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20장

                                      데이트는?


   오늘날은 결혼이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에 들어가는 것이 점점 만연되고 있습니다. 대중매체의 언어에는 "동거인" (partner)이 "남편" 이나 '아내" 대신 사용되고 있으며 관청에서 발부하는 문서나 서류에도 그런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린 신자들은, 우연히 만나 짧은 기간 동거생활을 즐기다 헤어지거나, 또 기혼자들 중에도 이혼이 급속도로 확산하는 그런 세태에 직면해 있습니다.

   청혼과 결혼에 있어서 세상의 태도가 당신의 생각 속에 침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당신이 내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이며, 당신 주변의 세상의 풍습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이성간의 사귑은 항상 결혼이 목적이란 점을 기억 하십시오. 미혼 남성들은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한 다음 적당한 사람이 발견될 때까지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거듭해서 청혼을 하는 과정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미혼 여성들은 선택과정이 마칠 때까지 이 남자의 친구가 되었다가 저 남자의 친구가 되었다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행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치 않으며, 종종 어느 한 편이 신실치 못할 때는 불필요한 마음의 상처를 남깁니다. 쉽게 이성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고 있고,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을 갈수록 만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조급하게 일을 서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기도로 일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예비해두신 배우자를 발견하도록 기도하고, 그 일에 실수가 없도록 성경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몇가지 도움이 될만한 지침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와 사귀는 것은 생각도 마십시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혼으로 이끕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고후 6:14). 또한 그것은 고의적인 불순종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귐이 언제든 중단할 수 있는 건전한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러나 그것은 강렬한 이성간의 접촉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인 친구들과의 사귐을 벗어난 적이 없다가 직장이나 대학에서 누군가를 만나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20대 초반의 청년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이성관계에 실망을 느낀 나머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는데 누군가를 알게 되어 옛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는 좀 나이든 청년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당신의 생활에 생기가 돕니다. 그리고 마음이 점점 끌리더니 무엇이 잘못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감정이 온통 당신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항상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직 성경이 유일한 건전한 지침입니다. 당신은 머지않아 그 사귐이 깊어지더니 그것이 영적인 일들보다 더 당신에게 중요한 지점까지 이르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상황에 있다면 지금 즉시 중단하고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관계를 끊으십시오. 당신이 사귀는 대상이 아주 친절하고 사려 깊고, 그밖에 칭찬할 만한 점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당신과 달리 아주 유복한 생활을 즐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가 불신자라는 사실보다 중요할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은 무엇으로도 상쇄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이면 아무하고나 사귀어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는 자와 사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역교회(assembly)의 형제 자매와 사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가운데 신중하게 생각해볼 다른 문제들이 있습니다.

   결혼을 위한 성경적인 조건은 "주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7:39). 이것은, 사귐과 결혼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분명한 확신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고 서로 감정이 끌리고 있다는 것이 확인될 때는, 두 사람 모두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지, 성경의 근본진리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는지 고려해보십시오. 당신은 서로 일치된 가운데 앞날을 함께 꾸려나갈 소망과 계획이 있는지요?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려는 마음에 기초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는지요? 두 사람 모두 지역교회의 집회에 관심이 많은지요? 아니면 어느 한 편은 소극적인 태도인지요?

   점차 기도 가운데 서로에 대해 알게 될 때, 두 사람은 서로의 관계가 결혼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과 사귐의 문제를 몇 가지 질문에 '예' '아니요' 로 답해 결정하는 문제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사귐을 결혼으로 발전시키는 문제에 직면한 모든 신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상기시키고자 함입니다. 아무 정해진 규정은 없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청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설레는 일입니다. 서로를 알게 되고 점점 사랑이 깊어지고 마침내 결혼을 약속하게 됩니다. 그 약속이 여자에게는 단순히 멋진 반지를 선물로 받는 기회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결혼을 약속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장래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 확고한 결심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약속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두 사람은 매우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합니다. 세상은 혼전순결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인데, 결혼하기 몇 주 전이나 몇 달 전에 관계를 갖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죠? 결혼식 전에 육체관계를 미리 치르면 안 되나요? " 라고 사람들은 다그칩니다.

   당연히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관계는 결혼관계 안에서 허용된다고 분명히 못 박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는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는 순결을 지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 전에 육체관계를 맺는 것은 성경에서 "간음" 으로 일컫기 때문입니다. 좀 엄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내리신 평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혹 결혼할 계획이 있는 상대라 할지라도 혼전관계를 맺는 것은 당신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합니다. 당신은 그 실수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 일로 인해 당신에게 징계를 내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그 일을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당연히 자신을 절제하고, 결혼생활이 가져다줄 기쁨과 특권과 책임을 온전히 누릴 소망을 품고 혼인날을 고대해야 합니다.

   당신이 계획하고 있는 결혼은 육체관계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결혼서약이란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고, 그 사랑 안에서 주 예수님이 높임을 받는 가정을 이루고, 즐겁고 경건한 가정생활에 필요한 영적, 정서적, 육체적인 도움과 위로를 서로에게 제공하겠다는 뜻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전제한 사귐을 즐기되, 서로 순결을 지키고,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장래를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삶을 위해 좋은 터를 쌓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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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9장

                              자매들의 태도는?


   오늘날 세상에는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키려는 여권운동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이 장의 목적은 그러한 운동을 자세히 살피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에서 그런 경향이 두 가지 점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자매들의 너울 쓰는 문제는 이제까지 논란거리가 되어왔습니다. 어떤 자매들은 성도들의 모임에서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없으며 또 오늘날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편견에 근거한 낡은 관습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전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 전통을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자매들이 머리에 쓰지 않고, 형제들이 머리에 쓰는 규례는 하나님 말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르침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발견됩니다. 여자들의 너울은 그 장에서 언급된 세 가지 상징물 중 하나입니다. 다른 두 가지는 떡과 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문제이며, 또한 우리의 편의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시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격하시켜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린도전서 11장의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권리를 부여해주었을까요?

   바울은 이 고린도전서 11장 서두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됨의 질서를 제시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리됨(headship)이 뭐지요? "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인치신 질서입니다. 그분의 모든 행사에는 질서와 권위가 나타나 있습니다. 창조에 있어서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며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입니다. 세상은 이러한 질서를 부인합니다. 세상은 주님이 만물의 머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세상은 성경에 계시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최고라고 믿습니다.

   믿는 자들이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됨의 질서와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남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의 머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고, 오직 그분의 권위만이 인정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자는 그녀의 머리인 남자는 감취어진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머리를 가립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남자가 머리를 가리면 그 머리를 욕되게 하고 그로써 주님을 욕되게 한다는 사실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머리를 가리기를 거절하는 여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됨의 질서를 무시함으로써 남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매들이 머리를 가린다고 해서 곧 여자가 남자보다 덜 영적이라거나 여자가 성경을 잘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그 상징에서 여자의 열등함이 선포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 상징은 단순히 창조의 질서와, 남자와 여자의 역할상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두 역할 모두 중요하며, 그것이 인정되는 것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제기되는 반론은, 고린도전서에서 말하는 너울은 여자의 긴 머리라는 주장입니다. NIV성경은 그런 뜻을 내포한 각주를 싣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4절의 각주는 "쓰는 것(covering) 대신에 "긴 머리" (with long hair)라는 표현을 삽입하여 "무릇 긴 머리를 한 채 예언하는 남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Every man who prophesies with long hair dishonors his head)라고 옮겨놓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후의 본문에서 쓰는 것을 모두 긴 머리로 대치시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자세한 검증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15절에서 여자의 머리카락(덮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머리 위에 덮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와 아주 다릅니다. 여자의 머리카락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가리는 것'(cloak), '싸는 것' (wrap), '덮개'(mantle)를 뜻하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머리 위에 덮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머리 위에 얹어놓는 것(top-covering)을 뜻하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사실을 접어두고라도, 쓰는 것이 여자의 긴 머리라고 믿는 것은 6절을 이상하게 만드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6절은 "만일 여자가 머리카락을 깎거나 밀었다면, 그 머리카락을 깎을 것이요" 라고 읽혀지게 됩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대하는 신령한 자매들은 자매들과 형제들에게 부과된 의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모든 집회가 아닌 일부 집회에서만 너울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복음집회나 소규모 성경공부모임이나 청년집회 등에는 너울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신자들이 영적인 활동을 위해 모인 곳이 어디든 장소를 막론하고 반드시 자매들은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모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에게 어린 딸이 있다면 그 애도 집회에 나올 때 너울을 써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애가 아직 구주를 영접하지 않았거나, 혹 영접했다 해도 교회의 지체로는 공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녀들에게 신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가르칠 필요가 있으며, 너울 쓰는 것도 그러한 기르침의 일부입니다.

   때때로 너울이 얼마나 커야 하느냐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너울의 크기는 머리를 덮을 정도면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자매는 그런 너울을 즐겨 쓸 것입니다. 조그만 천을 머리에 살짝 올려놓고 일부만 덮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드러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사들로 인해 이러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고린도전서 11장 10절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사들은 사단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려다 타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와 같아지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천사들은 지역교회의 모임에서 성도들이 사단이 멸시한 진리를 기쁨으로, 자원해서 순종하고 인정하는 것을 하늘 전망대에서 내려다봅니다. 성도들이 모일 때, 천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 남녀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봄으로써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한 놀라운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

   또 한가지 문제는 지역교회의 모임에서 자매들이 침묵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자 빌립에게 예언하는 딸들이 있었다는 것과(행 21:8,9),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여자가 기도나 예언하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는 사도 바울의 말씀과(고전 14:34), 디모데전서 2장 11,12절의 동일하게 명백한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자 빌립의 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지역교회에서 예언을 했다는 기록이 일절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4절에서 여자들이 교회 집회에서 공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다. 11장에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것은 너울 문제입니다. 영적인 은사를 활용하는 문제는 14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매들이 잠잠하는 문제를 14장으로 넘긴 것입니다.

   자매들의 공적인 참여를 허락하기 위해서 어떤 지역교회들은 기도집회와 말씀집회를 폐하고 그 대신 가정집회롤 나눠서 모이도록 권장합니다. 장로들은 온 교회가 한 곳에 함께 모여 기도드리고 말씀을 배울 수 있는 집회를 소집할 책임이 있습니다.(고전 11:17~20). 그 일에 실패하는 것은 지역교회의 장래를 그르치는 것입니다. 지역교회가 여러 그룹으로 나눠지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가르치는바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이 자매들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달리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고 그 가르침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거역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어린 신자로서 우리는 다른 모든 문제처럼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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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8장

                                   정치문제는?


   우리 모두는 주변에서 인생의 불합리함과, 그리고 빈민과 실직자와 노약자들이 겪는 문제들을 보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민감해야 합니다. 어린 신자들은 주변의 슬픈 모습들을 보면서, 정치인들이 주변의 불행한 사람들의  형편을 개선하는데 기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때로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올려다보고, 또 권위를 행사하는 자들의 삶에서 부도덕한 면들을 보게 될 때 우리의 충격은 한층 더 커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입문해서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에 기독교의 원칙을 반영토록 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일로 보입니다. 세상은 일단 그런 일에 호의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세상은 개인의 도덕성이나 정의로운 행동 따위는 성명서에서 생략하기를 원하지만 말입니다. 사회의 필요한 영역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한 "기독교" 운동들은 일반적으로 환영을 받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믿는 자가 정부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대할 때는, 그 말씀이 기록될 당시에 권력을 쥐고 있던 로마 황제는 네로라는 잔인한 살인마였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로마 제국 하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부당하기 짝이 없는 법에 복종하고, 또 그들의 복지에는 별 관심 없는 사람들의 손에 그들의 장래를 맡겨야 했습니다.  그것은 지지할 만한 명분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정부에 관한한, 우리는 믿는 자로서 복종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세 가지가 주어져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1~4절은 정부가 악행을 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운 대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정부는 선행자들을 포상하고 악행하는 자들은 징벌함으로써 법과 질서를 보존하는 역할을 합니다. 혹 정부가 하나님 말씀에 위배되는 쪽으로 권위를 행사할 때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를 전복시키는 행동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양심의 지시를 따라 우리의 행동을 결정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양심입니다. 1-4절은 정부에게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만, 그 다음 단락은 개인적으로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개인적으로 거역하는 예로 정부나 시당국이 부과하는 세금을 내기를 거절하는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양심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는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부가 어떤 지출계획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세금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는 고용주가 월급에서 우리대신 세금을 내줍니다. 그러나 자영업자일 때는 우리 스스로 납세의 의무를 지켜야 합니다. 이 경우에 세금을 적게 내고자 하는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이 문제를 얘기하면서 바울은 우리가 갚아야 할 또 하나의 빚을 거론합니다. 사랑은 우리 모두가 베풀어야 할 의무입니다. 그리고 사실 시민의 의무는 법(율법) 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9절). 그 표준으로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 우리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실제적인 역할입니다.

   우리에게 제시된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특성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날이 처음 믿은 때보다 가까웠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짧다는 것과 주어진 모든 시간을 영원히 가치 있는 삶에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든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반역이 끝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의로운 통치를 세우기 위해 오실 때에 우리 주변 세상에 그토록 많은 고통과 절망을 가져오는 문제들이 제거될 것입니다.

   이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우리가 정치 문제에 관여해야 할까요? 우리와 정부와의 관계를 다루는 이 대목에 그렇게 정치 문제에 관여하라는 권면이 일절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슬픈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디모데전서 2장 2절에서 우리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들 가운데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주님께 우리의 관심사를 가져갈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기도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정부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권세보다 더 낫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바램에 기초합니다. 우리의 기도제목대로 위정자들이 구원을 받는 다면 사회가 우리의 기도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소원대로 경건하고 단정한 가운데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우리가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매우 실제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그 외에 많은 실제적인 방법들이 있습니다. 믿는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자들로 알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자원해서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 복음이 효과적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갈 6:10).

   일단 구원을 받은 이상, 우리는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해 가는 나그네요, 우리의 본향이 아닌 땅에 잠시 머물러 있는 외인입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는 복음을 전파하고, 또 죄에 빠진 세상에 주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치 문제 등 중요한 문제가 많이 있지만 복음전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목적을 흐리게 만드는 상황은 당연히 피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수행해야 할 지상명령이 있으며, 정치적인 행동은 그러한 임무수행에 지장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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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7장

                                      사회생활은?


   오늘날의 우리의 삶과 이전 세대 사람들의 삶의 주된 차이점 중 하나는 오늘날은 시간과 돈이 좀 넉넉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주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돈벌이가 크게 나아졌습니다. 지금은 견습생이 고용주에게 견습비를 내는 그런시대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당신의 부모가 겪지 않은 문제들을 당신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시간과 돈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세속적인 곳" 이라 할 만한 곳에 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때는 극소수 사람들만 차를 소유했고, 따라서 오늘날처럼 몇 시간 만에 먼 거리를 여행하는 즐거움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시대가 달라졌는지요! 과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장이나 오락장을 멀리했으나, 지금은 젊은이들의 건전한 사귐의 장소로 용인되는 추세입니다. 각종 대중매체들이 온갖 즐길 거리들을 제공하여 집안에서도 얼마든지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 세대에는 상상도 못한 일들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풍부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대부분 지역교회들을 둘러봐도 젊은이들은 대체로 모든 것이 풍족해 보입니다. 많은 즐길 거리들이 손짓합니다. 노 성도들이 젊은이들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다면, 그것이 그저 그들이 구시대 사람들로서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젊을 때 마음껏 즐기는 데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을까요? 당신은 이전 세대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 사회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발산해야 할 정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당신에게 유익하고 무엇이 유익하지 못한지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당신은 스포츠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스포츠가 당신을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게 할까요? 당신은 특별한 취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취미가 당신의 영적인 생활에 도움이 될까요? 젊은이는 자유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우리는 영적인 생활을 방해하는 활동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간은 소중하며, 세상 오락에 사로잡혀 시간을 낭비한다면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TV가 당신의 마음을 계속 끄나요? 주말의 스포츠 유혹을 도저히 물리칠 수 없나요? 자유시간을 믿지 않는 자들과 보내고 있나요?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마음을 합당치 않은 언행으로 채울 위험이 있습니다. 토요일 밤을 주일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나요? 하루의 시간을 다 보낸 뒤에 낭비했다거나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빠지지는 않나요?

   당신의 관심사에 대해, "뭐가 잘못이지? "라고 묻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요소가 있는가? "라고 물으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까요? 먼저 하나님을 첫번째 자리에 놓으십시오.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는 말씀이 우리가 마땅히 귀를 기울일 조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바인(Vine)은 그것을 "하나님의 성품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엡 5:1). 그러므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을까? "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또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당신의 선한 간증을 나타낼 수 있는 특권을 빼앗을 만한 것은 일절 하지 마십시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접근하다 보면 그들이 당신의 과거 행적을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에게는 해가 될지 모르나 나는 왜 그게 하나님께 불명예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자로서 내 양심에 따라 행동할 자유가 있지 않을까요? "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고전 8:9).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는 일을 계속 고집한다면, 믿음 안의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점심시간에  당신이 동료들과 함께 술집에 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술에는 손대지 않고 식사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가 당신을 보고 마음에 걸림이 됩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 기회를 틈타 그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을 불어넣습니다. 그는 그 생각에 굴복하여 술을 입에 조금 댑니다. 그리고 그의 간증이 그것으로 무너져버립니다. 그런 불행을 가져오는 원인을 제공하지 말라고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서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서 우리는, 그런 행동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주의해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청지기직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있나요? 주의 날에 주님께 드리는 액수에 비할 때 당신은 사람들과 사귀는데 얼마나 사용하는지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보람 있고 즐겁고 만족스런 삶의 방식을 당신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 청년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자유시간이 성경공부로 채워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물론 그것이 하루 일과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어울릴 때 우리는 세상 친구들과 어울릴 때 겪게 되는 많은 유혹으로부타 보존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과의 사귐은 우리에게 만족과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과 만나서 "약간 만족"을 얻기를 기대했습니다(롬 15:24). 당신은 믿는자들과의 사귐이 격려와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공동관심사를 주고받는 것도 생각지 않은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수양회나 말씀집회에는 가급적 다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으십시오. 잘 가르치는 교사들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잘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런 집회에 가는 성도들과 그런 일을 계획하는 앞선 성도들을 비방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주말이면 다양한 집회를 갖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회들을 저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그 복된 자리를 다 채울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은 어떤가요? 당신은 혹 전도지를 뿌리거나 노방전도를 해볼 생각은 없는지요? 그런 일을 찾고 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회생활은 다른 생활영역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영역도 주님을 섬기는데 지혜롭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젊을 때에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우리 마음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느지를 알 수 있는 지표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는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일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또 교회에서는 정해진 시간을 가져야만 합니다. 하지만 여가시간에는 스스로 할 일을 자유롭게 택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회생활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지요?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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