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는?

믿음,신앙 2016. 2. 19. 15:12

그 후에는?


나는 당신에게 꼭 말씀드리지 않으면 안될 사실을 경

고해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이 이 경고를 받으신

후에 깨닫고 돌이킨다면 정녕 영생을 얻으려니와 만일

돌이키지 않는다면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당신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지만 베틀의 북보다 빠르

며 한 호흡과 같이 허무합니다. 당신의 생명은 움킬 것을

향해 날아 내리는 독수리같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비록

당신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날아갑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 해 동안 쓸 물건들을 쌓아두고 안심

하고 먹고 마시며 향략하자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당신의 영혼을 찾으신다면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

에 없습니다. 당신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생명이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

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야고보서 4:14).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심판하시며, 당신이 행한대로

심판하십니다. 당신이 무슨 무익한 말을 했던지 이에 대

해 심문을 받게 됩니다. 당신의 죄가 정녕 당신을 찾아낼

줄 아십시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당신은 둘째 사망 곧 불못에서 밤

낮 없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구

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며, 사람마다 불로

써 소금치듯함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브리서 9:27).


이상 말씀드린 사실이 당신의 모습이며 운명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사도행전 16:

30). 이 외침은 당신에게도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절망적인 당신에게 참으로 반가운 소

식은 무었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외아들 예수 그리

스도를 구주로 보내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몸으로 당신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4). 예수님은 당신의

범죄 때문에 내어줌이 되셨고 당신을 의롭다 하시기 위

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로마서 4:25).


이제 당신의 죄를 자백하시고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

십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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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Help for the needy soul

                                                                                by H. A. Ironside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9, 40).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서언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단 한 가지 두드러진 목적만을 염두에 두었는데, 그것은 번민하는 영혼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평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가능한 한 분명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것으로 믿고,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왠지 "온전한 신뢰의 평강" 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주님을 알기를 갈망하지만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실망의 수렁(Slough of Despond)에서 허우적거리듯이 번민 가운데 방황하는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성경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시도는 일절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필자 자신이나 필자가 특히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한 의심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다른데서 얼마든지 도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에 대해서는 건전한 그리스도인 학자들이 쓴 양서가 풍부합니다. 문제는, 그런 문제에 대해 도움을 원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작  기회가 주어져도 그 문제를 자세히 연구하는데 관심이 너무 없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내가 염두에 둔 사람은 실로, 간절히 진리를 추구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성령으로 그분의 말씀을 통해 평강의 참 근원을 보여주실 때까지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의심과 혼란 중에 방황했습니다. 그 일은 오랜 과거로 흘러갔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그 때의 갈등이 마치 엊그제 일 마냥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하고 그 후로 오랫동안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화평 안에 들어갔을 때 내 영혼을 가득 채웠던 그 기쁨을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먹구름이 때로 하늘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슬픔과 시련이 내 영혼을 괴롭힐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죄악을 새롭게 발견하고 자복과 회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과의 화평은 조금도 변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의존하지 않고, 나의 생각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라고 기록된 그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시 1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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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넓은 길로 가는 신자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섭고 놀라와 가슴이 떨리는 내용이 많다. 앞에 기록한 말씀도 그 중의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숫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수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 앞에 기록한 말씀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계속 읽어나가면 거짓 선지자에 관한 말씀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시대 기독교의 거듭나지 못한 지도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 생애를 드리며 고생하며 충성을 다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거짓 선지자요, 멸망의 자식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으며 찾는 이가 많다는 말씀이 두렵지 아니한가. 생각하여보라.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소경의 눈이요, 길 잃은 자의 안내자요, 상심한 자의 위로자요, 양들의 목자라고 자처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멸망의 지옥 불에 떨어져서 끔찍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 자신은 (지옥을 진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면 들어감은 물론이고 각종 면류관을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졌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누구인지 필자는 모르지만 이 글을 통하여 자신을 점검해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축복이 그대에게 함께 할 것이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큰 교회, 유명한 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이 목회 하는 교회, 큰 교파에 속하여 있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그와 같은 교회에 속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필자는 대규모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을 자랑하며 자신은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소경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을 만나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의 경력이나 자기가 속한 교회의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거짓 목자들은 거짓 목자로 살았기 때문에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을 따라가다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찌 한단 말인가.

   그들은 왜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냐고 물어보면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성경을 잘 가르치고 훌륭한 믿음으로 인도하니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태도로 이야기한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다시 말하건대 이와 같은 거짓 목자가 참 목자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된 하나님의 종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것이 기독교 역사요, 우리의 현실이다.

   거짓 목자 밑에서 배운 불쌍한 양들은 목자를 잘못 만나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혹자는 필자에게 말하리라. 어찌 자신 있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구원의 진리는 비밀이라고, 비밀은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지식도 아니다. 극히 적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비밀이다. 성경은 구원을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번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구원 받은 자의 적음을 알아보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서두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님 사역의 초기라고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참된 진리를 증거하며 불의를 지적하고 선한 양심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지 아니할 것을 이미 아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현장에서 보듯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적은 무리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에 동조하였다.

   두 번째로는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된 말씀이다. 26절에 보면 마지막 시대가 노아의 시대와 같다 하였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세상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결국 멸망의 지옥에 떨어졌다. 그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인가. 성경은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베드로전서 3:20).

   얼마나 떨리는 말씀인가.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지 아니한가. 혹자는 그 당시 인구를 5억 정도로 이야기한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 한다면 5억의 인구 중에서 겨우 여덟 명이 구원받았다. 기가 막히지 아니한가. "겨우"라는 말에 주목하라.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는 너무 적으므로  "겨우"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지 아니할까. 필자는 믿는다.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지극히 적은 수가 구원받은 것을... .

   누가복음 17장에는 또 다른 말씀도 있다. 롯에 관한 말씀이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극적으로 건짐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지옥 유황불에서 구원받는 성도들의 이야기이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들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성읍에서 구원받은 자가 4명이지 아니한가.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몇 명이나 건짐 받았는가.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뿐이지 아니한가.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한국에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 중에 과연 얼마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필자는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 범주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삼분의 일이라 하여도 성경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필자가 어떻게 감히 숫자를 다 말할 수 있을까마는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은 극히 소수가 구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왔을까?

   첫째는 구조적인 모순에 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거니와 오늘날 교회 일꾼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거듭남을 체크하고 있는가? 필자가 만나본 신학생들의 대부분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후배 목회자는 신학생 시절에 거듭났는데 동료들에게 거듭났느냐고 물어보고 다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고 교수님에게까지 왕따 당한 슬픈 간증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참된 하나님의 종을 양성하려면 우선 거듭남부터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냥 신학교에 지원하면 합격하여 졸업하고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성직자로 세움을 입는다. 거듭나지 못한 일꾼은 거듭나지 못한 양들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다.

   또 다른 나의 친구 목회자는 집사로 재직시에 구원을 받았다. 문제는 이와 같이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집사로 임명되어 교회 일을 참여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디모데전서를 읽어 보라. 집사는 얼마나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였는가.

   두 번째로 오늘날의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에 문제가 있다. 한국의 교회 대부분은 기복신앙에 잡혀 있다. 예수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얼마 전까지 휴대하고 다니던 교회 안내 전도지가 있었는데 제주도의 어느 교회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부자 되기 원하는 사람은 우리 교회로 오라! 교회 출석하여 도장 받아 오면 선물을 주겠다." 어떤 장로가 교회 명의로 내보낸 전도용 안내서였다. 노골적으로 예수 믿어서 부자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헌금 잘 내고 십일조 떼어먹지 아니하며, 또한 열심히 충성하면 축복 받아 잘되고 부자 된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것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예수 믿어서 병 낫고 건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실제로 병 고침 받기 원하는 자는 기도원으로 오라는 전단지를 심심찮게 본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부자 되는 것도 필요하고 건강한 것도 필요하다. 필자도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와 같이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과 천국을 경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하리라. 나와 나의 동료 교인들은 다 천국을 믿으며, 천국에 갈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집사님들이 나에게 그렇게 반박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집사님, 지옥이 있습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말 지옥이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어떤 사람이 갑니까? 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얼버무렸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지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모르고 있다. 그들의 지옥에 대한 믿음은 막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집사님은 끝까지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여 그렇다면 누구에게 지옥을 증거했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였다. 정말 지옥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옥을 경고할 것이다. 슬픈 일이다.

   강단에서 지옥을 전하지 않으니 양들이 지옥을 알겠는가? 지옥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구원을 알지 못하고 그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은 적도 없다. 오래 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목자와 그를 따르는 양들에 대해서 예언한 적이 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거짓 예언으로 백성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었으며, 자기 취향에 맞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중심 내용과는 관계없는 기복신앙을 전하여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열심히 충성하며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된다고 양들을 속이고 있다. 양들은 그것을 좋게 여겨 천국의 소망과는 아무 관계없는 그와 같은 가르침을 따른다. 그들의 삶은 성경과는 아무 관계없는 죄악된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의 문란한 삶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적인 삶도 성경을 깨닫고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에서 능력을 얻고 성경을 전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 빠져서 적당히 살아가다가 주일날 헌금 좀 잘 내고 목사님 설교 듣고 지은 죄 회개하고 돌아오면 마음이 조금 평안해지며 위로를 받으니 그것이 신앙생활인줄 안다.

   사도행전을 보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는가? 그들이 그렇게 살았는가? 신앙의 깊이는 먼저 내적인 변화에 있다.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이다. 모든 죄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대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된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이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는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였다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는 참담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땅에서 죽도록 충성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옥에 떨어졌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러한 비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 거듭난 소수의 무리만 천국에 이를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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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자기 노력으로 죄 씻으려는 신자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우리가 죄인인데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그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여전히 죄를 짓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죄를 안 지어야지요."

   "죄가 안 지어집니까?"

   "노력해야지요."

   이와 같은 대화는 필자가 수없이 많이 경험한 대화이다. 이 얼마나 막연하고 대책 없는 대화인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당연하거니와 이 노력으로는 절대로 천국에 이를 수 없다.

   "죄를 안 지어야지요." 이 말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 말은 사단이 한국 기독교인을 가장 많이 속이는 말이다. 여기서는 죄 문제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미지근한 사람들의 문제점을 점검하며 기독교 안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첫째로 이들은 사단에게 속고 있다. 사람이 죄를 이겨보려는 노력은 인간이 땅에 살면서부터 진행되어왔다. 이것은 양심적인 문제요 본능적인 문제이다. 그러기에 양심과 본능을 기초로하여 만들어진 교과서 및 교육 자료들도 죄를 짓지 아니하려는 노력에 맞추어져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떼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죄악의 길로 줄달음쳐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양심 속에 하나님의 모습이 있는 고로 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해왔다. 이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요 인류가 버리지 말아야할 좋은 습관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 있는 사단이 이 습관을 이용하여 영혼을 노략질하는 것이다.

   사단은 인간에게 행할 수도 없는 막연한 목표를 주어서 마치 죄를 안 짓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면 결국은 천국에 가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 심리로 속이고 있다. 또한 그것은 양심과 본능에도 맞는 것이며 겉보기에도 훌륭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 함정이 있다. 그것은 사단이 은밀한 곳에 파놓은 교묘한 함정이다. 역사적으로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혼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실패하고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

   다름 아니라 서두의 대화에서 나타난 것처럼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천국 가는 것처럼 속인다. 죄를 짓지 않아야 천국 간다는 사상은 모든 이방종교에 팽배해있으며 실상 모든 종교를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슬픈 것은 이와 같은 이방종교의 사상이 기독교 안에도 침투해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 문제를 물어보면 죄를 짓지 않아야만 천국에 가는 것처럼 대답하고 있다. 오! 사단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속아서 지옥에 가는 자로 하여금 지옥 문 앞에 갈 때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속이는 것이다.


   둘째로 그것은 교만한 말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죄를 안 지어야지요. 노력해야지요." 이 말은 아주 고상하고 품위 있는 말같이 들리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이요 구원을 거부하는 말이며 오만한 자의 교만한 행동이다. 생각하여 보라. 물에 빠진 사람이 죽게 되어서 밧줄을 던지니 밧줄을 거부하고 내가 노력해서 탈출해보겠노라고 한다면 그는 구원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오겠다고  고집하다가 죽지 않겠는가? 이것은 구원자를 무시하는 행위요 자기의 처지를 파악하지 못한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의 모습인 것이다.

   성경에서 죄인이라는 뜻은 "자기 힘으로 죄 문제를 풀 수 없으므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부르짖은 세리와 같이 겸손하게 나아와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거니와 교만한 자에게는 엄격히 다룬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베드로전서 5:5). 물론 이 사람들이 인격적으로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따뜻한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교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속이는 지혜이다.


   셋째로 그들은 경험되지 않은 교리를 말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속죄를 입으로 말한다. 교리적으로도 깨닫고 있다. 질문에 멋지게 대답하는 교인들도 많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양심적인 문제를 들어 죄를 짓지 않느냐고 다그치면 당황한다. 그들은 경험하지 못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 문제 앞에 당황하여 급히 쏟아놓는 말이 "죄를 안 지어야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안 지을 수 있는가 말하면 당황하여 "노력해야죠" 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정돈되지 않은 지식을 교리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문제를 말하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자기에게 경험이 없으므로 자신감 없는 답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를 안 지어야지. 노력해야지." 이 얼마나 불안정한 대답인가? 그들은 하나님에대한 열정이 대단할지라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녕 지옥에 갈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자신에게 속고 있다. 서두에 약간 언급했던 것처럼 죄를 안 짓는다거나 노력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책임한 말인가? 도대체 인간이 죄를 안 지을 수 있는가? 노력으로 말미암아 얼마만큼 죄를 덜 지을 수는 있겠으나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다. 전도서 7장 20절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될 수 있는가? 인간은 죄를 안 짓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도 죄와 천국에 관한 문제를 언급하면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는 말을 쏟아놓고 있다. 그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을 평생 하면서 고생할 것이다. 그리고 지은 죄로 인하여 평생 고통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지옥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을 살펴보자.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온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한 가지만 빼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가지로 인하여 모두 지킨 율법의 행위가 허사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살인하지 아니하였을 지라도 간음하면 지옥 갈 죄인이라는 뜻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거짓말을 하면 도둑질한 것과 같은 죄인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에 관해 간증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립보서 3:5,6). 얼마나 놀라운 간증인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지 않은가! 이 말은 자신이 자신을 돌아볼 때 흠 잡힐 만한 잘못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와 같이 완벽한 간증을 하고도 그는 자기 의로, 자기 행위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죄를 안 지어야 된다는 사상이나. 노력해야 한다는 사상은 다 율법 행위에 속한 사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저주 아래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있는 수많은 소경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는 노력이나, 열심을 대단한 신앙의 표본으로 자랑하는데 이것은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바보인가.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으로 천국에 간다면 도대체 얼마큼 노력해야 할 것인가? 그 한계는 어디인가? 어디까지가 천국이고 어디부터가 지옥인가? 답답하지 아니한가? 그러니 해도 해도 끝없는 노력 속에서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자포자기하고 기독교를 떠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끝까지 노력하고 있다.

   목사님들은 첫 번째 사람에게 믿음 없는 탕자라 하고, 두 번째 사람에게는 믿음 좋은 신자라고 말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가 탕자가 아니고 육신의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 정직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두 번째 사람은 믿음 좋은 신자처럼 보이지만 자기 착각에 빠진 소경일 뿐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자기가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 아래 있는 자이며 저주의 자식이며 지옥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 그들 중에는 목사나 장로나 집사들도 허다하다. 그들은 자기 의에 잡혀서 자기는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의 인도자요, 소경의 눈이요, 길 잃은 양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정작 자기가 소경이며 길 잃은 양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어느 날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거듭난 사실이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화를 버럭 내면서 목사에게 그렇게 묻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냐고 따졌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허나 성경은 지도자들일지라도 생명의 문제를 검토해보라고 권면하고 있다(마태복음 7:21~23).

   이제 정확한 복음은 무엇인가? 말해 주고자 한다.

   "당신은 죄인인데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용서하셨다는 대답으로 족하다. 그러면 "또 죄를 짓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음으로 인하여 구원 이후에 짓는 죄가 나를 지옥으로 이끌지 못한다. 다시 설명하자면 구원받기 전에는 종의 신분으로 죄를 짓는 것이며, 구원받은 이후에는 아들의 신분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종은 죄로 인하여 쫓겨나거나 주인과 관계가 끊어질 수 있지만 아들은 죄로 말미암아 관계가 끊어질 수 없는 피로 맺어진 관계다.

   구원은 이와 같아서 예수님의 피로 죄를 씻어서 하나님과 우리가 부자(父子)의 인연을 맺었다. 얼마나 든든한가! 얼마나 확실한가! 죄와 상관없이 천국에 가는 것이며,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은 그와 같은 자들을 찾으신다.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브리서 9";28).

   사랑하는 여러분! 죄 문제를 해결했는가? 답을 찾았는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지만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된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경은 뭐라고 답변하고 있는가?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0:18).

   죄를 안 지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를 의지함으로서만 천국에 이르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십자가에서 그대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면서 " 다 이루었다", 즉 "다 갚았다" 하신 예수님을 단순히 믿는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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