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능력으로 쓰임받는 일꾼이 되게하소서


[고린도후서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 떠돌이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농촌의 조그만 마을에서 자란 소년은 전원풍경을 백지에 그리며 가난했어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소년의 크레용에서 어느 날엔 시냇물이 흘러나왔고 파란하늘도 펼쳐졌으며 풀들도 부드러운 바람에 춤을 추곤 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뒤 신문 배달을 하던 소년은 신문 만화가를 꿈꾸며 남몰래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에게 만화는 보석이었고, 꿈이었고, 자존심 이었습니다.

소원대로 소년은 자라 신문사 만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의 야심작과 자존심을 담당국장이 날마다 평가절하하며 퇴짜를 놓았습니다.

"이걸 그림이라고 그리나? 차라리 그만 두는 게 어떨까?"

늘 이런 소리를 듣던 그는 급기야 어느 날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며 일했던 곳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실의에 빠진 채 갈 곳을 몰라 방황하다가 고향인 농촌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한 교회의 지하창고를 빌려 쓰며 잡일을 했습니다.

지하창고의 어둠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상처를 받은 그는 창고를 뛰어 다니는 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예쁘고 친밀감 있게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쥐는 더 이상 징그러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니 다정한 친구이자 말벗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그림이 ‘미키마우스’이고, 이 젊은이의 이름이 바로 월트 디즈니(Walter Elias Disney, 1901~1966)입니다.

그는 미키마우스를 만든 다음, 백설공주, 메리 포핀스, 신데렐라, 피노키오, 피터팬, 토이 스토리, 라이언킹, 알라딘, 미녀와 야수 등과 같은 수많은 만화 영화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는 애니메이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거장 중 한 명이며 전 세계 대중문화 예술의 상징 중 한 명이자 미국 문화의 전설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을 실현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모든 것이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극한 고통과 시련을 만날 때 더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악성 베토벤은 청각 장애를 이기고 감미로운 불후의 명곡을 남겼고, 존 버니언은 얼음장 같은 감옥 속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고, 파스퇴르는 반신불수 상태에서 질병에 대한 면역체를 개발했으며,

에디슨은 청각장애자였으나 축음기를 발명했고,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시각장애인임에도 깊은 신앙과 깊은 영성으로 ‘실낙원’을 저술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지체장애인이었으나 미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보물섬의 작가 스티븐슨은 결핵 말기의 고통 속에서 명작을 집필했고, 테레사 수녀는 평생 자신을 괴롭힌 만성두통을 참아가며 사랑을 베풀었으며, 파스칼은 청년 시절부터 괴롭힌 온몸의 통증을 이겨내고 ‘팡세’를 남겼습니다.

선교사 마틴은 폐결핵과 악전고투하며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프랑스의 화가 르느와르는 류머티즘의 고통을 이기며 그림을 그렸고,


구세군운동을 주도한 캐더린 부스는 “내 삶에 있어서 단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세상을 빛낸 훌륭한 예술가나 과학자, 음악가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재이거나 처음부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4세 때까지 말을 못했고 7세가 될 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작곡가 베토벤의 음악선생님은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는 아주 절망적이야!”라고 평가했으며,

발명왕 에디슨은 어렸을 때 그의 담임 선생님에게서 “저능아로 배울 수 없는 아이”라는 핀잔을 들었고,

성악가 카루소는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네 목소리를 가지고는 절대로 성악가가 될 수 없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여러 장애와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움과 시련과 연약함을 딛고 일어서서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달란트로 놀라운 잠재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육체의 장애와 인생의 고난, 어려운 환경과 상황 앞에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계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자존심 상하게 하는 여러 말들에 상처받아 낙심하고 계시나요?

우리 인생의 주인은 상처를 준 사람도 아니고 지금의 앞이 안보이는 상황이나 고난이 아닙니다.

[신명기 11:14~15]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앞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함 그 자체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길을 준비하시는 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앞서 가셔서 먼저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역사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심히 고통스럽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꽃이 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으로 주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한다면 연약한 우리도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름답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붙들려 위대하게 쓰임 받길, 그리고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함으로 끝까지 아름다운 인생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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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 (롬 7:1-13)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성경이 로마서라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장이 로마서 7장이라고 한다. 로마서 7장은 율법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로마서 6:14절에서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과 나의 관계가 주종관계가 아니고 부자관계와 같은 것이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법에 의해서 성립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사랑과 은혜로 맺어지게 된다. 율법아래 있는 노예, 하인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늘 법에 의해 시달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시는 부모님과의 관계는 우리의 실수와 넘어짐과 연약과 허물들에 대하여 죄를 다루는 검사처럼 하지 않는다. 때로 징계는 할 수 있지만 철저한 사랑으로 품고 기다리며 우리를 사랑으로 대한다.죄는 율법을 통하여 힘을 발휘한다. 법이 없을 때는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죄의 권능은 율법이다. 죄는 율법을 만나면 죄인을 철저하게 사로잡고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을 7장 전체에서 다뤄주고 있다.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았다. 우리는 단번에 영원히, 온전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안에 여전히 죄의 본성(세력,권세,뿌리)이 남아있어서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죄에 시달릴 수 있다. 구원받은 성도가 죄를 범하면 자유롭거나 평안하지 않다. 그 때 죄는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정죄하고 송사하고 참소한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로마서 7장 4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법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효력을 발휘한다. 죽어버리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7:1~6)
사도는 영적 연합에 대하여 계속 말하여 왔다.

첫째로 5:12-21절에서 아담안에서 태어나 죄와 사망의 지배아래 있었다. 이 운명을 바꿀수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안에서 은혜로 거듭남으로 의와 생명의 통치아래 있게 되었다. 대표성의 원리로 연합하였다 
둘째로 6:1-14절에서 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요 신분이다. 
셋째로 6:15-23절에서 전에 죄의 노예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종이 되었다. 이렇게 신분을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값을 지불하는 구속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의 의의 종이 되었다. 
넷째로 한번 결혼하면 그 관계를 깨는 것은 어렵다. 7:1-6절에서 우리는 출생으로부터 율법남편과 결혼한 운명의 상태였다. 7:4절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고 새남편인 그리스도와 결혼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떤 남편이 공부도 우수하게 잘하고 좋은직업도 가지고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성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런 남편과 결혼한 아내는 시간이 갈수록 그 남편은 너무 완벽하므로 그 기준이나 표준에 맞지 않으면 야단을 치고 그래서 결국은 이 아내는 주눅이 들고 기가 꺽이고 두려움과 불안속에 우울증에 시달리고 남편이 퇴근하여 문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그런데 이 남편이 사고로 죽게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얼마 안되어 새 남편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따뜻한 마음을 가진 훈남이었다. 여러 실수에 대해서 그럴수도 있지, 하고 이해와 용서, 관용과 인내로 대하므로 이 여인은 그 모든 우울증이 치료되고 따뜻한 사랑과 은혜안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었다. 이것이 신자가 구원받기 전의 율법과 죄의 남편과 함께 사는 삶과 구원이후의 주님과 은혜안에서의 삶을 비교한 예화이다.

(1) 내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롬7:4)
그리스도인은 전에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게 되었다. 그 삶은 고통스러운 삶이었다. 그런데 율법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죽게 된 것이다. (7:4)

(2) 율법아래 삶은 육신안의 삶이다. (롬7:5)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하면 욕구가 나라는 인격을 지배하게 된다. 내가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죄의 정욕은 죄를 짓도록 충동질하고 조정하게 된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어떻게 작용하였는가? 율법이 죄를 격동시키고 일으키고 불 일 듯하게 하였다. 죄의 정욕은 먼저 생각과 상상속에 역사한다. 예를 들면 마음에 음욕을 품게 하고 다음에 지체들로 행동하게 한다. (마6:18, 롬6:12~13) 그래서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한다. 롬7:5절에서 죄의 무서운 성질, 가공할 권세, 죄의 충동과 죄의 정욕이 존재함을 본다. 불신자는 이를 억제할 수 없다.

(3)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이란? (롬7:6)
이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결혼하였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율법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7:5,8:1)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남과 함께 새 본성이 주어지고 성령이 함께 내주하게 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육신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성령의 지배아래 있게 된다. (롬8:9)

2. 그리스도인과 율법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롬7:7~13)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만큼 이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다양한 정의가 있어왔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성경에 나타난 율법과 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율법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기준을 제시하는 거울과 같다. 그리고 죄는 인간안에 뿌리를 두고 인간 전 존재를 지배할만한 가공할 만한 세력이다. 나를 알기까지는 나는 자유로울수가 없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다.

(1) 율법이란 무엇인가? (7:12)
첫재로 율법은 거룩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의 표현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을 율법은 요구한다.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므로 거룩하며 하나님의 성품의 복사판이다.둘째로 율법은 의롭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이 공의는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요구하고 잘못했을 때 정죄하고 형벌을 가하게 된다. 로마서는 의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타난다. 셋째로 율법은 선하다. 악과 반대이다. 넷째로 율법은 신령하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신령하다.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외적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이며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므로 신령하다.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내려진 명령이므로 신령하다.


(2)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첫째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한 보편적 지식은 있다. 그러나 율법이 죄를 자신에게 명확히 해주기 전에는 죄의 참된 본질을 알지 못한다. 율법이 죄의 진상과 본질과 성격을 깨닫게 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영혼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그러한 이해를 가져다 주는 것은 율법의 독특한 기능이다. 죄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롬7:7~8,3:20) 둘째로,율법은 죄의 성격과 본질을 드러낸다. (7:8,5:20) 이것은 죄를 짓도록 유도하고 충동질까지 한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행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죄의 깊이와 죄의 어리석음, 참된 죄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죄는 인간의 본성 안에 역사하는 하나의 원리요, 세력이다. ‘죄가 기회를 타서’라는 뜻은 여행할 때 출발점으로 여긴다. 군사작전 때 본영으로 삼는다. 또한 지렛대로 삼는다는 뜻이다. 죄가 율법을 통하여 내 안의 각양 탐심을 이룬다. 그래서 죄는 율법을 만나면 하지 말라하는 것을 더 하고 싶어하고 하라는 것을 하기 싫어하는 반항심으로 나타난다. 죄는 자존심이요, 자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 대해서 예민하다. 칭찬이나 모욕에 대해서 예민하다. 자기를 다치게 하는 것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죽었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민하다. 자기를 초월하는 자만이 자기가 죽은 자임을 늘 자각하는 사람이다. 셋째로, 율법은 죄를 심히 죄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율법은 약도와 같다. 율법은 출발점에서 목적지까지 잘 표시된 지도와 같다. 약도와 지시를 따르게 되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대로 행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율법을 받았으나 소경이라는 것이다.눈을 밝히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눈을 밝히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약도는 율법이고 복음은 눈을 뜨게하는 치료제다. 성도가 눈을 뜨자 필요한 것은 약도인 율법인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나 성화의 조건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칭의와 성화의 목적은 될 수 있다. 눈 뜬 우리가 목적지까지 도달하는데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도록 허용할 수가 있다. 율법자체는 잘못이 없다. 정죄케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 부딪쳤던 바울은 깊은 절망감과 무력감을 깨닫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이다.

(3) 죄가 우리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가?
첫째로 죄가 율법을 이용하여 역사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태어난다. (롬8:7) 율법의 명령이 주어지면 인간안에 있는 반감이 머리를 들게 된다. 인간안에 죄의 원리는 반항심과 반발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공부해라, 서랍에 있는 것을 먹지마라, 이것을 하라말라 요구가 주어지면 청개구리처럼 반항이 일어난다. 죄가 우리안에서 어떻게 각양 탐심을 이루는가를 말한다. 둘째로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므로 나를 죽게 만든다. (7:9-11) 죄가 나로하여금 율법을 잘못사용하도록 속인다. (딤전1:8) 율법을 범하고 절망적인 위치에 있을 때 죄짓게 하는 나쁜 놈은 죄라고 나를 설득시키므로 자기를 정당화시키므로 속인다. 하나님에 대한 부당한 생각을 일으키므로 속인다. 죄책감을 느끼면 안된다고 교육시키므로 우리를 속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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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라 2

[요한복음 18:37] ~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레미야 6:10]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보라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들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하지 아니하니

[에스겔 3: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 버나드 쇼의 잔다르크를 여주인공으로 한 “성녀 잔”이란 역사극이 있습니다.

잔 다르크는 발루아 왕가의 샤를 왕세자를 도와 프랑스에 침범한 잉글랜드군과 그들을 돕는 부르고뉴를 몰아내고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황태자 다우핀은 조바심과 부러움이 가득해 성녀 잔에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 왜 나에게는 그 분의 음성이 들려오지 않습니까? 왕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인데...”

잔은 황태자의 말을 듣고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분명히 황태자 당신에게도 들려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있는 것뿐입니다.

당신은 저녁에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고요한 들판에 홀로 앉아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안젤루스의 종이 울릴 때에도 당신은 십자가를 긋기는 했지만 단지 그것뿐이었어요.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기도를 드리고 종소리가 그친 후에도 허공에 울리는 그 여음에 귀를 기울였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와 같이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 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참된 진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을 즐겁게 해 주며 마음에 드는 말만 하는 선생들을 찾으려고 하고, 진리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거짓된 이야기와 가르침을 따를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인터넷 에 떠도는 '카더라'통신을 듣고 읽으며 남을 오해하고 욕하고 비난하는 일에는 어떤 거리낌도 없이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이고, 잘한 일, 좋은 일에 대한 칭찬과 인정에는 참 인색합니다.

듣는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고 들려진다고 다 깨닫는 게 아닌 것입니다.

많은 소리 중에도 내가 듣고 싶고 좋아하는 이야기, 눈앞에 필요한 이야기, 나에게 당장의 유익을 주는 이야기에만 선택적으로 듣습니다. 내 입맛에 달고 맛있는 것만 듣고, 쓰거나 정말 건강에 좋은 것은 안 듣습니다.

[요한복음 5:24~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듣게 하고, 진리를 깨닫게 하고, 영생을 알게 하여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해 말씀하셨습니다.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길바닥 같은 것이며,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은 돌밭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들으면서도 진리가 아닌 생활에 얽매여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은 가시덩굴이 무성한 밭이라고 하였고, 듣고 깨달아 그대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의 마음은 옥토로 비유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과 들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꾸짖으며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바로 보라는 뜻이며, 깨달을 줄 아는 머리를 가진 사람은 바로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들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인격 속에 역사하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마음을 비우고 믿음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경청하고 집중하고 청종하고 순종할 때 말씀의 위대한 역사가 바로 그 심령 속에서 그 인격 안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의무이며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안들리니 음성을 들려달라고 간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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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라 1

[시편 95: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 어느 목수가 전기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목수의 아들이 시계를 갖고 놀다가 그만 톱밥 속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어지럽게 널린 톱밥더미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바닥만 어지럽힐 뿐 좀처럼 시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목수는 아들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아들 곁으로 다가가 말했습니다.

“아들아, 급한 때일수록 당황하지 말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렴. 그러면 해답이 떠오른단다. 자, 이제 나를 따라서 해보거라.”

목수는 전기톱을 끄고 무릎을 꿇은 채 적막한 목재소 마룻바닥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 했습니다.


그러자 아주 가까운 톱밥더미 속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짹깍짹각”

그것은 시계 초침소리였습니다. 그제서야 아들은 잃어버린 시계를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신명기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시편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내 기도에 응답하여 답을 말해주길 기대합니다.

그러나 눈과 손은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귀에는 이어폰을 끼고 입으로는 무언가를 먹으면서 “아~~ 난 왜 주님의 음성이 안들리지?” 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힘든 일, 고난에 부닥쳤을 때 세상소리를 끊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십시요. 그러면 ‘짹깍짹각’하는 해결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릴 것입니다.

[신명기 6: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네가 크게 번성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하고 말하는 것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익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분별해 듣지 못하고 나의 고집과 정욕대로 행하다 실패하곤합니다.

길가에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이 아니듯, 들린다고 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사탄의 소리도 많습니다.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 원합니다.”
“잊었냐? 넌 어제도 말씀을 거역했잖아~ 니 까짓 게 어떻게 말씀대로 살아~~그냥 대충 살아”
“맞아. 내 까짓 게 무슨… 그냥 원래대로 살까? ”

“주님~, 믿음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후후~ 넌 오늘도 믿음 없는 행동을 했잖아~ 믿음대로 살기가 쉬운 줄 알아? 인생 별거있어? 그냥 인생 즐기면서 편하게 살어~”
“음.. 그럴까?”

“주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이거 왜이래~ 지금도 네 맘속엔 미움과 원망이 있잖아~ 미움과 원망과 불평 불만이 가득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 그냥 너 원래대로 살아~”

“그러게..”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님의 음성만 듣겠습니다.”

“뭐야~ 넘어올 듯 안 넘어오네..!”

우리는 말씀대로 믿음대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진 못하지만.. 마귀의 속삭임은 외면하고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8:12] ~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양은 눈이 나빠 앞을 잘 못 봅니다. 양의 다리는 짧아 넘어지기라도 하면 혼자의 힘으로 일어서기 힘이 듭니다. 양은 하루 종일 메~~ 하고 울고만 있는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양은 귀가 발달해 목자의 목소리를 똑똑히 구분해 냅니다.

양은 자기를 지켜주는 목자의 목소리만 듣고 따라가는 고집스런 순종의 동물입니다.

우리도 양처럼 사탄의 소리를 잘 분별하여 주님의 목소리만 듣고 순종해야겠습니다.

어제 하루 어떤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핸드폰에서 나오는 소리, TV 소리, 친구와 이야기 하는 소리, 옆 테이블에서 떠드는 소리, 칭찬하는 소리, 비방하는 소리, 격려하는 소리, 원망하는 소리, 각자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소리, 등등..

그 중에 어떤 소리가 나에게 기쁨과 위안이 되었으며, 어떤 소리가 슬픔과 분노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소리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리는 우리의 목마름을 완전하게 해갈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리는 언제나 우리의 힘이 되며 위로가 되며 능력이 됩니다. 오직 주님의 소리만이 우리의 갈급한 영혼을 시원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두려운 일입니다.

역설적이기도 하고 말장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 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어”라고 말하면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정말 뛰어난 믿음을 가졌다”는 긍정적인 반응과 “신비주의의 신앙에 빠졌다”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어떤 것이 맞을까요?

이 두 반응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고 합니다.

이 두 반응은 하나님의 음성듣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가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수 많은 편견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이런 편견들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편견과 오해들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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