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는 '말씀에 일치'하는가?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십니다
모든 권세와 능력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녀에게 그 권세와 능력을 위임하셨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에 이 땅에서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시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실 때 하신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한복음 14:10)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든 일을 행할 수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곧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시는 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지성이면 감천’이란 식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마침내 들어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혼자 해서 안 되니까 무리로 모여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말씀에서 벗어난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도한다면 아무리 간절히 기도하며 금식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어주시지 않을 뿐더러 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이 스스로를 부정하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은 믿지만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 알려주신 성경의 말씀은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미 이루신 것들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고, 우리는 그 말씀이 이 땅에 실체로 나타나도록 말씀을 집행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지금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할지 말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이 이미 이천 년 전에 이루신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주님은 어처구니없어 하실 것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로새서1:14)

자신이 죄를 짓고 난 후에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죄책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딱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진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모든 피조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우리는 여전히 구약적인 사고방식 아래서 하나님 대신 우리가 나서면 죄를 짓는 것이고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일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거나 ‘모든 일은 주님이 하신다’, 심지어 ‘주님이 모든 일을 하셔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미 허락하신 일조차도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은 무조건적이고 자동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분의 자녀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상속자로서 이루어가야 할 업입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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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도전 ㆍ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마십시오

▶️갈렙은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85세가 되었다고, 늙었다고 은퇴하고 편하게 여생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믿음의 사람으로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과감하게 도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갈렙은 자신이 85세가 되었지만 40세 때와 같이 강건하여 싸움에 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여호수아 14:10,11)
여호수아에게 허락만 해주면 자신이 올라가서 그 산지의 거인들을 쫓아내고 산지를 차지하겠다고 합니다

도전하는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도전하는 인생은 개척의 깃발을 휘날리는 인생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해 열린 삶을 삽니다

남이 해주기만 바라는 사람은 기껏해야 그 사람이 해주는 만큼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감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굶어 죽든지 떨어지는 감에 맞아 죽을 뿐입니다
그러나 감을 따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배를 불릴 뿐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만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도전하십시오


85세의 갈렙이 “나는 이제 늙을 만큼 늙었으니 너희들이 대신 싸워다오
하지만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니 반드시 내게 넘겨다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남에게 맡깁니까?
스스로 도전합니다
도전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찾습니다

그런데 옛날 생각만 하면서 푸념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좀 더 배웠으면…’, ‘운전만 잘했으면…’, ‘조금만 건강했으면…’, ‘10년만 더 젊었어도…’, ‘조금만 일찍 사업을 시작했으면 나도 뭐 좀 할 수 있을 텐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마십시오
지금의 상황과 조건에서 도전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고 가슴에 뜨거운 비전이 있다면 겁낼 것이 무엇입니까?

조건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도전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등 뒤에 계십니다
어디를 가든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1950년대 미국에 오랫동안 해온 사업이 완전히 실패하고 빈털터리가 된 65세 노인이 있었습니다
수년간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남은것이라고는 집 한 채와 낡은 자동차, 은퇴 보장금 105(12만원정도)달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한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요식업을 하면서 터득한 요리 비법을 한 가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65세라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빈둥대고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녹슬어 사라지기보다 다 닳아빠진 후에 없어지겠다''

노인은 자신의 요리법을 사줄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 천 번이 넘는 문전박대를 당했지만 마침내 후원자를 찾았고 켄터키주에서 치킨 전문점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사업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점차 그 가게가 켄터키주뿐 아니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세계 각처에서 성업하게 되었습니다


이 가게가 바로 유명한 패스트푸드 업체 KFC입니다
그리고 KFC 입구에 서 있는 할아버지 상이 바로 그 노인, 커넬 샌더스입니다

제 어머니가 한번은 그 노인상이 왜 치킨 가게 앞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답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꿈을 갖고 도전해서 전 세계에 치킨 가게를 성공시킨 할아버지예요''

도전하는 인생은 성취하는 인생이자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어려운 상황에서 움츠러들 때 외쳐야 할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잊고 자신의 무능함만 부각될 때 반드시 기억하고 소리쳐야 할 외침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생각하면서 외치십시오
어떤 압력이나 회유에도 굴복하지 않고 도전하면서 “이산지를내게 주소서”라고 외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인생에 약속하신 복된 산지를 얻게 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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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https://youtu.be/_fZrRer3O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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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심판과 노아의 믿음과 방주가 주는 교훈(창 6-7장)


   노아홍수의 성경적 의미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첫째로 홍수는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심판이요 인간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심판한 것이다. 인간의 교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 무서운 진노 가운데서 한 가정을 구원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신다.
셋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임한다. 노아 홍수는 단순한 과거의 사건만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1. 노아시대 영적 도덕적 상태는 어떠한가?
(1) 택한 백성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6: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온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경건한 아벨과 셋의 후손으로 본다. 그들이 타락한 가인의 후손들이 누리는 삶을 보고 그것에 성별되고 저항하는 삶을 살기보다 세속적인 삶을 따라가는 것을 본다. 5장의 가인의 후손들의 삶을 보면 찬란한 문명과 문화의 발달과 함께 세상을 재미있게 잘 살고 마음껏 누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없이도 저렇게 잘 살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이 그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허구한 날 아벨처럼 피의 제사를 드리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주일예배를 드린 것과 같다. 또한 세상 사람들 중에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아름다운 여인들을 보고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들로 아내를 삼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로 얘기하면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는(고후6:14) 불신결혼과 같다. 또한 자기가 좋아하는 여러 여인들을 아내로 삼는 가인의 후손들처럼 일부다처가 들어오고 있었다. 성의 타락은 그 시대의 영적 도덕적 상태를 가장 잘 보여준다.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직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말씀을 떠나므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게 된 것이다.하나님이 주신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행복을  쫓다가 6: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아니하는 벌을 받게 된다. 오늘날 성도들의 위기는 서서히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고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돈과 세상지위와 쾌락이 크게 보이므로 그것을 쫓아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노아시대는 이런 세속주의가 보편화되어 극에 달하고 있었다.
 
(2) 그 시대는 무정부사회가 되고 있었다.
6:4절에 네피림이 나온다. 그들을 용사라고 했고 명성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것은 영웅주의를 말한다. 그들은 살인과 폭력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지금은 어느 시대보다 권력과 힘을 숭배하는 시대다. 그것이 돈의 권력이 되었든 정치권력이 되었든 힘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곳에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3) 이러한 타락을 보고 하나님께서 한탄하신다.
6:3절에는 하나님의 신이 사람을 떠나고 그들의 연수를 120년으로 한다. 또한 6:5절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고 근심하사 지면의 모든 창조한 사람과 피조물을 쓸어버릴 것을 작정하신다.
 
2.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5:29절에 노아라는 이름은 안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노아가 의인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가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끊임없이 실수와 범죄를 하게 된다. 노아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다른가?


(1)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타락하여 살고 싶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개입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의 언약을 그에게 주셨다. 히11: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집을 구원하였다. 여기서 의인은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완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의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경외함과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히브리어의 순종이란 온 인격으로 청종한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태도를 보였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지연하는 경우가 있다. 그 시대는 비가 아직까지 오지 않은 때였다. 그 시대의 상식과 과학과 이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방주짓는 일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은 조롱과 회유와 핍박을 하였다. 노아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큰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말씀을 굳게 붙들고 타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고 말씀에 이끌려 살아갔다. 그것이 노아가 의인이란 얘기다.
 
(2)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가까이하고 교회생활을 가까이하는 자는 세상과 죄에서 멀어지게 된다. 죄란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6:12절에 하나님이 보신즉 세상이 부패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이 죄를 어떻게 보셨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면 죄다. 사람은 자기기준과 판단으로 죄를 정의한다. 자기 나름대로 각자생각에 살고 있다. 6:13절에 이런 죄악된 세상을 멸하기로 말씀하신다. 과거에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였지만 역사의 마지막에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다(벧후3).


3. 홍수의 심판과 노아방주로 인한 그의 가족의 구원
(1) 하나님께서 노아가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방주를 지을 것을 명한다.
방주의 규격을 자세히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설계도를 보여주신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말씀 하신대로 백여년 동안 그 설계도대로 방주를 짓게 된다. 6:22절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말씀하신 그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그 말씀에 충실하게 방주를 지었다.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기도 하다. 그시대에 사람을 구원할 방법은 방주밖에 없었다. 주님만이 인간의 유일한 구원자이시다(요14:6, 행4:12). 또한 이 방주에는 오직 문이 하나만 있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문이시다(요10). 또한 이방주의 창도 하나만 있었다. 빛이 들어오는 것은 창이듯이 주님만이 우리에게 빛이 되신다(요8:12). 상중하 3층이듯이 믿음의 수준이나 분량이 다 다르다. 방주안에 여러칸들이 있듯이 주님을 믿는 신앙의 스타일이 다 다르다. 방주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다 들어갔듯이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그리스도안에 들어올 수 있다. 방주는 가장 안전한 배인 것을 현대조선전문가들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방주안은 그리스도안이고 방주 밖은 그리스도밖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정죄와 심판을 면한다(롬8:1). 그시대 물은 하나님의 심판용이요 또한 그 물이 우리를 구원하는 물이 되었다(벧전3:20-21).
 
(2) 하나님 말씀대로 노아 600세되던 해에 홍수가 있게 된다.
노아 가족8명은 방주로 들어가고 정결한 짐승 부정한 짐승 새들이 다 방주로 들어가고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다. 7:16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마감된 것이다. 지금도 주님의 때가 다 되어가고 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문이 닫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주에 몰려와 애원하고 탄식하고 후회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방주안에서 노아가족은 방주가 흔들리고 천둥과 비가 쏟아지는 소리에 마음의 요동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 방주안은 가장 안전한 곳이다.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붙들면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무엇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것에 소망을 두거나 만족할 수 없다. 주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참된 행복과 평안은 주님안에서만이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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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어쩌지?"


오래 지속되는 결혼생활의 중심에 있는 ‘헌신’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해봅시다

이 두려움은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는 두려움, 곧 거절에 대한 두려움과 정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너무 성공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헌신이 자유의 상실과 너무 많은 책임을 동반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결혼한 후에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어쩌지?
그럼 난 꼼짝 못할 텐데!” 
“내가 결혼한 사람이 내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면 어떡하지?
난 실수하고 싶지 않아”

블레인 스미스는 헌신의 두려움이 흔히 나타나는 네 단계를 제시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어떤 식으로든 이것을 목격하거나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탈옥하듯이 커져가는 관계에서 매우 극적으로, 급하게 탈출합니다
관계 속에 갇혀버렸다는 생각이 밀려오면 공포에 질린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의, 혹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변덕스러운 관계의 유형을 통해 그들의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헌신이 약화되면 그들은 다시금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관계가 헌신을 향해 나아가면 또다시 의심이 그들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고, 곧 그들은 후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반대 감정이 병존하는 것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헌신에 대한 두려움이 결혼에 대한 갈망의 수준과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관계는 진지하지만 결혼에 대한 논의는 보통 ‘가능성’의 영역에 속합니다
결정은 언제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결국’이라는 단어가 두 사람을 결속시키지만, 관계가 일정 수준을 벗어나면 그 사람은 두려움에 얼어붙고 맙니다

수년 동안 이런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마지막 단계는 정상적인 불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결혼에 대한 갈망이 헌신에 대한 두려움을 능가합니다
이 두려움은 당신이 관계를 명확히 바라보고 어쩌면 긍정적인 성장의 단계들을 밟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헌신을 통해 관계를 영구적으로 이어가는 것에 관하여, 미묘한 “…하면 어쩌지?”란 생각의 싹이 우리의 마음속에 침범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혼한 후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면 어쩌지?”,
“이것이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어쩌지?”,
“헌신했는데 관계가 잘못되면 어쩌지?”,
“헌신했는데 상처받으면 어쩌지?”
끊임없는 “…하면 어쩌지?”라는 질문들이 결혼생활을 강건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헌신과 친밀감을 방해합니다

팀 티몬스와 찰리 헤지스는 세 가지 중요한 헌신에 대한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째, 사랑을 주었으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는 만큼 사랑받기 원합니다
그리고 결혼생활에서 받지 못하고 주기만 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이용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헌신을 억제합니다
특히 한 사람이 자신의 개인적인 정보를 다 알려준 후에는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셋째, 헌신을 방해하고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가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버림받는 것은 궁극적인 형태의 거절입니다
과거에 버림받은 적이 있는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항상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어 미래의 헌신을 막습니다


당신 자신이 어떤 경우에 해당하는지 알았는가요?
당신이 헌신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다면 결혼할 때 포기하거나 잃을 것 같은 것들을 모두 적고 평가해보십시오

당신은 정말로 그것들을 완전히 포기할 것인가요?
당신이 잃을 것들에 대해 슬퍼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것들과 작별을 고하고, 이제 당신이 얻게 될 모든 것과 새롭게 인사하십시오

-내게 꼭 맞는 배우자 찾기, 조언.H. 노먼 라이트-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세기 2장 24, 25절)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 3장 18, 19절)

주님,
상대방에게 헌신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 있는지 알게 하시고 그것들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함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헌신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점검해보세요>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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