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뺄셈에는 놀라운 계획이 있다!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는 1930년대 이르러 늑대가 사라졌습니다
엘크와 가축을 해친다는 이유로 계속 잡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늑대가 사라지자 늘어난 사슴이 풀과 나무를 먹어치웠습니다
숲이 황폐해지고 먹이가 부족해졌고 사슴은 강가의 나무까지 먹기 시작했습니다

강가의 나무들이 무너져 내리자 강에 살던 비버들도 굶주리게 됐습니다
비버들이 만든 댐이 강물을 가둬주는 역할을 해서 항상 나무에 수분이 공급되곤 했는데, 그 댐들이 없어지면서 강가는 더욱 황폐해졌습니다
그러자 홍수가 점점 잦아지고 토양이 쓸려 내려갔고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모습은 점점 참담해졌습니다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미국 정부는 캐나다에서 늑대를 들여와 풀어주기에 이르렀고 다시 늑대가 사슴을 잡아먹기 시작하면서 사슴의 숫자는 급격히 줄었고 강가의 작은 나무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만드신 생태계에 필요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늑대같이 해로운 존재라고만 생각되는 동물도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빼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생각으로 우리 인생에 해로운 것들이니까 그냥 빼버려야 한다고 판단해서 인위적으로 빼버리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나 
그래서 하나님도 그런 기도는 응답해주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빼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픔이 오히려 은혜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육체의 가시’라고만 표현할 뿐 정확히 그 병명을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을 몹시 고통스럽게 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세 번씩이나 이 병을 자기 몸에서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몸이 건강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몇 배나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번번이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2:9)

나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뺄셈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있는 병이 사역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약함이 사역의 디딤돌이라고 하셨습니다

▶️병약한 육체로 인하여 바울은 자기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을 온전히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동역자와 팀워크를 이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항상 겸손해야 했고, 항상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그런 겸손과 기도를 통해서 더 크게 역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같은 원리가 사람을 대할 때도 적용되는데, 우리는 인간적인 눈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빼선 안 됩니다

⭕세상적 선입관을 보고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는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에 이새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선지자 사무엘이 집으로 찾아와 “너의 아들 중에 한 명을 하나님께서 다음 왕으로 기름 부으실 것이니 아들들을 다 데려오시오”라고 했을 때, 이새는 일곱 명의 아들만 도열시켰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는 막내 다윗은 아직 어리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아예 후보에서 제외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뺄셈에 동의하지 않으시고, 굳이 다윗을 찾아 데려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이 말씀에서 ‘외모’는 단순히 육체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서 흔히 사람을 평가할 때 사용되는 기준인 학벌, 인맥, 스펙 같은 세상적인 조건들을 다 포함합니다

가만 보면 우리 부모도 자식들을 평가할 때 외모로 봅니다
그래서 ‘이 아이는 크게 될 아이지만, 저 아이는 자기 앞가림이나 하면 다행’이라고 섣부르게 판단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함부로 제외한 자녀를 다윗처럼 찾아서 역사의 중심으로 세우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전에 함부로 우리가 사람을 제외해선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볼 때도 세상적인 눈으로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됩니다
인간적인 조건이 별 볼 일 없다고 해서 ‘저 사람은 없어도 될 사람’이라면서 우리 마음대로 함부로 사람을 제외해선 안 됩니다

때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세상적으로 보잘것없는 것 같은 연약한 형제자매들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큰 도전과 은혜를 받곤 합니다
어찌 보면, 보이지 않는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몸의 장기 중에서 중요한 부분들은 다 속에 들어가 있고 갈비뼈가 겉에서 보호해주고 있지 않은가요?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꼭 필요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하나님 손에서 모퉁잇돌이 됩니다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22, 23절)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장 19절)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내가 속한 조직과) 교회 공동체 내에서 세상적인 눈과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하지 맙시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를 제외시키지 맙시다
약한 형제자매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도전하게 하시고 은혜받게도 하심을 꼭 기억하십시오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떠오르는 지난 행동들이 있다면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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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인생을 위한 덧셈과 뺄셈..


[베드로후서 1:5~7]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어떤 철학자가 공원에서 해가 떨어졌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벤치에 앉아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공원지기가 청소를 하다가 물었습니다.

“당신 누구요? 어디서 왔소?”

그때 철학자가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겁니다. 내가 누구지요?”

어떤 한 사람이 어두운 굴 속에 들어가 굴 입구를 막아버리고 작은 구멍으로 먹을 것을 받아서 살았습니다.

몇 년 뒤 그 사람이 나오자 사람들은 그 사람이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어떤 위대한 발견을 했는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굴속에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그곳에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마음은 이 동굴보다도 훨씬 더 어둡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철학적 인문학적 질문은 피하고 싶지만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절대 나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로보트를 만들었는데 그 로보트가 주인을 몰라보고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고 자신이 왜 존재하는 지를 스스로 알아내려고 한다면 과연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사춘기 자녀가 혼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몰라보고 무시하고 반항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찾고자 한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피조물인 우리는 나를 만드신 창조주에게 물어야 합니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는 우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아래 존재하는, 천하보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도를 닦거나 고행 속에서 찾으려고 하거나, 재물, 명예, 권력, 인기, 쾌락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밖에서 이룬 것들은 허무함 밖에 없으며 어느 한 순간 다 무너지는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어느 샐러리맨이 30년 동안 자기의 삶을 정확하게 하나하나 기록을 했습니다.

30년을 환산해보니 총 10,950일인데, 잠자는 시간이 3,505일이었고, 괴롭고 힘들고 어렵고 불평불만을 하면서 고민하며 살았던 시간이 1,596일, 담배 피우는 시간이 1,140일, TV를 본 날이 775일, 먹는데 보낸 시간이 678일,

남을 흉보고 욕한 것이 442일, 술집에서 보낸 시간이 266일, 게임이나 도박판에서 258일, 그리고 나머지는 인터넷, 각종 모임, 관혼상제.. 등 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1년을 이렇게 나누어 본다면 어떻게 나올까요?

우리는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멋있고 훌륭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아름답고 멋있고 훌륭하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요 하나님이 택하신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자신도 행복하게 사는 아름답고 멋진 인생을 살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름다운 인생, 훌륭한 인생을 살수 있을까요?

어느 목회자는 인생의 덧셈과 뺄셈을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 내용을 공유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필요한 여러 지식들, 능력, 부지런함, 성실, 진실, 사명, 겸손을 더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주인으로 나를 구원해주실 구원자로 믿는 믿음을 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망을 더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 중에 기뻐하며 인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더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행복하여 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더하여야 합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더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을 살려면 뺄 것들은 빼야 합니다. 무엇을 빼어야 할까요?

내 삶의 죄를 빼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가 무슨 상관이냐? 현재만 바르게 살면 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더럽혀진 옷을 빨지 말고 지금부터 더럽히지 않고 살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지난 죄는 인생을 추하고 병들게 하고, 영혼을 어둡게 하며, 양심을 더럽게 합니다. 죄는 인생에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심판이 있기 때문에 죄를 빼어야 합니다. 죄는 무거운 짐이요 많은 부채이기에 빼어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섭고 더러운 우리의 모든 죄를 빼어 버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면 자신의 인생에 있는 모든 죄를 빼어 버릴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교만을 빼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며 교만은 마귀의 본질입니다. 교만은 죄와 불순종의 원인입니다.

욕심을 빼야 합니다.

기독교는 가난을 미덕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부를 죄로 보지 않습니다. 탐심, 과욕을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욕심은 하나님보다 물질을 제일로 두는 마음, 자기만 생각하는 탐심,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욕심은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진실을 볼 수 없게 하고 자신과 자신의 미래도 보지 못하게 눈을 어둡게 합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분노를 빼어 버려야 합니다. 분노는 공들여 쌓아 놓은 인생과 인격과 신앙을 무너지게 합니다. 분노는 타인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사냥하는 활이요 타인과 자신의 인생을 찌르는 무서운 칼입니다.

저주와 악의적이며 부정적이고 추하고 더러운 말을 빼어 버려야 합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기에,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에게 무익한 저주와 악의적인 말 부정적인 말 추하고 더러운 말은 버려야 합니다.


아름답고 훌륭하고 멋있는 행복한 삶이 되지 않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더할 것은 더하고 뺄 것은 빼어 버리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
(-) 과한 욕심을 버리고
(÷) 작은 것이라도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 편견 없이 동등한 생각과
(↕) 너무 교만하거나 비굴하지 않게
(♬) 찬양 가운데 마음의 즐거움을 느끼며
(♥) 진실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나누면서
(--) 염려 근심 걱정은 다 주님께 맡기고
(^^) 활짝 웃는 미소 띤 얼굴로
(⇒)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며
(,) 쉼표가 있는 자리에서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 느낌표가 있는 자리에서는 주님과 내가 하나되고
(?) 물음표가 있으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주님을 더욱더 의지하며 끈기와 인내와 믿음으로 파헤쳐 나가는 가운데
(.) 잠들기 전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마침표를 찍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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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수학 공식


5+2=7
5+2=5000+12

이 수학 공식에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요? 
7인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믿음 없이 보고한 열 명의 정탐꾼에 속합니다
가나안 땅은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젖과 꿀이 흘렀습니다
아름다운 땅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 땅의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메고 왔을 정도였습니다

열두 정탐꾼의 보고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했습니다(민수기 13,14장)

▪첫째, 여리고를 비롯하여 우리가 정복할 성읍들은 난공불락의 요새이며 환경적으로 정복이 불가능합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여리고 성벽 위로 전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밑에서부터 굉장히 두껍게 쌓아올려진 성이었습니다)

▪둘째, 그 땅의 족속들의 군대가 너무 강하여 군사적으로도 우리는 절대적 열세입니다

▪셋째, 그들 중에는 아낙 자손인 거인족이 있습니다

그들에 비하여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신장 면에서 절대적 열세입니다
(아낙 자손인 골리앗의 키는 2.7-3.1미터였습니다)

이 보고를 정리하면, “환경적, 군사적, 신장 면에서 정복 불가능”입니다
이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이때 함께 정탐했던 갈렙이 말했습니다

“잠깐만 내 말을 들어보라
열 명의 보고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계산이 잘못되었다
내 하나님께서 ‘능히 그 땅을 취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말씀하신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 말고 올라가 그 땅을 취하자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민수기 13:30, 14:6-9 참고)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이 더욱 완악하여져 돌로 갈렙을 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너희 열 명의 정탐꾼들은 너희 믿음대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말을 듣고서 내 말을 믿지 않고 거역한 백성들도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다음 세대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갈렙은 그의 믿음대로 들어가 그 땅을 취할 것이다”
(민수기14:10-24 참고)

믿음이 무엇인가?  내 한계를 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5+2=5000+12 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대답은 주님의 능력을 이 땅으로 끌어오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참고로 5+2=5,000+12 는 마14:18-21의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 넘게 먹이시고 12바구니가 남은 기적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믿음이란 내 소원을 이루는 것도, 내가 바라는 걸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믿고, 내가 할 일에 순종하며 말씀하신 그분이 이루심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장 23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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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 요셉(창 37,39)


요셉은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였다. 그러나 요셉이 다른 것이 있다면 고난과 시험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사게 된다. 아버지의 편애로 채색옷을 입게 되고 이로인해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받게 된다. 또한 형들의 허물을 보면 고자질하므로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계시한 꿈으로 인하여 형들의 분노를 사게 된다. 우리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각자의 꿈이 있다. 개인의 사욕이나 세상적 야망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람을 향한 꿈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성취되는 방법이나 과정은 만사형통이 아니다. 실제로 성도의 삶은 수많은 어려움과 시련, 도전과 좌절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꿈이 성취되는 것은 평탄하고 형통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의 과정을 통해서 이뤄진다. 요셉이 17세 소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을 만나러 간다. 형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고 하나같이 죽이자고 한다. 그래서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아버지를 속인다. 르우벤이 살리고자 하였고 유다의 제안으로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리게 된다. 그로 인해 요셉은 애굽의 바로의 신하 보디발에게 팔리게 된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요셉이 어떻게 믿음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성품을 닮은 자가 되었는가?
 
1. 귀공자의 신분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다.
요셉은 사랑을 독점하고 채색옷을 입고 부러울 것이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루 아침에 채색옷이 벗겨지고 노예옷을 입을 신세로 곤두박질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향한 첫발걸음이 시작된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다운 아들이 되기 위한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주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온실이 아닌 광야로 밀어내신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은 그가 왕이 되어 모든 사람에게 절을 받고 영광의 대우를 받는 자리였다. 그러나 꿈과는 전혀 다른 냉혹한 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도 아닌 혈육의 형제들이 노예로 파는 고통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을 등지고 머나먼 이국인 애굽으로 던져진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겠는가? 창39:1절에 요셉이 이끌려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는 형들을 도우려 도시락을 들고 갔다가 구덩이에 던져지고 사방으로 막힌 그 구덩이에서 벌벌 떨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그 과정에서 요셉은 형들에게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는 쇠고랑에 묶인채 가격표가 달린 노예로서 비인격적인 수모와 수치와 굴욕을 당하게 된다. 그는 평생 노예로 일하다가 죽게 된다는 긴장속에 누가 자기의 주인이 될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최고의 예우를 받다가 인생의 밑바닥에 내쳐지는 최악의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리하여 보디발의 집에 팔리게 되었다. 그도 인간인지라 처음에는 잠 못이루는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가슴에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분노로 벌떡벌떡 일어나면서 복수심과 증오심에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감정을 다루지 못하면 두가지 극단적인 증상이 나타나는데 첫째는 분노와 증오 복수심의 감정이 정서를 파괴하고 무섭게 괴팍하고 변태적이고 황폐화된 괴물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둘째로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를 공격하고 스스로 자신의 감옥에 갇혀 좌절과 낙심과 비관과 자살에까지 이를 수 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과는 정반대의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요셉이 노예생활에 잘 적응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범사를 인정하고 범사를 감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길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다(잠3:6). 우리는 환경이 뒤틀리고 어려워지면 이렇게 된 원인이 형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형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하소연할 수 있다. 이렇게 타인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된 자신을 탓하고 괴로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믿는 성도들은 고난앞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요셉은 최악의 조건과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적응하고 그리스도인 노예로서 삶앞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도망가지 않고 고집과 자존심을 세우지 않고 한줄기 하나님이 주신 꿈과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붙잡고 이 상황앞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 한줄기 빛이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종노릇을 충성되이 하므로 보디발이 가정의 총무를 맡게 한다. 그리고 그 보디발의 가정에 하나님의 복을 허락하신다. 우리도 우리가 처한 가정, 교회, 직장과 일터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간증을 드러내고 있는가? 당신이 오므로 우리의 교회와 직장이 더 큰 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것이 그를 모든 삶에 성실하고 충성된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2. 고난보다 더 무서운 성적유혹을 이기므로 순결한 사람이 된다.
(1) 요셉에게 성적 유혹이 언제 찾아왔는가?
 
청년요셉에게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신분적인 노예로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성적 유혹이 찾아온다. 당시 고대에서는 여 주인이 남자 노예를 성적노리개로 사용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그 여인은 그 집 주인이므로 권력자의 유혹을 거스리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었다. 또한 그는 가정과 고향을 떠나 힘든 시간을 거쳐 이제 안정을 되찾고 기지개를 켤 시기였다. 사람이 가정을 떠나면 유혹이 더 강렬해질 수 있다. 또한 그는 피끓는 청춘이었다. 또한 이 여인의 유혹은 집요하였다. 결정적인 것은 그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 유혹이 찾아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적 욕망의 유혹은 승리한 사례가 많지 않다.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었던 삼손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도 성의 유혹앞에 넘어지게 된다.
 
(2)그렇다면 요셉은 이러한 시험을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가?
첫째로 그는 창39:9절에서 어찌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리이까? 이것은 하나님앞에 죄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보고계신다는 그의 믿음이 그를 유혹에서 이기게 한다. 또한 이것은 악이라고 하는 분별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들어오면서 성의 대한 개념도 혼전, 혼외성관계를 죄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시대를 초월해서 그것은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요셉은 그것은 하나님앞에서 큰죄라고 말한다.
둘째로 요셉이 그 유혹을 이길수 있었던 것은 창39:9절에서 보디발 주인이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기지만 아내만큼은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주인을 배반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우리도 내 남편, 내아내와 자녀와 성도를 배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다면 우리는 범죄에서 자신을 지킬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범죄율이 높은 경우는 가족이 없는 경우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셋째로 그는 당장의 쾌락보다는 그 결과가 어떠할 것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죄와 정욕의 노예로 전락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넷째로 딤후2:22절에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정욕을 피하여 도망갔다. 정욕을 대적하면 다 넘어진다. 그는 유혹이 왔을 때 옷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여기 피하다는 단어가 맹수나 더러운 것을 피할 때 쓰는 말이다.
다섯째로 요셉이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다. 일에 성실한 사람은 그만큼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여유가 없다는 말이 있다. 청교도들은 게으른 마음은 사단의 공작이라고 하였다. 성도가 가정과 교회와 직장일에 성실한 사람은 타락하지 않는다. 그가 신분은 노예였지만 그의 중심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한 신분에 자존감과 정체성을 가지고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게 하였다. 요셉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의 삶을 이렇게 순결하게 하는 것이었다.
 
3. 유혹에 승리한 결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다.
이럴 때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사랑하는 형들에게 배신당하는 고통도 고통이고 노예복을 입고 종살이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자신의 믿음과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혹을 이기고 나서 그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기약없는 감옥속에 들어갔을 때 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럴때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과 신실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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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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