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비밀을 아는 특권


[마태복음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누가복음 8:10]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어느 전도자가. 한강 근처에 있는 교회에서 열심히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 마지막에 결론을 내릴 쯤, 한 남자분이 갑자기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강사양반, 나는 천국도 지옥도 믿지 않소. 하나님과 예수님도 믿지 않소. 나는 그것들을 본 적이 없소이다.

나는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절대 믿지 않는 것이 내 인생철학이오. 내 눈 앞에 있지도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오?

나를 믿게 하려거든 당장 내 눈 앞에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던지..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데려다 놓으시오"

갑작스런 질문에 전도자와 사람들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맨 앞줄에 앉은 한 남자가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검은 색안경을 낀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저는 이 근처에 한강이 있다고 하지만 저는 믿지 않습니다. 여기 강사님과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저는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을 본 적도 없소.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장애인으로 태어났소. 나는 이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암흑의 세계라고 믿고있소."

그러자 조금 전 강사님께 따졌던 그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장님이었던 헬렌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눈이 멀어 앞을 못 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도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멀어서 보지 못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정작 비극적인 것은 버젓이 눈이 있는데도 볼 것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귀가 없어서 못 듣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작 불행한 것은 들을 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진리를 말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보고 깨닫는 영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진리를 듣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열린 귀를 가져야 합니다.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을 향해서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9]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이사야 6:9] ~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비밀을 알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경우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역사 속으로 도래했음을 알리셨으며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말씀하시고자 하셨고,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촉구하셨으며 회개와 믿음을 갖도록 초청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직접 얘기하지 않으시고 비유로 설명하셨을까요?

[마태복음 13:10~12]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13:13~15]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비유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표현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며 예수님에게 비유의 뜻과 함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두 가지 기능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는 계시의 기능과 ‘저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은닉의 기능’이었습니다.

비유를 통해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길 바라셨지만 예수님의 메시아적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에게 도전하는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비유를 통하여 주어지는 천국의 계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천국 비밀을 아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하시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반대하고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심판의 수단이 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은 깨닫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교훈을 쉽고 바르게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마가복음 4:33~34]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특권을 가졌으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가지고 육신의 시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무한대의 신비로운 세계를 마음껏 즐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4:1~2]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로 씨 뿌리는 비유,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 비유,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비유,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 비유, 새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 과같으니

우리 모두 영의 눈이 열려 신비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푸는 천국 잔치의 즐거움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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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행복한사람


[시편 128: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시편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 텔마 톰슨이라는 여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한 육군 장교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을 따라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제이브 사막 근처의 육군 훈련소에 배속되어 왔습니다.

남편 가까이에 있고자 이사를 했지만,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의 삶은 참으로 외롭고 고독하기만 했습니다. 못마땅한 점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훈련차 나가고 오두막집에 혼자 남게 되면 50도가 넘는 살인적인 무더위에 이야기 상대라고는 고작 멕시코인과 인디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항상 모래 바람이 불어 음식물은 물론이고 호흡하는 공기에도 모래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는 절로 신세 한탄이 나왔고, 슬프고 외롭고 억울한 생각이 들어 친정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집으로 돌아 가겠으며, 이곳에 더 눌러 사느니 차라리 감옥에 가는 편이 낫겠다는 내용으로 자신의 형편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당장오라거나 자신을 위로해 줄거라 기대했던 아버지의 답장은 단 두 줄 뿐이었습니다.

✉두 사나이가 감옥에서 조그만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헤아리며 자신의 미래를 꿈꾸며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감옥에 굴러다니는 먼지를 세며 불평원망하며 살았다.
너무 간단한 편지 내용에 처음엔 너무나 실망했지만 이 두 줄은 그녀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문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던 그녀는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그때부터 현재의 상태에서 무엇이든 좋은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습니다.

자신에게 밤하늘의 별이 무엇일까를 생각했고, 주변을 살피던 중 원주민들과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여준 반응은 그녀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녀가 그들의 편물이라든가 도자기에 대해 흥미를 보이면, 그들은 여행자에게는 팔지도 않던 소중한 것들을 이것저것 마구 선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선인장, 난초, 여호수아 나무 등의 기묘한 모양을 연구했고, 사막의 식물들을 조사했으며, 사막의 낙조를 바라보기도 하고, 1백만 년 전 사막이 바다의 밑바닥이었을 무렵에 존재했을 법한 조개 껍질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변화시켰을까요? 모제이브 사막은 변함이 없고 인디언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변한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녀는 비참한 경험을 생애에서 가장 즐거운 모험으로 바꾸었고, 새롭게 발견한 세계에 자극 받아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그것을 소재로 해서 『빛나는 성벽』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출판 싸인회에서 그녀는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사막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너는 불행하다, 너는 외톨이다, 너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마귀의 소리도 들렸고, ‘너는 행복한 사람이다. 이곳으로 너를 인도한 사람은 나 하나님이다. 이곳에서 너의 새 꿈을 꾸려무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저는 마귀의 소리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서 오늘의 이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와 같이 행복은 우리의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 때문에 행복하고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마음가짐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마음은 몸까지도 다스리고 지배합니다. 덥다고 짜증을 부리면 몸도 마음도 상합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신경질을 부리면 나머지 가족들까지 신경질을 부리게 되고 부정적 바이러스는 모든 가족에게 번져서 기분을 망치게 됩니다.

'자살'이라는 글자를 반대로 하면 '살자'가 되며, 영어의 스트레스(stressed)를 반대로 하면 디저트(desserts)란 말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제패한 황제였지만 "내 생애 행복한 날은 6일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고, 헬렌 켈러는 "내 생애 행복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는 고백을 남겼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지으셨을까요? 성경은 세 가지 이유를 말합니다.

첫째는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랑을 나눌 대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청지기 직분을 맡기시려고 지으셨습니다.

셋째는 복을 주시어 그 복을 누리며 살라고 지으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누리고 살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영적인 삶이고,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삶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대로 행복하여야 합니다.

이해인님의 <1% 의 행복>이란 시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묻습니다.행복하냐고..

낯선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사는 제가 자꾸 걱정이 되나 봅니다.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 1%만 더 가지면 행복한 겁니다.

어느 상품명처럼 2%가 부족하면 그건 엄청난 기울기입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1%가 빠져나가 불행하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수치가 기울기 전에 약간의 좋은 것으로 얼른 채워 넣어 다시 행복의 무게를 무겁게 해 놓곤 합니다.

약간의 좋은 것 1%! 우리 삶에서 아무 것도 아닌 아주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평화로움, 따뜻한 아랫목, 친구의 편지, 감미로운 음악, 숲과 하늘과 안개와 별, 그리고, 잔잔한 그리움까지..

팽팽한 무게 싸움에서는 아주 미미한 무게라도 한쪽으로 기울기 마련입니다.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네 행복합니다"

[민수기 6:24~27]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
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가진 것에 감사하며 주님이 주신 복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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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로마서 8:14-16]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한 병사가 그의 형과 아버지를 전쟁 중에 잃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 농장에서 혼자 일하실 어머니를 돕기 위해 군 복무를 면제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군복무 면제의 탄원을 위해 상관으로부터 휴가를 얻었고 워싱턴에 도착하여 백악관에 가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낱 병사의 신분으로는 대통령을 만나기는커녕 백악관에 들어갈 수 조차 없었고,  백악관 입구를 지키는 보초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자네는 대통령을 절대 만날 수 없다네. 대통령은 매우 바쁜 분이고 자네 같은 사람들 만날 시간은 더더욱 없네. 전장으로 돌아가서 저 남군과 싸우게. 그게 지금 자네가 할 도리라네! " 그는 매우 낙심한 채로 그 곳을 떠나 근처 공원의 벤치에 가서 앉았습니다. 허탈감과 자신이 전장에 나가면 홀로 계실 어머님에 대한 걱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데, 그때에 한 어린 소년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군인 아저씨, 왜 그렇게 슬퍼 보이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

그는 이 어린 소년을 쳐다보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어 그 소년에게 자기의 사정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 소년은 그 병사의 손을 잡고 백악관으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백악관 정문으로 들어가서 보초병들을 지나고 장군들의 방과 장관들의 사무실들을 지나 대통령 집무실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 작은 소년은 심지어 문에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안에는 링컨 대통령이 국무장관과 함께 전쟁 전략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그 소년을 보더니, "무슨 일이니, 토드?" 하고 다정하게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 아빠, 이 군인 아저씨가 아빠에게 꼭 할 얘기가 있대요 " 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병사는 링컨 대통령에게 자신의 사정을 얘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군복무를 면제받고 홀로된 어머니를 도우러 농장으로 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잘것없는 나의 손을 잡고 감히 내가 쳐다볼 수도 만날 수도 없는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 나를 인도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나의 손을 잡고 하늘 아버지의 보좌 앞에 데리고 가서, " 아버지, 여기에 아버지와 얘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중간에 직속 상사나 장관이나 부통령을 거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님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예수님을 죄에서 건져주실 구원자로 믿기만 하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성령을 내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자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영어원문에는 “Abba, Father”라고 나옵니다. ‘Abba’는 본문 성경이 기록된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이 쓰던 아람어로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던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해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굉장한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자연스럽게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가 신기한 일입니다.

우리는 아무한테나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런 칭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는 증거이며,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인 대통령의 자녀만 되어도 여러 가지 특권과 혜택을 누리는데, 하물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얼마나 많은 특권과 혜택들을 누리며 살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한 우리가 누리는 권세와 축복...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사람이 사람의 자녀로 태어났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착하고, 성실하게 산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이 정하여 놓으신 법에 의해 다스림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법에 의해 지배 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자녀라는 인격적 관계로 대우를 받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좋은데 하물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나를 너무나 사랑해주시고 내가 언제든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ᆢ

✔또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천국의 열쇠, 천국행 티켓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죄가 많았든 적었든 전혀 상관이 없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면 그때부터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기도할 수 있는 특권과 기도의 응답을 받는 특권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직통전화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직통전화번호나 핸드폰번호를 안다면 얼마나 자랑하고 뽐내며 다닐까요? 우리가 대통령의 직통전화번호를 알고 불편한 것 필요한 것 다 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특권일까요?

[역대상 29:12]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또한 하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시편 17:8]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광야요 황무지입니다. 이 세상은 안락함과 평안함 대신 도처에 사나운 짐승같이 나를 위협하고 고통과 상처를 줍니다.

육체의 아픔과 상처는 치료할 곳이 있지만 마음의 상처와 병은 누가 치료해 줄까요?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제조 회사에 찾아가서 애프터 서비스를 받듯, 내 마음의 상처, 외로움, 우울, 슬픔, 좌절에 대한 치료는 나를 창조하시고 지으신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때 우리 영혼에 큰 기쁨과 평강과 자유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빛나는 것은 잘 살아서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 1] ~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내 것”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귀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환난 고통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같이 환난과 시련을 당할지라도 감당하게 하시고 반드시 이길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아였던 아이가 입양되어 따뜻한 가정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것처럼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태신자들이 예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영접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놀라운 권세와 특권을 누리며 인생역전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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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10:1-18)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의 삶의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두 종류의 양우리가 있었다. 첫째로 개인의 소유로 산간벽지에 작은 양우리가 있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셨는데 그곳이 이러한 양우리다.(눅2:8-14) 둘째로 마을마다 커다란 양우리가 지어져 있었다. 그것은 마을의 공동의 소유였다. 낮 동안에는 양들을 데리고 풀을 뜯게하고 밤이되면 여러 목자들이 양떼를 공동의 우리로 인도하여 우리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지기의 보호아래 두고 각기 집이나 잠잘곳으로 돌아갔다. 문지기는 문에서 절도나 강도, 들짐승의 출몰을 인하여 밤새 보초를 서게 된다. 아침이 되어 여러 목자들이 돌아오면 문지기는 목자를 한 사람씩 들여보내고 그 목자는 자기 양들을 부르게 한다. 양들은 그 음성을 듣고 자기 목자들을 따라 목초지로 인도되는 것을 보게 된다. 양을 몇 마리 가져왔는지 셀 필요가 없었다. 목자가 양을 부르면 그 목소리를 알고 따라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런 생활에 익숙한 자들을 향하여 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 말은 9장에 소경의 기적사건과 연결되어 있다.유대교지도자들은 눈뜬 소경을 회당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찾아와 자기를 분명히 드러내시므로 소경은 주님을 따르게 된다. 이를 배경으로 10장의 말씀이 주어진다. 참 목자와 거짓목자를 말씀하시고 양과 목자의 관계를 설명하신다. 서론을 이해하게 되면 요10:1-6절을 잘 소화할 수 있다.

1. 참 목자되신 주님은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10:1-6)

(1) 모든 사람은 목자 없는 양들로 묘사한다(마9:36, 눅15:1-7, 사53:6 벧전2:25)
양들의 특성을 보면 첫째로 보호받지 못한 상태가 되면 예를 들어 사자나 곰이나 늑대에게 발견되면 스스로 도망하거나 공격할 수 없으므로 그들의 먹잇감이 된다. 둘째로 양은 감각이 둔한 동물이다. 소나 개는 집을 잃으면 다시 찾아오지만 방향 감각이 둔한 양은 계속 방황하고 고생하게 된다. 셋째로 양은 주변머리가 없는 동물이다. 낙타는 멀리서도 물냄새를 맡고 독수리는 높이 있으면서 먹잇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양은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넷째로 양은 의존적인 존재임에도 고집이 센 동물이다. 따라서 양은 목자가 없이는 보호될 수도 필요한 양식을 공급받을 수도 없게 되므로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다. 죄인의 상태를 잘묘사해준다.

(2)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하여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 양들을 찾아 오신 것이다.
왜 양을 찾아 오셨는가? 첫째로 본래 양이 목자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 소중한 자녀를 잃어버리고 찾아 나선 경우도 있다.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엄마의 심정이 어떠할까? 가끔 TV에 37년 만에 아들을 찾는 극적인 상봉의 과정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 부모의 심정을 들으면서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둘째로 이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므로 목자없는 양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그 긍휼과 사랑의 풍성함 때문에 그 하나님 되심의 영광의 자리를 뒤로하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까지 찾아오신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 양에게 집중하고 끈질기게 전심전력하여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찾게 되는 것이다.

(3)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소개하신다. 
팔레스테인의 개인의 작은 양우리는 작은 울타리가 있고 목자가 밤에 문에 누우면 양들은 안심하고 자게 된다. 양이 밖으로 나오려면 목자를 밟고 나가야 하고 맹수가 우리에 들어오려면 목자를 밟고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문에서 누워서 자게 된다. 그런 문화적 배경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을 문이라고 소개하신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요14:6절에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시는 말씀과 같은 뜻이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10:7~9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문이라고 하셨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10절에도 자신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주님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고 11절에 말씀하신다. 그리고 16절에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하는 다른 양들은 구원받지 않은 이방인을 말한다. 오직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 일을 하신다.

2.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구원받은 양들의 풍성한 삶을 살도록 도우신다.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끝이 아니고 구원받고 나서 성장을 필요로 한다.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평생을 통해 자식을 양육하는 일을 하게 된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고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하여 이제 양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으로 그들을 양육하신다. 요10:9절에 구원받고 나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고 하셨다. 10:10절에는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한다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가 구원받고 나서 늘 주님으로부터 꼴을 먹고 주님 안에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여기서 풍성한 삶이란 무엇인가? 라틴어에 풍성이라는 어원이 ‘파도를 일으키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것은 파도가 일어나고 끊임없이 파도가 해변을 치는 모습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세계동안에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는 은혜의 풍성함을 말한다. 또한 풍성이란 헬라어는 수학적 의미로 추가분을 말한다. 예를 들어 요6장에 오병이어 기적에 열두 광주리가 남았을 때 쓰는 말이다. 주님 안에는 추가할 수 없는 풍성함, 부족함이 없게 된다. 풍성한 삶이란 첫째로, 시23:1절에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께서 나의 아버지요, 목자가 되시니 나는 부족한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것이다. 둘째로, 주님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므로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영육간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셋째로, 모든 원수의 핍박과 시험에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목자는 막대기로 맹수들을 공격하고 지팡이로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며 그들을 인도하신다. 넷째로, 모든 고난과 환란 가운데 함께 해주신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삶의 잔이 넘치도록 하신다. 이것은 세속적인 물질적인 풍성을 말하지 않고 주님께서 내게 채워지고 경험됨으로 오는 인격적인 삶의 충만이다. 

3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으로 돌보신다.

주님께서는 양들을 아신다. 자신을 통하여 낳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안다. 또한 자식들도 부모를 안다. 그래서 생명을 이어받고 그의 사랑으로 양육 받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품과 손때에 의해서 자식은 자란다. 또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른다.


(1) 목자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가 있는가? 
목자는 어떻게 양들에게 말을 하는가? 이것은 구체적으로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는 일을 하신다. 롬8:14절에 성령의 인도하신바가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자 안에는 성령님이 계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깨닫고 들을 수 있게 된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양은 죽은 양이다. 우리가 거듭난 확실한 증거는 목자의 음성이 하나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2) 목자의 말씀을 순종하며 따른다. 
우리가 주님의 양으로서 어떻게 순종하는가?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가정이나 직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힘쓴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내 음성을 따른다고 말씀하셨다. 요한일서에 보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주님을 모르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3)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참 목자는 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 롬8:32절에 자식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하신 그분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사랑으로 양들을 돌아보신다. 약하고 방황하고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돌아본다. 또한 선한 목자는 자기를 헌신하고 희생한다. 이해관계나 이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 목자는 숫자를 보지 않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해서 거기에 집중한다. 오늘 날 지도자들은 성공을 위해서 숫자에 약해있다. 또한 감정이 없는 지도자, 자기 이익을 위한 지도자들이 많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왕과 장군, 권력지향적인 지도자였다. 보수의 리더십이다. 그러나 주님은 섬김의 지도자셨다. 오늘날 지도자들은 감정이 없는 지도자이다. 위기가 오면 떠나버린다. 왜 사람들이 돼지를 키우는가? 돼지가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키우는 게 아니다. 결국은 먹기 위해서 키운다. 우리는 양들을 왜 키우는가? 털과 살을 팔아서 이득을 얻기 위해 키우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키우는가? 사랑의 특징은 요10:18절에 스스로 버린다고 말씀하신다. 스스로란 누가 시켜서 강요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것을 말한다. 감옥에 가고 핍박을 받고 죽음에 갈지라도 좋아서 사랑해서 하는 일이다. 타율적이 아니고 자율성에 의해서 하는 일이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교회에 나오고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고 차량봉사를 하고 모든 것을 자원해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는다. 욕을 먹고 손해를 보아도 기꺼이 하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이므로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놀라운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된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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