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9장

                                         예배는?


   "예배" 라는 말은 무엇을 생각나게 하는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예배는 착색유리창과 웅장한 성가대가 찬양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당신에게 예배는, 예배를 위해 따로 정해진 특별한 때와, 예배를 위해 모인 신자들의 집회를 연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떡을 떼는 시간을 "예배 집회"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른 집회들은 신자들을 가르치거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 목적인데 반해 이 집회는 예배가 주 목적임을 암시해줍니다. 주의 만찬 외에 다른 "예배 집회"들도 종종 찬양과 기도와 묵상으로 구성됩니다.


   그럼 성경은 예배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요?

   예배라는 단어는 "엎드리다, 땅에 입맞추다"를 뜻합니다. 그런 행동은 경배를 받기에 합당한 위대한 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단어가 처음 쓰인 곳은 창세기 18장 2절인데, 거기서 아브라함은 그의 장막으로 오는 세 사람 앞에 달려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보다 위대하고 또 3절에서 주라고 칭한 그분의 존재를 인정한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5절에서도 그 단어가 발견됩니다. 거기서도 말하는 자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자기와 동행한 사환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땅으로 여행을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포함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모리아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갈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는 것이 예배, 즉 명하신 분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배는 섬김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5절에서 새긴 우상을 섬기는 것은 그것들에게 절하고 경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섬기게 마련입니다. 주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단에게 "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는 신명기 6장 13절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마(4:10).

   이제 우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김으로써 그분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태도입니다. 그것은 필요할 때마다 준비하는 집회나 형식이 아니라 지속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입니다.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성막과 성전에 국한되었습니다. 아론 계통의 제사장만 그런 특권이 있었습니다. 엘가나가 실로에 간 것은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삼상 1:3). 거기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좌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곳에 와서 예물을 드리고, 그들을 구원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성경말씀에 순종함으로써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이 없었다면 그들은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는 길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실행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할 마음이 없는 신자는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요소들이 없을 때는 예배의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시편 29편 2절에서는, 예배가 거룩함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의 거룩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지만, 그 말씀을 통해 그는 예배의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는 거룩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예배가 어떻게 표현될까요?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태도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날 우리는 일정한 장소나 일정한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ㅡ 그들이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합니다(빌 3:3, 우리말 성경에는 '성령으로 봉사하며'로 되어 있음-역주). 여기서 "예배":라는 단어는 성전 봉사를 가리킵니다. 이와 같이 예배는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항상 어디서나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분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인가? " 당신이 마음과 시간과 정력을 쏟는 모든 일을 그런 질문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는 믿는 무리로 모여 주님을 기억하고 기도함으로써 예배를 드립니다. 그 때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께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께 받아들여질 만한, 준비된 마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요?

   우리는 물질을 드림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자신이 받은 선물을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아무 가치가 없는 잔여물이 아니라 큰 대가가 치러지는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함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 전하는 것을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행하는 것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구원받은 이방인을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된 받으심직한 제물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우리는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행동이며,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처럼 예배를 내포합니다. 거룩함이 그 조건이며, 그러한 예배 행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요 그분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매 주일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모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예배로 쏟아 부을 독특한 기회를 갖습니다. 우리는 지역교회로 연합적으로 주님을 기억하고, 또 주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석한 모든 성도들의 마음에 예배를 불러일으키며, 이에 우리는 기도와 찬미와 감사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 예수님을 세상에 구주로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예배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요? 그 모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로 예배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린 형제들도 늘 조용히 지켜볼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감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자매들은 조용히 예배드림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자매들의 조용한 참여는 하나님의 아신바 되며, 또한 무한히 값진 예배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른 신을 경배하고 섬길 수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1장 25절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조물주 대신 피조물을 경배하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 주변의 열방의 신을 숭배할 위험성을 늘 경고 받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사단은 우리가 그를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는 우리 앞에 하나님을 대신할 대체물을 놓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에 더 사로잡히도록 여러 모양으로 유혹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야 할 도전은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마땅히 높일 만큼 높이고 있는지요? 우리는 예배의 전제조건인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요?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것임을 확신하는지요? 그것이 예배이며, 그것이 그분이 우리의 예물을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아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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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8장

                                      염려는?


   무심코 바라보면 식사준비가 잘 되고 있었습니다. 손님이 아주 만족해할 것 같았고, 여주인은 주 예수님을 접대하게 된 것을 아주 기뻐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손님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마음이 분주하고 바짝 긴장되었습니다. 그녀는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아 온종일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동생이 구주의 발아래 앉은 것을 보고 마르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분을 터뜨렸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눅 10:40). 그렇다면 왜 고대하던 기쁨이 좌절로 바뀌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알아보기 위해 주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은 근심과 걱정이 그녀를 그런 상태에 빠뜨렸다고 부드럽게 일깨워주십니다. 염려가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우리의 삶에는 염려를 불러오는 상황들이 찾아옵니다. 이 음울한 감정은 먹구름처럼 우리 위에 드리워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늘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것은 날마다 우리를 쫓아다니며 모든 기쁨을 앗아갑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육체적인 고통과 탈진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달갑지 않은 문제들이 일어나며, 그 문제들이 일으키는 염려와 걱정이 늘 우리 곁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쫓아내려 애써도 여전히 거기 머물러 있습니다. 그것을 제거하기란 불가능해보입니다.

   우리는 왜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보다 덜 염려하는 듯 보이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염려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 하는 그런 상황을 지날 때에도 별반 근심 걱정의 기색 없이 잘 견뎌내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처럼 그 일을 신경 쓰지 않거나 삶의 문제들에 냉담함 태도를 지녔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지 여전히 의아합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또 한 가지는, 사람마다 염려를 느끼는 정도가 다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항상 염려하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문제나 적은 문제나 마찬가지로 크게 염려합니다.

   염려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올 수 있습니다. 가정문제, 직장문제, 건강문제, 교회문제, 금전문제 등 원인은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저지른 아주 후회스런 행동이 원인이 될 수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이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염려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감정을 예의 분석해보면, 염려는 현재 일어나는 일이나, 앞으로 일어나리라 예상하는 원치 않는 일로 인해 생기는 감정입니다. 염려의 결과는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염려가 점점 많아지면 우리 몸이 허약해지고 우리 마음이 분별력을 잃고 일할 능력이 감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그런 감정을 다뤄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성경은 걱정스런 일들에 대해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염려가 우리를 억누를 때 취해야 할 확실하고 손쉬운 행동지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과, 관련된 문제들을 깊이 생각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는 하나의 행동과정입니다. 성경은 대처방안만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할 때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첫 번째는, 성경은 신자가 염려가 없을거라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며, 똑같은 삶의 문제와 여려움을 겪습니다. 질병이 찾아오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압박하고, 가정문제가 염려를 불러옵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믿는 자의 삶이 염려와 근심을 다루는 법을 성경에서 가르침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는 훌륭한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어떻게 염려를 극복하는가? " 하는 문제에 대한 답으로,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성경은 우리를 둘러싼 문제들을 무시하고 삶을 헤쳐 나가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무관심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주님께 그것을 기도로 아뢰라는, 염려와 근심을 다루는 최고의 방침을 주고 있습니다. 염려가 우리 마음을 나누고 어지럽힐 때,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구체적인 필요를 아뢰어야 합니다.

   여기에 제시된 약속은 문제가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평강은 우리의 의무를 포기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싱황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감정과 지성을 보호하사 우리로 폭풍을 넉넉히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평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며, 그 대신 염려에 사로잡힌 채 우리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이제 염려를 극복하는 법을 배웠음으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한번에 얼마만한 염려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을까요?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그에 답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 하심이니라."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는 권면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깨는 때로 힘의 한계를 느끼지만, 하나님에게는 과중한 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부로라도 우리의 염려를 그분께 잔뜩 지워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손쉬운 탈출구가 아닌데, 왜냐하면 염려는 여전히 우리의 염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는 표현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그분이 우리를 진정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행복만을 원하시며,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는 덕택에 우리는 그분이 기대하시는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의 전후 말씀을 읽어보면, 대적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의 염려를 그분께 맡겨드리는 것이 필요함을 알게 됩니다. 염려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그 모든 짐을 감당하려고 애쓴 종은 너무 힘이 빠져서 주의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많은 염려들이 물질적인 필요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이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25절에서는 그러한 필요의 공급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하며, 34절에서는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교훈의 근거로,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에 대한 증거가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고 들의 풀을 입히신다면, 자기를 믿는 자들은 더더욱 그리하실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55편 22절에서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빌립보서 4장에서처럼 이 구절에서도, 고난 중에 하나님의 붙드시는 능력을 맛보려면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편 55편은 의인이 요동치 않는다고 말하며, 빌립보서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가득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 없이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분이 우리 짐을 져주실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삶의 방식을 통해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의로운 삶을 살면서 그 모든 축복을 누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염려가 몰려오면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 그 짐을 맡겨드리십시오. 삶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성경말씀에 순종하면 그 보상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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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7장

                                   하나님의 뜻 분별은?


   믿는 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은 분별하기가 종종 어렵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은 후 첫 번째 던진 질문은 "주여 뉘시오니까? "였고, 두 번째 질문은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오리이까? "였습니다(행 9:5,6). 그와 같이 바울이 구원받은 후 첫째로 갈망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후, 그 소원을 실천에 옮기고 그 소원과  관련된 즐거움과 고난을 경험한 후에,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하나님의 뜻의 세 가지 주된 특징을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로, 축복이 된다는 의미에서 선합니다. 즉, 그분의 뜻을 행하는 데는 축복이 따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행동강령을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유익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의 뜻은 둘째로, 기쁨을 준다는 의미에서 기쁘게 받을만합니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이의 삶을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 아무것도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온전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한번뿐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하려고 애쓰거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데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비극입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힘쓰지만 자신이 그 뜻을 행하고 있는지 게속해서 의심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다는 확신을 가진 듯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그들 자신은 왜 그런 확신을 갖지 못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9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달라고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기초로 해서, 그들은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합당히 행하는 것은 주의 뜻을 아는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절은 그 중 첫 번째 조건을 제시해줍니다.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결연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처럼 성별된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고, 우리의 삶을 세상의 표준에 맞추기를 거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원리와 표준대로 산다면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두 가지는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을 드리고 세상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과연 그분의 뜻이 우리의 삶에서 분별될 수 있는지 알아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해본다는 것은 얼마나 추구할만한 놀라운 목표인지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을 시험해보는 동일한 목표가 에베소서 5장 10절에서 발견됩니다.그 목표를 추구할 때는 어두움의 일을 멀리하고 세월을 아껴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칩니다. 여기에 묘사된 그림은, 늘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 앞에서 살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조건들에 이어서,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에서 우리는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사의 대상은 좋은 일만이 아니라 모든 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6절에서는, 주인이 있을 때만 아니라 항상 성실하게 일하는 종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에서는 희생적인 헌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린 다음 그들의  물질을 드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고소할 것이 없도록 권세 잡은 자들에게 순복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감사와 성실한 직장생활과 희생적인 헌신과 복종이 우리가 매일 힘써야 할 덕목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행동지침으로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요? 당신이 말한 자질들은 우리가 이미 노력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할 때는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하지요? "

   바울은 사도행전 16장에서 그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그와 그 동료들이 직면한 문제는 앞으로 복음전도를 어떤 방향으로 진전시키느냐였습니다. 갈라디아를 여행한 후에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아시아에 들어가지 말라는 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방향을 돌려 비두니아 쪽으로 가려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께서 그들에게 그런 쪽으로 가지 말 것을 알게 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마 그러한 여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 후에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 일행의 도움을 청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10절에서, 바울이 이 환상을  보았지만 무두가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음을 주목하십시오.

   어떤 근거에서 그런 결정이 내려졌을까요? 이 문제를 푸는 열쇠는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가 사용한 표현입니다. 그는 그 적은 무리 중에 있었으며, 그들이 마게도냐로 가기로 "인정했다(assuredly gathered)고 말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그들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본 후에 여행의 방향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사람들이 앞서 말한 조건들을 충족시켰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 적은 무리의 전도자들은 이 당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적극 임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한 길에서 다른 길로 방향을 돌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게으름 피우며 시간을 낭비하는 신자들에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힘쓰는 신자들에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환상을 본 사람은 바울 한 사람이었는데 온 무리가 "인정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관련된 모든 문제를 검토하고, 우리의 계획이 성경에 위배되는 요소가 없는지 점검하고, 기도 가운데 모든 상황을 연결하여 결론에 이르러여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하나님 앞에서 심사숙고한 결과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모든 증거자료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열린 문과 닫힌 문, 개인적인 의무 사항, 충족되어야  할 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 등 모든 것이 삶의 결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했던 다윗의 기쁨을 알고자 하는 바램을 우리 모두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시 40:8).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주저주저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뜻을 이루는 것이 그에게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분의 뜻을 알고, 또 "주여,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라고 물은 바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해하는 기쁨을 알고자 힘써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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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6

                                         기도생활은?


   누가복음 11장에서, 주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 중 한 사람이 자기의 기도는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주께서 기도를 마치시자마자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옵소서'라고 여쭈었는데, 이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담긴 소원일 것입니다.

   기도의 문제는 어린 신자들이 직면한 가장 도전적인 문제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기도에 힘쓰는 많은 신자들은 즉각적인 기도응답을 보고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느낌이 들지 않으면 그들은 실망하고 기도에 관심을 잃게되며, 곧 기도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는 기계적인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손실인지요!

   그러한 느낌은 기도가 무엇이며, 또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합니다.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는 주 예수님의 삶에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2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온 밤을 기도로 보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중대한 결정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은밀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3절에서는 축복된 하루를 보낸 후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그분을 찾는 와중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내어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기도가 그분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또 그분이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셨는지 보게 됩니다. 모든 사역이 기도제목이었으며, 사역이 끝난 뒤에도 다시 기도로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위의 인용구들에서 주 예수께서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따로 정하셨음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유지하기 힘든 훈련일 수 있습니다. 아침에는 시간이 없고, 저녁에는 너무 바쁘고 피곤하고, 또 낮에는 적당한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을 물리치십시오. 매일 시간을 따로 정해두십시오. 불가능한 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탱하기 힘든 긴 시간을 정하는 것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짧은 시간을 정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때로 기도할 때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졸음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런 방해를 피하려면 기도하기 전에 기도제목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아뢰고자 하는 기도제목들을 간단히 말씀드리는 짧은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무엇보다도, 기도에 앞서 준비하십시오!

   A. T. 피어슨은 기도수첩을 만들어서 한 쪽에는 기도제목을, 한 쪽에는 기도의 응답을 적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무리 응답이 더디더라도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든 않든 일은 잘 진행되어 가는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리스도를 닮은 삶은 기도의 삶이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기도는 마땅히 우리의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기도가 없는 날은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날입니다.

   기도는 그분의 뜻이 우리의 뜻임을 그분 앞에 보여드리는 기회입니다. 예를 들어 죄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그 분께 얼마나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기도할 때 우리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기도는 감사로 드려야 함을 늘 잊지 마십시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한 감사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주님을 섬길 기회를 주시고, 여러 가지 교훈을 가르쳐주신데 대해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감사를 당신을 위해 행해진 것에 제한하지 말고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본을 좇아 그런 것들도 당신의 기도에 포함시키십시오.

   기도를 통해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십시오. 삶의 역경 가운데서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자원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우리는 기도가 염려의 해결책임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염려가 하나님의 평강으로 바뀝니다. 우리가 모든 해답을 다 알지는 못할 지라도 우리는 삶의 여러 가지 시련 가운데서 평강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는 평강이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복음을 전할 때나 성도를 세워줄 때나 기도는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생활을 보십시오. 그가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성도들의 기도를 원했는지요(롬 15:30~32, 엡 6:19,20, 살전 5:25, 몬 1:22).

   기도에 힘쓸 때 당신은 기도의 유익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11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이 기도로 돕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의 기도가 바울이 시련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신자들은 문제에 봉착하면 종종 실질적인 성격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도움은 모든 것 중 가장 큰 도움인, 기도로 그것을 기억하는 것에 추가된 도움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은 도움이 베풀어지고 있음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사실입니다!

   기도 후에 우리는 종종 아무런 느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도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는데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약 5:17,18). 그러나 성경은 그가 특별한 느낌이나 흥분을 경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히브리서 5장 7절에서 발견됩니다. 주 예수님의 기도는 경외하심으로 응답되었습니다. 그분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열망으로 가득 찬 까닭에 그분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경건한 삶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기가 얼마나 쉬운지요. 하나님 외에는 우리의 은밀한 기도를 아는 사람이 없기에 우리는 기도하다가 중도에 낙심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권면합니다(골 4:2). 만일 당신이 기도에 끈기를 보인다면, 뒤를 돌아다보며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로이 응답하셨음을 알고 당신의 마음은 놀라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특별한 흥분이나 대중적인 환호는 따르지 않지만 당신이 결코 잊지 못할 경험이요, 주님을 계속해서 섬길 수 있도록 당신의 믿음을 견고케 해주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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