울어라. 범사에 통곡하라" 하였는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고 기계적인 눈물은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드릴뿐이다.

   눈물에 관해서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데 성경의 본질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어야 하며, 또 살아가는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하며, 또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사라지지 아니함을 인하여 죄를 자백함과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함이 옳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한복음 5:38).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는 믿음의 두 기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반석이요 하나는 모래다. 잘 아시는 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매 무너졌지만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큰 홍수가 나도 든든히 서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말씀의 기초 위에 믿음을 건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어떤 집사님에게 필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 가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니 "우리 집이 점쟁이 집이었는데 계속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니 잠잠해졌다"고 하였다. 또 질문하기를 "성경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 보라" 하니 버럭 화를 내면서 "왜 그렇게 꼬치꼬치 파느냐? 믿으면 믿는 것이고 천국가면 가는 것이지 그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은 머리 아프다"고 반박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생각하여 보라. 자기 영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가?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얼마나 망설이고 사는가. 하물며 한번 잘못되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잘못인가? 대강 믿는 사람이 잘못인가? 구원은 말씀에 기초하여 완성되어지지 아니하면 잘못된 구원이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말씀이요 증거도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며 말씀은 예수님이며 말씀은 성령님이다.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모습은 또 있다.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라면, 그것을 깨닫고 경험했다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며 기뻐하고 함께 걸어갈 것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하지 아니한가? 또 교회 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교회에 가면 경건한 신자인데 집이나 직장에 가면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가 하나님을 닮지 아니한 자식들이 친자식일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말고 의붓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예배당에서 종교적으로 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들이 우는 이유를 필자는 잘 안다. 필자도 수없이 울어보았고 또 상담을 통해서도 들었다. 큰 문제는 죄다. 죄를 용서받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죄악들이 가득 차 있고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면 온통 죄, 죄, 죄 뿐이다.

   죄를 지은 자신도 밉고, 죄를 짓게 하는 친구도 밉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현실도 밉고, 그렇다고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마음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나오는 것이 눈물이요 짓는 것이 한숨이라. 탄식은 기도의 주체요 슬픔은 기도의 동력이라. 하염없이 울고 나면 마음은 시원한데 시원함도 잠깐이고 또 다른 걱정이 살아나니 내일부터 지을 죄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위선자 같아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그렇지도 못함이라. 이런 현실 속에 잡혀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 19장 30절에 " 다 이루었다" 즉, "모든 죄를 다 갚았다",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다 용서한 사실을 믿지 않고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갔다" 하였는데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세상 안에 속하지 아니하였는가?

   죄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왜 울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이 아니다. 거짓 신자다. 그들의 인격이 거짓 신자가 아니고 신분이 거짓 신자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영원한 속죄"라고 하였는데 영원한 속죄라 함은 과거와 미래로 영원한 속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진정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모든 죄를 용서받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짓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면서,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고통하거나 지옥에 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보길 바란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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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자유주의로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 즉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참 자유는 진리를 통하여 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나는 것이다. 진리를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본질과 방종의 모습을 고찰하여 우리의 신앙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쉽게 말하여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자유를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고 따먹은 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0).

   그들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유를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가 있다.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법을 벗어나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주신 말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선악과 자체에 무슨 독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심지어 어리석은 종파의 지도자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바보스럽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내야할 납부금을 1,000원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 돈을 학교에 내지않고 마음대로 과자를 사먹었다 하자. 그 아이가 부모에게 혼나고 매를 맞을 때 돈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의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복음 8장에서 몇 가지 언급하신 진리와 그에 따르는 자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나오는 진리는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증거한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율법적으로 볼 때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는 재판 절차 없이 당장에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죄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앞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혹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3장의 이 약속을 8장에서 이루셨다. 예수님이 인생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음이 분명한 진리이거늘 필자가 만나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에 사로잡혀 고통하고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인가?

   필자도 17년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교파에 속하여 날마다 "정죄감" 에 사로잡혀 예배당에만 가면 울고 통곡하는 것이 일이었고, 새벽기도에 가서 탄식 기도로 울면서 소리지르므로 이웃집 이방인들을 괴롭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금일의 수많은 눈뜬 소경 목자들은 예배당에서 많이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인정하며 가르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과 탄식하는 심령으로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개개인의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다.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은 "정죄하러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쌍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소경이요 거짓 목자임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하고 찬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이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아직도 정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오! 불쌍한 소경 목자들이여, 소경 양들이여, 정신을 차리라! 정신을 차리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영원한 속죄" "완전한속죄"가 분명하게 있거늘 왜 가르치지 못하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그대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대들의 생각대로 가르치므로 양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둘째 8장 21절에 나오는 진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죄인이 주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고 그 후에는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8:21).

   금일의 수많은 소경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주님 때문에 죽을 준비는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죄 문제는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조 가운데서 고민하고 정죄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달콤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지도, 받아줄 수도 없는데 꿈 많은 소녀처럼 천국의 소망에 부풀어 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있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린도후서 13:5).

   이들의 문제는 23절에 있는 대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있다. 또한 34절에 있는 대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죄인이며 죄 속에서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고 있는데(마태복음 11:28) 왜 죄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있는가? 죄 있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왜 그대는 세상 죄(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를 다 지고 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 용서함 받지 아니하는가?

   당신의 죄가 "호리라도 남김없이"(마태복음 5:26) 다 갚아지기 전에는 결단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죄 가운데서 죽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모일 것이다.

   오! 그대여, 속히 이 지옥에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건지라.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주님의 십자가 속죄를 속히 받아들이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라.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천국 갈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볼 때 필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 이며 36절에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으라!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불멸의 진리다. 이 불멸의 진리가 인생들을 멸망의 지옥에서 건지는 열쇠요 그대 자신이 이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것은 44절의 "마귀의 자식" 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대가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였다면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를 따라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셋째, 8장 58절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자. 우리를 죄와 멸망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이 말씀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만유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구원은 종종 소멸되었다가 다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받으면 영원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보장하신 주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것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금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속죄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영원부터 계신 주님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으로 그대를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영원히 그대의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대는 이제 모든 정죄와 지옥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오! 그대여,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그대가 자유를 얻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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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밧줄

믿음,신앙 2015. 11. 22. 17:11

       생명의 밧줄


   많은 사람들로부터 매우 덕망있고 침착하고 박식하다는 칭송을 받는 한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언뜻 보기에도 매우 맵씨있는 옷차림으로, 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걷다가 아차! 그만 실수하여 강물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는 수영을 할줄 알았기 때문에 헤엄을 쳐서 강을 마저 건너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힘으로 어느 정도 나아갈 수 있었으나 신사복이 물을 먹어 몸이 무거워지고 게다가 물살마저 세어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이제 그는 물속에 잠기지 않기 위하여 허우적거리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으나 구원자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그의 앞에 붉은 밧줄이 하나 던져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것을 잡고 살아났으며 그 후로 그를 구해준자를 생명의 은인으로서 죽는 날까지 잊지못했습니다.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1:21).


   당신은 죄악으로 가득찬 강물 속에 빠져 있습니까? 혹시 당신의 힘으로 빠져 나오려고 힘쓰고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당신의 도덕적인 행위로 단장한 신사복이 물을 먹어 몸이 더 무거워지고 물살까지 세어져서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물속에 잠기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며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까? 당신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곤 죽음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습니까?


   여기 사랑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당신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죽음 직전에 있는 당신에게 생명의 밧줄을 던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앞에 놓여 있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생명의 밧줄입니다.


   "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예수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당신의 죄를 담당하시고 당신을 죄의 수렁에서 건져주셨습니다.


   "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로새서 1:13).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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