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6장

                                직장이나 학교생활은?


   당신이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소위 "세속적인 일"에 몸담게 됩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시간이 아주 기쁘고 보람이 있어서 아침에 출근시간이면 유쾌하게 집을 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게는 즐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참고 견디는 시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 후자의 경우에는 시간이 빨리 지날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빨리 집에 돌아가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임하든 고용관계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과제입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떤 때보다 더 믿지 않는 자들과 많은 접촉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볼때 우리의 고용관계에 접근하는 태도가 바뀌게 되고, 그것을 단조로운 일과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독특한 기회로 생각하게 됩니다.

   종(노예)에게 주어진 가르침에서 성경은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당신은 노예시대는 지나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노예제가 일반적인 고용제도였으며, 따라서 성경에 종들에게 주어진 가르침은 오늘날 고용인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먼저, 고용주를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아야 합니다(딤전 6:1). 우리는 흔히 "공경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 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상급자를 무조건 공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그 일에 실패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게 됩니다." 믿지 않는 자는 당신을 당신의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기에, 당신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고용주에게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야 하지, 맡겨진 것의 일부를 떼어먹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딛 2:10).

   종종 "부수입" 같은 것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장이 아주 난처할 수가 있는데, 특히 정기적으로 부수입이 생기는 부서에서 일할 때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거절하면 동료들이 그 동안 부수입을 챙겼다는 것이 폭로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특별한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받음으로써 당신의 입장을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단 그렇게 하면 당신의 간증은 무너지고 맙니다.

   만일 당신의 고용주가 믿는 자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특권을 얻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또는 믿는 형제이므로 남달리 가까운 관계가 될 줄로 기대할 수 있으나, 그러나 영적인 관계가 사회적인 평등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직장에서의 고용관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지역교회로 모일 때는 형제로 대할 수 있으나 (연장자일 때는 물론 연장자로 대해야 합니다), 일터로 돌아가면 다시 상사로 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믿는 자는 불평불만을 일삼고 상사에게 대드는 그런 사람으로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뒷전에서 목소리를 내다가 불평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노사분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일을 선동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억울한 처지를 돕고 있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그런 식의 태도로 인해 잃어버린 당신의 간증을 되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딛 2:20).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믿는바가 아름다운 행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

   믿지 않는 자들은 매일의 삶의 긴장과 압박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가까이서 관찰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은 다르다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모범적인 고용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또 한가지 위험이 골로새서 3장 22절에 나와 있습니다. 당신은 그저 "눈가림" 으로 일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용주가 지켜볼 때만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대충대충 일을 처리하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아주 열심히 일을 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한다면,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임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늘 기억해야 할 사실 중 하나는, 그 일을 통해 당신이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요일도 주일처럼 주의 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주일에 교회에서 하는 봉사로만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은 그보다 훨씬 의미가 넓습니다. 주의 일은 당신이 날마다 하는 모든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일터에 있든,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있든 항상 자발적으로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또 일을 잘 해야겠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당신의 영적인 의무를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일 당신에게 새로운 자리가 제시된다면 영적인 문제들을 신중히 생각하십시오. 그 자리를 수락하면 집회를 자주 못 나오는데도 굳이 수락해야 할까요? 보직이 바뀌어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경우도 있지만, 집회를 정기적으로 불참하게 만드는 자리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곳에 지역교회가 없다면, 당신이 굳이 거기로 가려는 동기가 무엇일까요? 그 지역을 복음화하려고 가는 걸까요, 아니면 돈과 승진 때문에 가는 걸까요?

   돈을 사랑함이 동기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일을 해야만 합니다. 일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됩니다(살후 3:10). 그러나 그 목적이 당신의 필요를 채우고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는 돈을 사랑함에 먹이가 된 사람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스릴 수 있다고 자신하며 유혹에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 유혹은 곧 빠져나올 수 없는 올무가 됩니다. 그 올무는 그의 마음을 찌르며 괴롭힙니다. 슬프게도 그는 마침내 "침륜과 멸망"에 빠져 이생과 영원세계에서 크나큰 손실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려다가 그런 올가미에 걸려드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떤 이들에게 부를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 부를 당신 스스로 목표로 삼는 것은 재앙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직장이나 대학생활을 막 시작하려는 이들에게 마지막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말해줄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처음에는 조용한 방법으로 그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동료들이 당신에게 함께 어울리자고 청할 때, 당신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그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사실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즉시 "아니요" 라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앞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별도로 복음전할 시간을 갖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근무 중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용주의 시간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구별된 삶을 통해 살아있는 설교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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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5장

                                      영적인 퇴보는?


   사도 바울이 이 땅의 수고를 마칠 즈음 로마에서 성경에 기록된 가장 슬픈 고별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갈 뜻을 비쳤습니다. 우리는 왜 그가 거기로 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은 데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데마로 하여금 사도 바울 곁을 떠나게 한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데마를 본 마지막 모습은, 아마도 세상 쾌락의 길로 가기 위해, 사역의 길을 떠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열망이 식어진 때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간 자(a backslider)는 세상과 짝하여 자기 길을 가기 위해 주님을 섬기는 삶에서 의도덕으로 등을 돌리는 자입니다. 되돌아간 자는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고 결국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자 중 어떤 이들은 지역교회의 교제를 떠나가지만, 어떤 이들은 세상과 교회에 양 다리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매우 슬픈 상태이기에,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이며, 과연 그런 자가 다시 회복되어 주님 일에 예전같이 쓰임 받을 수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탕자는 종종 복음 메시지에서 죄인의 비유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다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린 자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데마의 경우처럼, 그 둘째 아들을 방황하게 만든 것은 먼 나라의 유혹, 세상의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린 신자들의 삶에 퇴보를 가져오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뭔지 잘 보여줍니다. 세상은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것저것 제한이 많아 보이기에 우리는 주변의 쾌락을 좇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왕궁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왕하 8:1~6).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른 후였는지요! 그가 길을 돌이킨 것은 돈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얻기 위해 간증을 무너뜨리고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을 문둥병의 저주에 빠트렸습니다. 이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되지 않나요?

   롯은 물이 넉넉한 요단 평지를 바라보고 나그네의 길보다는 안락한 생활을 택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롯의 자취를 좇아, 사역이 힘들면 등을 돌리고 떠납니다.

   엘리멜렉은 기근을 만나자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퇴보의 길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삼손은 불경건한 여인의 유혹에 굴복하여 하나님을 위한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의 방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매력, 돈에 대한 사랑, 안락한 삶에의 유혹, 고된 사역, 구원받지 않은 여인의 아름다움, 영적인 둔감함 등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옛길로 돌이키게 합니다. 그런 상태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른 이들 탓으로 돌립니다. 실은, 다른 이들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훌륭한 사람과 같이 있다고 해서 그런 문제에서 자동적으로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데마는 사도 바울 곁에 있었고, 게하시는 엘리사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 곁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그처럼 곁길로 가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것이 자라서 눈에 띠기 훨씬 이전입니다. 퇴보는 우선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질병이 그렇듯이 얼마간은 그 징후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집회에는 나가지만 관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수양회 자리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먼데 있습니다. 떡을 떼는데 참여는 하지만 아무 새로운 감동 없이 구태의연하고 진부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과 성도들은 잘 몰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압니다. 혹시 당신의 마음에 퇴보의 초기증상이 감지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서, 왜 우리의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감소되고 사단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다른 관심거리들을 집어넣게 허용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분명 주된 이유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늘 사귐 가운데 있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통해 곁길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요소들에 충실한다면,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고 또 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자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삶보다 덜 매력적이고 덜 기쁘고 덜 만족스러운 삶을 주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믿는 자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으며, 이제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믿는 자의 책임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슬픈 상태에 있다면, 혹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조바심날 수 있습니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온 사실에서 용기를 얻으십시오. 그처럼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회복으로 이끄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합니다. 그 가련한 탕자는 돼지들중에 앉아 자기 죄를 자복하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고 결연히 말했습니다. 나오미에 대해서도 룻기 1장에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 땅에 나가 사는 동안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새로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기로 단호히 결심하지 않으면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기쁨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단계를 밟지 않는다면 앞날은 밝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제자의 길에서 돌아선 다음 정말 가치 있는 일에 형통한 사람의 예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은 종종 이상합니다만, 그러나 그 방법은 항상 그분의 말씀과 일치를 이룹니다. 당신은 스스로 예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신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잃어버렸고 소유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경고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혹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너무 늦기 전에 단호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당신은 혹 퇴보자의 길을 저만치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돌이키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의 상태를 자백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인생은 너무 짧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쉬 지나가기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분의 인정을 받을 만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을 사느라 우리의 생애를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과, 동료 신자들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전도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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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4장

                                  시험(유혹)은?


   유혹은 모든 신자들이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유혹을 받을 때 절망과 좌절에 빠집니다. 유혹을 느낄 정도로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하락했나 하고 한숨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과연 그렇게 가르칠까요? 성경은 유혹에 이떻게 대처하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모든 신자는 유혹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단이 어떤 제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이 우리의 소원이 되고 우리가 그것을 행동에 옮길 때에만 그것이 죄가 됩니다.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유혹을 이겨내신 주 예수님의 위대한 본을 기억하십시오. 혹 주 예수님이 죄를 범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으실 수 없으며(약 1: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범치 않습니다(요일 3:9). 주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그분의 무죄하심을 증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공격대상이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지만 유혹하시지는 않습니다(약 1:13). 우리는 시험을 받는 중에 종종 사단에게 유혹을 받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매력적이지만 실상은 잘못된 방법을 사단은 은근히 제안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합당치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주님의 뜻을 여쭙지 않고 임의로 결정하고픈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면 유혹은 어떻게 역사할까요? 야고보가 그 과정을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습니다(약 1:14).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쪽으로 반응하려는 욕구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을 위해서 억제되어야 할 욕구입니다. 유혹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제안함으로써 그러한 욕구를 자극하려 합니다. 손쉬운 해결책, 그 동안 참아왔던 욕구의 충족을 제시합니다. 유혹은 탐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물이 넉넉한 평지가 롯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아리따운 밧세바의 용모가 다윗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 난관에 처한 베드로에게 손쉬운 탈출구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같이 된다" 는  약속이 하와의 마음을 앗아갔습니다.

   어떤 유혹들은 다른 것들보다 쉽게 감지됩니다. 가령 도덕적인 문제들은 선악간에 구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종의 길인지 불순종의 길인지 구분이 분명치 않은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 외관상의 결과만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순종의 길이 항상 외관상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유혹은 또한 속임수를 사용합니다. 야고보는 미끼의 개념이 내포된 단어를 사용해서 유혹에 빠지는 문제를 얘기합니다. 미끼는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해냅니다. 미끼는 먹이가 보기에 좋은 것으로 만들어졌으며, 먹이를 자기에게 끌어들입니다. 또한 미끼는 바늘이나 덫을 보이지 않게 가립니다. 먹이가 그것을 알아챌 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미끼에 걸려든 것입니다.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의 정체는 우리가 걸려들 때까지 숨겨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 속에 우리를 옭아매는 바늘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때늦게 깨닫습니다. 유혹의 그런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피합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욕심이 끄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죄의 뼈아픈 대가를 몸소 배우게 됩니다.

   그런 문제에 직면할 때는 겉으로 보이는 멋지고 매력적인 모양에 끌리지 말고 그 후에 치를 대가를 바라보십시오.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고 자문해 보십시오. 먹이를 삼키지 말고 영적으로 깨어 있으십시오. 죄는 후에 사망을 가져옵니다. 죄로부터는 어떤 선도 나오지 않으며, 그 결과는 언제나 더 크고, 더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유혹에 대처해야 할까요? 가장 좋은 길은 유혹을 만날만한 상황을 피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불가에서 악한 동무들과 함께 있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저녁에 지붕을 거닐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동료들과 어울리고픈 유혹이 항상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여가를 보내는 것은 잠재적인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연약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생각하십시오! 바쁘지 않을 때, 우리 마음대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을 때, 그 때 많은 유혹이 찾아옵니다. 슬프게도 당신은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위험한 장소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시간을 영적으로 유익한 일에 사용하기로 굳게 결심하십시오.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아니요' 라고 말할 때를 알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소유한 중요한 무기인 성경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군인은 전쟁에서 무기를 잘 사용하기 전에 평소에 자기 무기에 대해 잘 알아둡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무기 사용법을 배우느라 책을 뒤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는 첫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적군에게 적발될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사용법을 배우고 연습함으로써 자기 무기를 잘 알고 있으며, 유사시에 즉각 무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실천하고, 사용법을 잘 알아두십시오. 그러면 사단이 부를 때 성경을 적절히 사용하여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엡 6:17). 이것은, 당신이 미리 공부해둔 성경본문이 특별한 때, 특별한 경우에, 현장에서 아주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라고 거듭 말씀하신 저 위대한 교사의 본을 따르십시오.

   셋째로, 모든 유혹에는 피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불가피하게 빠질 정도로 큰 유혹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유혹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유혹을 물리치기에 적합한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길을 구하고 즉시 택하십시오. 지체하면 재앙이 초래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항상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피할 길을 택할 영적인 의지가 있는지요?

   마귀를 대적하고, 승리자의 삶을 사십시오. 모든 유혹을 승리의 기회로 삼고, 앞에 어떤 장애가 있든 힘과 용기를 내고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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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13장

                                       험담은?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문제가 있었고 또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신 증거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배후에 한 사람이 느헤미야의 사역을 중지시키려고 일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느 6장). 가스무가 악의에 찬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진실을 왜곡하고 변개시켜 아무도 믿지 못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가스무는 그의 뒤를 좇아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고 사람들을 낙담시켜 하나님의 역사를 중지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자들의 공통된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현대판 가스무가 여기저기 활개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이 어떻게 활동하며,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신자들과 함께 있을 때 종종 그 자리에 없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칭찬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즐겁고 전혀 해롭지 않은 얘기도 있습니다(물론 이야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원칙을 말하자면, 그 사람이 자리에 있어도 할 수 있는 얘기 외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험담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기 마련이며, 그렇게 되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받게 됩니다.


   첫 번째 주목할 것은 험담은 해롭다는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가장 미덥지 못한 인물 중 하나는 남의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의 행실의 해로운 영향이 두 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 26:22). 험담은 사람의 마음을 상케 하고 낙심케 합니다. 아무 악의가 없는 잡담도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말이 그 사람을 쓰러뜨리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험담은 다툼을 일으킨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잠언 26장 20절은 말쟁이가 다툼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해 일어나는지요! 남의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소문이 사실처럼 퍼집니다! 혹 어떤 비밀스런 얘기를 전하고픈 유혹이 들거든 그 얘기가 당사자의 귀에 들어갈 때 일어날 일을 미리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큰 문제가 일어날까요.

   이와 같이 소문이 퍼진 결과 다툼이 일어나고 피차 마음이 상하게 된다면, 그러면 왜 그런 소문을 퍼뜨리게 되는지 그 원인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은 시샘입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당신보다 어떤 면에서 나아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보다 더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소유하고픈 은사를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보다 더 주의 일에 쓰임 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제 몇 마디 말이면 그에 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한다는 인상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혹은 어느 한 부분만 말하는 전략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일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끔 하는 것입니다. 진실에 뭔가를 더하거나 빼는 것은 성경말씀을 다룰 때만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다룰 때 피해야 할 위험천만한 시도입니다. 바울은 그런 일을 당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 8절에서 우리는 어떤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비방하며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한 예를 보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원인은 미성숙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고, 또 모두가 우리 이야기에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모두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부분을 조금 강조하거나 이야기를 좀더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해서 또 다른 "사실"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기는 하나 사적인 비밀인 경우에는 그것을 밝힐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말쟁이는 남의 비밀을 누설한다고 잠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뢰를 저버리는 심각한 잘못입니다.

   게으름도 원인을 제공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서 바울은 젊은 과부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험담을 늘어놓기 쉽다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없어서 집집마다 다니며 험담을 늘어놓다보니 한 집에서 한 얘기가 이 집, 저 집으로 마구 퍼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얘기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헐뜯고 흉보고 비방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습성은 젊은 과부들에게 국한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이 덫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자아를 부추기려는 욕심도 원인을 제공합니다. 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불필요하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생각난 것들을 마치 그 당시에 당신이 한 말인 양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신자의 생활 속에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사실을 자세히 확인해보고 그 사람에게 직접 말하거나 필요하면 교회 장로들에게 그 일을 말하십시오. 그런 문제는 성경에서 말하는 적절한 절차대로 해결해야 합니다. 소문을 퍼뜨리면 오히려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그러면 그런 말쟁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잠언 20장 19절은 그와 사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는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 얘기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당신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과는 많은 대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한담을 주고받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럴 때는 화제를 건전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돌리든가, 아니면 그런 식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대화를 할 때는 골로새서 4장 6절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르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부적절한 말은 다스릴 수 없는 불같아서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약 3:5). 우리의 입술로 붙인 불은 좀처럼 끄기 힘들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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