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2장

                                    거룩한 삶은?


   거룩! 이 말은 당신을 움츠리게 만들지 않나요? 거룩이란 말을 생각할 때 당신은 어떤 연상을 하게 되는지요? 아마 그 말은 기도와 묵상 가운데 외로이 지내는 어떤 연로한 은둔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또 어떤 젊은이들에게는 현대의 편리한 생활을 멀리한 채 모든 즐거움과 웃음을 자아내는 것들을 끊임없이 거부하는 연로한 성도들을 떠올리게 할 것입니다. 혹 당신은 거룩을 생각하면, 끈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스스로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로 가득한 종교인이 연상되지 않는지요? 아니면, 온갖 부정적인 규정들로 가득한 "아니요" 라는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을 연상하게 되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당신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행동의 표준이 생각나지 않는지요?

   만일 이 중 하나가 당신의 거룩에 대한 개념이라면, 당신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룩을 정의 내려야 할까요? 그것은 악으로부터, 즉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되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5,16절에서 우리의 행실이라는 건물이 세워져야 할 기초로 거룩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거룩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아무 신비스런 것이 없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램은 단순히 악한 것에서 분리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바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백성에게 바라는 첫 번째 바램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설교자나 사역자나 성경교사가 되는 것보다는 먼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열망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의 주된 요소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우리는 성도가 되도록, 거룩한 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고전 1:2).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자가 되도록 부르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훌륭한 조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그 권면에 포함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구절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주제를 다루는 단락의 결론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외적으로(육), 내적으로(영) 모든 더러운 것에서, 즉 모든 오염시키는 것에서 깨끗케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자 하는 신자는 오염시키는 영향들을 즉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합당치 않은 대화, 주님의 일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 등, 우리는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를 오염시키고 그 흔적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성경은 우리가 학교와 직장에서 세상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자연스럽게 증거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과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은 유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할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등등 많은 부분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결혼과 사업과 정치와 사회활동에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러한 멍에관계는 당신에게 근심을 끼치고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감소시키는 길로 당신을 이끌 것입니다. 그런 멍에를 실제로 지지 않은 중에도 그런 영향 아래 들어가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하루를 시작하면서 당신의 삶이 거룩해지도록, 당신 앞에 다가올 유혹들을 능히 물리치도록 기도하십시오. 당신은 대적하는 자가 아주 교묘히 활동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전혀 고려해 넣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이 편의상 거짓말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 아는 사람도 없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거룩의 길이 아님을 압니다. 또 당신의 것이 아닌 것을 슬쩍 가져갈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잃어버린 것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그런 행동과 함께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행동에 굴복한다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열망이 안락하고 이득이 되는 길을 취하고자 하는 열망보다 커야 합니다.

   이상이 부정적인 측면이라면 우리는 이어서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왜 우리가 더러운 것에서 깨끗케 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거룩함이 날로 증가되어 범사에 거룩함이 우리의 행동기준이 되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만한 일들과 행동들을 힘쓰십시오, 우리는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자유롭게 우리 자신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딤후 2:4). 또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골 3:20).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그분 보시기에 기뻐할 만한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요일 3:22).

   당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이 그렇게 드려져야 할까요? 모든 부분이 다 드려져야 합니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는 말씀은 삶의 모든 부분이 포함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만일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면 그 몸이 거룩해야 합니다(롬 12:1). 우리의 기도는 거룩한 손으로 특징지어져야 합니다(딤전 2:8).

   이러한 거룩에 대한 열망 뒤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공포심이 아니라 경외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식하는 것이요, 그분의 뜻대로 행동할 때는 모든 좋은 것을 누리게 되지만, 그분의 뜻을 거스려 행동할 때는 그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범사에 마음에 두고, 모든 일을 통해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로 결심하십시오. 그 축복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이 소수의 사람들만 누리는 어떤 신비로운 높은 수준의 경험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이며 또 모든 신자를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거룩을 매일의 삶에서 이뤄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집과 거리와 성전에서 거룩이 모든 것을 특정짓게 됩니다(슥 14:20,21). 거룩을 지금 당신에게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하십시오.

                   

                                                              - 전도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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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

                                      11장

                                  연보는? -2


   고린도후서 8,9장은 헌금에 대해 몇 가지 합당한 조언을 줍니다.


   1. 결심과 행동은 같이 가야 한다(8:11).

   종종 우리는 드리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목적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과연 드릴 수 있는지, 혹은 드리려는 결단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몰라 주저하곤 합니다. 오래 기다릴수록 결심한 것을 드릴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드리고픈 소원을 주셨으면 지체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십시오.


   2. 당신에게 있는 것에서 드리라(8:12).

   드리고픈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능력 이상을 드리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를 보고 우리의 기여가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충당해야 할 필요에 따라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유에 따라 측정됩니다. 중요한 요소는 먼저 드릴 마음이 있느냐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우리에게 주지 않은 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에서 드리십시오. 과부의 두 렙돈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히 하찮게 보였지만 그 참 가치가 하늘에 기록되었습니다.


   3. 평균케 하기 위해 드리라(8:14,15).

   바울의 권면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족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필요를 공급한 사람들이 나중에 궁핍하게 될 때 이제는 전에 그들로부터 필요를 공급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경험케 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예루살렘이 궁핍했으나, 후에는 고린도가 궁핍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는 증거가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다른사람의 필요를 채우면 우리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드리기를 주저해야 할까요?


   4. 합당한 태도로 드리라(9:6,7).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너그러이 해야 합니다. 만일 농부가 인색하게 심는다면 풍성한 소출을 거두지 못할 것이나, 넉넉하게 심는다면 넘치는소출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드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최소한을 드리는 것이 아닌 풍성히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농부는 파종을 넘어 추수를 바라보고 또 그 파종과 추수의 관계를 잘 아는 까닭에 파종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처음드리는 행동 너머로 추수 날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상황을 바라보고, 당신이 얼마나 드릴 것이 적은지, 혹은 그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소량이 얼마인지 결정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열린 마음으로, 너그러운 심령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허락하신, 베풀고자 하는 소원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인색한 마음과 협소한 전망은 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드리지 말고 마음을 정하고 드려야 합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를 주신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며. 이제는 마음에 정한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드리기를 원하시는지 그분 앞에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헌금은 별 생각 없이, 별 기도하는 마음 없이 무심코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드리기를 기대하십니다. 인색하게 드리는 자는 자기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돈으로 다른 것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헌금으로 가난하게 되었다고 아쉬워합니다. 그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의무감에서 드립니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슬픈 길인지요. 그러나 즐거이 드리는 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줄 알고, 정한 것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드리는 자인지요!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가 보여준 본을 보십시오. 그는 땅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는 두 구절로 족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했고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얼마나 다른지요. 그들은 희생 없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원했으며, 그들의 결국은 얼마나 슬픈지요.


   5. 누가 유익을 얻는지 이해하고 드리라(9:8~15).

   우리는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그 헌신의 행위의 우선적인 수혜자로 언급될 줄로 기대할 만하지만,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는 6절에서 심는 자가 거둔다는 것을, 그리고 8절에서 주는 자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모든 일에 모든 것을 넉넉하게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선적인 수혜자는 당연히 혜택을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기이한지요.

   동일한 원리를 빌립보서 4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19절 약속을 의지하지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약속의 배경은 종종 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두 번 이상 바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로마에 도착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의 풍성한 선물을 받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너그러운 연보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놀라운 약속을 의지할 수 있으려면 동일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그들처럼 너그러이 드려야 합니다.


   6.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알고 드리라(9:11~15).

   직접적인 결과는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가 어느 정도 채워졌다는 것이었으나,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최고의 선물, 말할 수 없는 선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는 감사가 흘러넘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의 드림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 고백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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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1장

                                       연보(giving)는? -1


   성경을 상고해 보면 헌금 문제가 하나님 말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의 수준 높은 가르침 바로 뒤에는 "성도를 위한 연보" 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한 부분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 두 장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많은 곳에서 우리는 이 헌금 문제가 언급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이 헌금문제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원들을 사용하는 법을 성경에서 잘 배워야 합니다.


   먼저 헌금은 제사장의 제사 행위임을 주목하십시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헌금을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유로 주장하고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금전이나 소유물을 포기하는 희생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일은 희생을 내포합니다. 만일 우리가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결코 축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헌금이 제사 행위라는 것은, 그것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에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드린 것은 사도의 필요를 채워주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열납되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의아해합니다. 여기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헌금의 방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6장 서두를 읽어보면 다음 세 가지 원칙이 제시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연보는 준비되어야 한다.

   주의 첫 날이, 우리가 얼마나 드려야 할지 결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따로 모아두어야 할 날입니다. "저축하여 두어서" 라는 표현은 결정된 금액을 따로 구분해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주의 상앞에 가져가 준비된 연보함에 넣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지만,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적당한 때까지 따로 보관해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월 단위로 급료를 받는 경우도 이 원칙이 적용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경우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급료를 받을 때 얼마나 드려야 할지 미리 결정하십시오. 하지만 주의 첫 날에 그 문제를 생각해보되, 떡을 떼는 일만큼 그날의 주요 의무 중 하나로 생각해보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왜 주의 첫 날이 강조되어 있을까요? 분명 그날은 우리가 주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여 드리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은 자기희생의 비할 데 없는 본이시며, 그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헌신에 대해 감동을 받게 됩니다.


   2. 연보는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

   "너희 각 사람이...저축하여 두어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 예외도 없습니다. 당신은 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무리 적든 간에 당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과, 그것이 주 예수님께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기억하십시오.


   3. 연보는 이를 얻은 대로 드려져야 한다.

   흔히 율법 아래서는 그것이 기준이었다는 근거로, 따로 모아두어야 할 금액으로 10%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최소한의 의무였고, 그 외에 번제나 레위기 27장의 서원제 등 드릴 기회가 언제든지 더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신실한 백성은 십분의 일 훨씬 이상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가 바울의 답변입니다. 특히 신혼 초와 같은 때는 재정이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좋은 원칙은 수입 안에서 생활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성향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심사숙고해서 따로 준비해야 할 금액을 결정해야 합니다. 헌금하는 습관을 당신의 삶을 건축하는 기초 중 하나로 삼으십시오.


   고린도후서 8장 1~9절을 읽어보고 다음 세 가지 지침을 살펴보십시오.


   1. 다른 이들의 본

   마게도냐 교회들이 연보의 본을 보이신 사람들로 인용되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연보를 기대할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환란과 궁핍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그들의 자원함은 바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능력의 비결이었을까요?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 이 고린도 성도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나 그것이 그들 사이에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본에서 능력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우리의 행동은 우리를 예의주시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들로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게 하십시오!


   2. 우리의 사랑을 증명함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중에 있는 성도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실질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과 주는 것은 성경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했습니다(갈 2:20).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의 사랑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3. 주 예수님의 본

   주 예수님의 본이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부유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지니셨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발적인 의지의 행동으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영원 세계 속에서의 모습에 비할 때 그분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그분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궁궐이나 부유한 환경이 아니라 나사렛의 비천한 환경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의 드림(giving)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되풀이 될 수 없는 최고의 드림의 행위였으며, 갈보리에서 우리는 최고의 희생을 봅니다. 만일 그분이 값없이 자신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 밑 바탕에는 드림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이러한 본을 좇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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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0장

                                  전도는?


   전도가 신자들 가운데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시대가 과연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책들이 쓰여지고, 말씀이 전해지고, 세미나가 열리고, 그리고 토론이 셀 수 없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노력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를 민족할 만큼 펼치고 있는 지역교회는 거의 만나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많은 어린 신자들은 주일 복음 집회 외에는 전도활동이 거의 없는 교회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 주일집회마저도, 구도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또 성도들도 이웃과 동료를 초대하기를 몹시 번거로워합니다. 이것은 전도에 관한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돌아보게 합니다.

   첫 번째 주목할 것은, 주 예수께서 처음에 제자들에게 와서 전도자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에 관한 모든 가르침과 책자에서 거의 다루지 않은 듯한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초청은 다만 그분을 따르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면 그분이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집중해야 했으며, 그분은 그들을 그분이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순종하여 따를 때 그분이 우리를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섬기는데 필요한 첫 번째 요건은 제자(follower)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 길을 좇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주를 좇으라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순진한 것이며, 나쁘게 말하면 부정직한 것입니다. 영혼들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에 복종하라고 말하면서 우리 자신은 주님을 좇지 않는다면 그것은 별 효과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불순종하면서 그 변명을 다른 구절들에서 찾으려 노력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성경을 다룰 때 이중적인 잣대를 사용할 권리를 우리에게 부여했을까요?

   또 한 가지 생각할 문제는, 오늘날 우리는 전도를 특별 집회와 그리고 직접적인 결과와만 연관시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특별집회'는 우리 각인의 전도 의무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집회는 이따금씩 한번 열릴 뿐입니다. 교회에서 갖는 정규적인 복음 집회도 훌륭한 전도의 기회지만 그 역시 개개인의 의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만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견고한 전도사역의 기초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선한 간증입니다. 당신의 삶에는 다른 이들의 삶에는 없는 뭔가 소중하고 만족할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삶이 그들의 삶과 다를 바 없다면,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주께로 나오라고 초청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구주를 전할 때 우리는 복음을 정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치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단"을 보고자 하는 조바심에서 때로 참된 구원이 삶에 일으키는 변화를 등한히 여깁니다. 예수께서 구주뿐만이 아니라 주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십시오. 또한 그분의 주되심을 인정할 때는 그분을 순종하는데 필요한 능력이 주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십시오.

   우리는 때로 실수로, 복음을 가볍게 다룰 수도 있는데, 이 또한 주의할 일입니다. 우리는 너무 거칠고, 강경하게 밀어붙이다가 구도자들의 마음 문을 닫게 할 수도 있으나, 그 반대로 너무 복음을 가볍게 취급해서 아무 회개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죄에 대한 진정한 각성이 필요하며, 하나님이 죄를 몹시 증오하신다는 점을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 메시지를 전할 때 어떤 밥법을 사용해야 할까요? 다른 모든 메시지가 그렇듯이 성경을 찾아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메시지는 세 가지 방향으로 증거되는데, 하나는 경건한 삶을 촉구하는 설교이며,  하나는 번민하는 영혼과의 개인적인 대화이며, 하나는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대중적으로 복음을 전한 다음 전도책자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 메시지는 마태복음 5장 16절의 주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고 두 번째 메시지는 사도행전 8장의 빌립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 빌립은 열매가 풍성한 복음의 현장에서 한적한 광야로 지시를 받아 가보니 한 사람이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뜻을 풀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습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번민하는 영혼과의 개인적인 교제입니다. 끝으로 세 번째 메시지는 담대히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 성경에 나타난 무수히 많은 예가 그 사례입니다.

   대중전도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닙니다. 대중전도를 맡은 이들은 어디서 전도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결정해야 합니다. 지역교회의 복음 집회는 구도자들을 초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들이 낯선 손님이며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훌륭한 사회자는 구도자들이 생소하고 어색한 느낌을 갖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심한 신경을 쓸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것도 신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전도자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전도는 요점이 분명하고, 알아듣기 쉽고, 위엄이 있고, 그리고 복음진리를 충분히 드러내야 합니다. 복음전도는 전도자의 지식이나 은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따라야 할 본을 찾는다면, 주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설교들을 살펴보십시오.


   교회의 집회 외에 또 어디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옥외 장소도 훌륭한 전도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쇼핑센터나 기타 번화한 장소를 택할 수 있습니다. 지방의 민속잔치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전도지를 뿌리고 또 가능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처음부터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한 사람이 구원받는 데는 대개 오랜 시간과 많은 과정이 소요되게 마련입니다. 그런 과정의 한 부분으로 쓰임 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우리는 종종 외판원이 물건을 팔 듯 복음을 전하면서 믿을 것을 너무 재촉하는 것을 봅니다. 다그치고 부추겨 보지만 열매는 좀처럼 맺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부추기지 말고 성령께서 마음을 부추기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단을 촉구 하지 말고 성령께서 결단을 촉구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다만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결과를 그분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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